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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물과 숲의 도시 ‘남양주’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4-30 20:32:15
  • 수정 2021-06-17 12: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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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안면 양수리·능내리엔 호젓함과 다산의 얼 숨쉬어 … 광릉·사릉·홍유릉과 수종사·봉선사
1980년 양주시에서 분리된 남양주시는 북쪽으로는 포천시와 의정부시, 동쪽으로는 가평군과 양평군, 서쪽으로는 서울시와 구리시, 남쪽으로는 광주시와 하남시와 맞닿아 있다. 

남양주시 한가운데에는 해발 812m의 천마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사냥을 나온 이성계가 ‘이 산은 매우 높아 손이 석자만 더 길었다면 하늘을 만질 수도 있겠다’라고 하여 천마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또 조안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조안면 양수리 북서쪽에 위치한 운길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주변에 팔당호, 서울종합영화촬영소, 금남유원지 등이 있어 주말 가족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밖에 축령산, 백봉산, 예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수려한 산과 계곡 및 이름난 수목원과 휴양림이 많다. 특히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풍경은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 … 고향마을에 편히 잠들다

다산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

남양주시는 다산 정약용이 얼이 서린 도시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는 ‘정약용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마재마을은 정약용의 생가가 남아 있고 다산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해 75세에 생을 마치기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생가 뒤편 작은 언덕 위엔 다산과 그의 부인 홍씨가 합장묘에 평온하게 안장되어 있다. 여유당(與猶堂) 뒤편 동산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무덤 앞쪽에 조촐한 망부석이 세워져 있다. 

당호인 여유당의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하다’는, 유(猶)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는’ 뜻이다. 당호인 여유는 1800년(정조 24년) 관직에서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것으로 겨울에 냇물을 건너 듯 조심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유배지였던 강진 귤동의 뒷산 이름이다. 조안(鳥安)은 새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맑아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정약용 유적지에는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이 복원되어 있다. 또 다산과 부인의 묘역을 비롯해 기념관과 실학박물관 등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남양주 8경 중 1경에 해당된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6월16일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남 윤씨는 송강 정철과 가사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 윤선도의 직계 후손이다. 

다산은 이미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울 정도로 총명하였고 22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정조의 총애와 신뢰를 받으며 젊은 나이에 여러 관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며 정조를 도와 수원화성을 완공하는데 기여했다. 

다산의 정치인생은 천주교와의 인연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청년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벽을 비롯해 다산이 가장 사랑했던 둘째형 약전과 세째형 약종, 매형 이승훈이 모두 천주교 신자로 발각돼 처형되었다. 매형 이승훈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약용과 약전 형제도 한때 천주교 교리서를 읽으며 천주교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다가 후에 거리를 두었으나 순조 원년(1801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로 약전과 약용 형제는 신지도(완도군)와 장기현(포항사)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나주 율정점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약전과 약용 두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약전은 흑산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적인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를 남겼다. 

다산은 57세 되던 해 강진에서의 17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리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75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학문과 집필에 전념하며 총 499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저서는 시문집에서부터 국가 개혁사상이 집대성된 <경세유표>, 토지개혁을 주장한 <여전론>,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한 <목민심서>,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한 책인 <흠흠심서> 등 분야 또한 매우 다양했다. 이 중 44권 15책만이 남아 있다. 

그가 모든 저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실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과 부국강병,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와 자세였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자 개혁가였다.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의 대홍수로 유실됐다가 1986년 복원됐다. 다산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중국 북경에서 복제해 온 것으로 실제로 발포가 가능한 홍이포와 기중기 등이 전시돼 있다.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명저들을 비롯해 우리나라 실학의 태동에서 발전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매년 다산문화제가 개최된다. 유적지 옆에는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조성된 ‘다산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운길산 수종사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 자랑’ 

운길산 수종사에서 바라본 두물머리

정약용 유적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운길산(雲吉山) 기슭에는 남양주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수종사(水鍾寺)가 있다. 비탈진 산길을 위태롭게 올라야 하지만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사찰이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 장한 은행나무와 그 뒤편으로 펼쳐지는 두물머리 풍경이 압권이다. 조선 초기 문장가인 서거정은 수종사를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극찬했다. 

수종사의 창건 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경내에서 1439년에 세워진 태종의 다섯째 딸 정의옹주의 부도가 발견된 점을 보아 그 이전에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종사는 세조 4년에 크게 중창했으며 이때 18나한을 봉안하고 5층 석탑(1459)을 세웠다. 

1458년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요양을 하고 돌아오던 중 지금의 수종사 근처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디선가 은은하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자 세조가 진원지를 찾으니 운길산 바위굴 속에 18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 또 굴 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을 알게 된 세조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 부르게 하였다. 

다산 정약용,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도 이곳을 찾아 차를 마셨다고 한다. 특히 다산은 수종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유사종사기>를 짓기도 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수종사에 지어진 다실인 삼정헌(三鼎軒)에서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차를 대접한다. 시(詩), 선(禪), 차(茶)가 하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삼정헌에서의 차 한잔을 음미해 보자. 고요 속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면 무겁게 싸들고 온 마음의 짐이 모두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듯하다. 수종사는 여러 차례의 중창하였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돼 1974년 다시 지었다.

540년간 울울창창한 광릉숲과 천하명당 광릉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운악산 자락에는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운악산(雲岳山)은 동쪽에 금강산, 서쪽에 구월산, 남쪽에 지리산, 북쪽에 묘향산을 두고 한가운데 위치한 산으로 예로부터 조선의 5대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이 산의 위치와 숲에 반해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묘자리로 찜해 두었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포천시 소홀읍 직동리에 위치해 있지만 광릉과 광릉숲(유원지)는 남양주에 있다. 세종의 18남 4녀 중 둘째 아들인 세조는 생전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고 안정적인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녔다. 수많은 이들을 피비린내 나는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사람이라면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 때문인지 그의 개인사는 흉사로 뒤덮였으며 평생 불치의 피부병으로 고생해야 했다. 

맏아들 의경세자는 왕위에도 올라보지 못하고 19세에 요절하고(후에 성종에 의해 덕종 임금으로 추존된다), 둘째 아들인 예종도 즉위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등진다. 

세조의 피부병에 관해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가 꿈에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세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에 걸리게 되었다.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관을 파내 유골을 바닷가에 버렸다고 한다. 야사의 진위 여부를 떠나 세조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업장(業障)을 녹이기 위해서일까, 피부병 치료를 위해서였을까. 어쨌거나 세조는 전국의 유명 사찰을 돌며 수많은 야사를 남겼으며 여러 측면에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융성의 치적을 보여준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세조와 문수동자의 이야기가 전하며, 충북 보은 법주사에는 세조와 정이품송의 이야기, 보은 복천암과 신미대사(信眉大師)를 통한 피부병 완치 일화 등이 전한다. 이밖에 수종사, 여주 신륵사, 화순 쌍봉사(전남 화순), 해인사, 양주 회암사, 강원도 고성 건봉사, 전남 영암 도갑사, 경기도 양평 용문사 등에 노비와 토지 등을 기증하고, 중수를 도왔으며, 승려들의 노역을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세조는 마음이 편해졌을까.

광릉(光陵)은 무엇보다는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조선 왕조 54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숲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덕분에 광릉숲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인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의 효시가 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생물보전권으로 지정되어 있다. 광릉숲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새 크낙새가 살고 있다. 광릉숲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조선 왕릉 중에서도 광릉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광릉은 원래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 집안의 선산이었으나 왕릉으로 택지 된 후 정씨 묘는 모두 이장하였다.

광릉은 조선 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선 왕릉 변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능이다. 즉 인접한 두 개의 언덕에 각각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하고 하나의 정자각을 세운 왕릉 형식이다. 능제가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경계하여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쓰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광릉의 진입로에는 조선 왕릉에 ‘하마비’가 남아 있고, 울울창창한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광릉의 원찰이 된 천년고찰 운악산 봉선사

운악산 봉선사의 대법당(가운데)와 부속 건물

운악산 봉선사(奉先寺)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당시의 이름은 운악사로 작은 절이었으나 예종 1469년 정희왕후가 광릉의 원찰로 지정한 후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로 이름을 바꿨다. 

봉선사 입구에는 높이 20m, 둘레 5m가 넘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정희왕후가 손수 심었다고 전한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봉선사는 명종 6년(1551년)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정책으로 교종의 우두머리 사찰이 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됐다.  명종 17년에는 교종 본산이 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1911년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사찰령으로 31본산의 하나가 됐고 교종 대본산으로 지정됐다. 

1950년 6.25 전쟁으로 14동 150칸의 전각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큰법당 등 대부분의 전각들은 1960년 이후 중창됐다. 봉선사 대웅전에 걸린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은 우리나라 사찰 중 최초의 한글 현판이다. 

삼성각, 지장전, 조사당, 관음전, 운하당, 방적당, 범종루 등이 있으며, 삼성각은 한국 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당우이다. 

봉선사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동종으로 보물 397호로 지정돼 있다. 예종 원년에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봉선사 중창 당시 주조된 봉선사 대종은 음통이 없고 종의 입구가 넓어지고 몸통에 두 가닥의 띠를 넣은 점, 조각 수법이 통일 신라 시대 이후의 범종 양식을 따르지 않는 점 등 조선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선사 부도전에는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춘원은 해방 이후 그와 친척인 운허 스님의 배려로 봉선사에 머무르면서 집필 활동도 하고 절에서 운영하는 광동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무정>, <유정> 등 한국 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친일 행각으로 인해 문학작품 자체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봉선사 오채현 석조각 초대전
 ‘해피 붓다, 해피 타이거전’

봉선사 경내에서는 석가탄신일을 기념해 오채현 석조각 초대전
 ‘해피 붓다, 해피 타이거전’이 4월 27일~8월 31일에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는 높이 3.5m의 거대한 사방불과 현묘탑을 비롯해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봉선사 연못과 정원 일원에서 선보인다. 우리에게 친근한 호랑이와 산신령 등의 조각들도 다수 전시되고 있다. 신록의 계절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가득한 봉선사 도량이야말로 코로나 19로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니 한번쯤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단종비가 묻힌 사릉과 구한말 두 임금 묻힌 홍유릉

광릉에서 20km정도 떨어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1440~1521)가 묻힌 사릉(思陵)이 있다. 남편을 죽인 자와 죽어서도 지척에 누워 있는 정순왕후의 사후가 편할 지 걱정이다. 남편 단종은 강원도 영월 장릉(張陵)에 묻혀 있다. 

정순왕후는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함께 군부인으로 강등되었고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살았던 ‘정업원’(淨業院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82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세상을 뜬 정순왕후를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시가인 양주군 묘역에 모셨다. 

1698년(숙종 24년)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함께 복위되자 사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사릉은 선정릉과 함께 2013년 CNN이 선정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4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

사릉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홍유릉(洪裕陵)이 있다. 홍릉은 조선 26대 왕인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이고, 유릉은 조선 마지막 왕인 27대왕 순종과 그의 정비 순명효황후와 계비 순정효황후의 능이다. 또 영친왕과 의친왕,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묻혀 있다.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부르게 되면서 최초의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묘역 역시 명나라 황제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성했다. 

홍유릉은 규모도 크고 화려하지만 이전 왕릉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능침의 삼계(상계, 중계, 하계의 3계단)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拜展)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정사각형) 대신 일자형(직사각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향로를 따라 양 옆으로 문인석, 무인석과 말, 양, 사자, 해태, 코끼리, 기린, 낙타 등 그동안 묘역 조성에 등장하지 않았던 동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세운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10

홍유릉 앞에는 남양주 역사문화 복합 공간인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01’이 조성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 서거 111주년을 기념해 지난 3월 26일 개관한 은 남양주 화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李石榮, 1855 ~ 1934)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과 넋을 기르고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한일합방이 강행된 1910년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워졌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는 오늘날의 가치로 약 2조원에 달하는 토지와 재산을 처분해 식솔 60여 명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석영은 북경에서 비참한 생활 끝에 생을 마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이회영은 상하이에서 밀정에게 걸려 고문 끝에 옥사했다. 5형제가 옥사 또는 아사항렸다. 

벽돌 하나하나에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적힌 계단을 내려오면 일제강점기의 고통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뤼순(여순)감옥과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받는 모습, 일제강점기 시대의 법정 등이 재현돼 있다. 독립운동 관련 영상이 상영되는 미디어홀과 컨퍼런스룸이 있다. 

다만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공간에 입주한 대형 베이커리와 카페는 일제강점기의 고통스런 역사를 되새기려는 기념의 장소에 어울리는지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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