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북단의 정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치우진 파주는 북으로는 임진강, 서로는 한강이 흐른다. 임진강은 공릉천, 문산천, 갈곡천, 비암천 등 크고 작은 지류로 흘러내리다가 오두산성 아래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두 강의 하류에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진다. 동북쪽으로는 연천군, 동쪽으로 양주시, 남쪽으로 고양시, 남서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김포시와 맞닿아 있다.
파주라는 지명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증보문헌비고’ 다. 고조선 땅이었던 파주는 마한 땅이 되었다가 삼국시대에는 차례로 백제, 고구려(475년), 신라(신라 진흥왕)의 영토가 됐다. 조선시대 원평도호부였던 파주에 세조의 왕비(파평윤씨 정희왕후)의 친정이 있었기에 ‘목’으로 승격됐다. 파주(坡州)란 이름은 파평(坡平)에서 유래됐다.
6.25전쟁 이후 파주는 접경의 군사도시란 이미지가 강했으나 2003년 파주 운정 신도시 개발 이후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해 새로운 도시로 발돋움 중이다.
수련과 인공폭포, 세계의 미니정원을 집약한 파주 벽초지수목원
파주에는 임진강변의 반구정과 화석정을 비롯해 황희 정승 유적지, 율곡 이이 유적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보광사, 파주 삼릉과 등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다. 또 파주 출판단지, 프로방스, 신세계아웃렛, 헤이리예술마을 등 문화쇼핑공간,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도라산 전망대 등 안보 관광지, 감악산 흔들다리와 마장호수, 벽초지수목원 같은 대중적인 관광지를 두루 갖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매력적인 도시다.
더욱이 해마다 열리는 파주 북소리축제, 파주 포크페스티벌, 파주 장단콩축제, 파주 개성인삼축제, 파주 평화기원 마라톤대회 등 다양하게 열리는 문화행사와 축제는 파주가 흥의 도시라는 데 토를 달 수 없게 한다. 한마디로 파주는 4계절 언제 어느 때 찾아도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북한의 함경남도에서 덕원군 풍상면 용포리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장장 254km를 흘러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 한강과 만난다. 임진강은 물살이 빠르고 강 절벽의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어 풍광이 유달리 아름답다. 많은 옛 선비들이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강변에 정자를 짓고 시와 학문을 논했다.
황희의 반구정 … 갈매기 한가롭게 날던 얕은 강변, 지금은 철조망에 갇혀
황희 정승이 은퇴 후 말년을 보낸 임진강 하류의 반구정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伴鷗亭)은 세종 때의 정승 황희가 지은 정자이다. 황희 선생 유적지 내에 있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말년을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겠다는 뜻으로 ‘반구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반구정 아래 임진강변에는 철조망이 처져 살벌하기 그지없다. 조선시대 최고의 정승도 훗날 나라가 두 동강 나고 산하가 철조망에 가로막히게 될 지는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희 정승은 조선 시대 최장수 정승이자 성품이 어질고 청백리로 이름 나 있다. 그의 청백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와 활약상이 전해져 온다. 그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황희 정승 유적지 내에 있는 기념관을 찾아보면 좋겠다.
반구정에는 조선 중기 문신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반구정기가 걸려 있다. 허목의 무덤은 파주에서 멀지 않은 연천군에 있다. 반구정기에 ‘반구정은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쯤 떨어진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매일 조수가 나가고 펄이 드러나면 갈매기가 날아드는데 너무도 편편하여 광야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고 9월이 되면 철새가 날아들고, 서쪽으로 바다의 입구까지 30리가량 된다’고 적혀 있다.
허나 지금은 갈매기도 철새도 보이지 않는다. 반구정 옆에는 앙지대라는 또 하나의 정자가 있는데, 1915년 원래 있던 반구정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지은 정자다. 반구정에서 내려와 비탈길을 내려가면 황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유적지 내에는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영당과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화석정, 선조의 임진왜란 예견 … 피난길 오른 선조에 불태워져 길 밝힌 忠心
율곡 이이 집안이 대대로 관리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의주 피란에 도움을 준 화석정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가 관직에서 물러나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화석정은 율곡마을 북쪽의 깎아지른 임진강변 절벽 위,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강 건너로는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지는 곳에 세워져 있다. 화석정이 있는 곳은 한양과 평양 및 개성으로 건너가는 길목으로 명나라의 칙사(사신)였던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이 이이의 학문에 반해 이곳을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밖에 권람(權擥), 정철(鄭澈), 오억령(吳億齡) 등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원래 화석정은 이이의 5대조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에 지은 정자로 성종 9년(1478) 이이의 증조부인 이의석이 중수하고 주변을 꽃과 괴석으로 단장하고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 이이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율곡(栗谷)이라는 그의 호도 마을 이름인 율곡리에서 따 온 것이다. 화석정에는 그가 8살 때 화석정에 올라지었다는 ‘팔세부시’가 걸려 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 드니 /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80년 이상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와 이후방이 현종 14년(1673)에 복원했다.
화석정 아래 임진나루에는 이이와 선조와 관한 일화가 전한다. 왜구가 침입해 올 것을 예견했던 이이는 틈나는 대로 화석정에 기름칠을 해 두었다. 이이가 죽고 난 뒤 8년 후에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일행이 칠흑같이 깜깜한 밤 임진나루에 도착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수행하던 이항복이 기름 먹인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6.25전쟁 때 다시 파괴된 것을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오늘날 모습으로 정비됐다. 화석정에 오르면 휘돌아나가는 임진강과 너른 장단평야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율곡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 성수침·성혼 부자는 파주서원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紫雲書院)과 율곡의 가족묘가 있다.
자운서원은 광해군 7년(1615)에 이이의 제자 김장생(金長生)에 의해 설립되었고 효종 원년(1650)에 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713년 김장생과 박세채를 추가로 배향했다. 고종 5년(1868년)에 흥선대원권의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지방유림 기금과 국비 보조로 17억원을 들여 복원했고 1975~76년에 보수했다. 서원 앞의 50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말없이 이곳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율곡의 가족묘에는 율곡의 부모와 율곡 부부의 묘 등 가족묘 13기가 조성돼 있다. 부모의 묘 위에 자식이나 후손의 묘를 조성하는 역장(逆葬)인 게 특기할 만하다. 자운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 중기 학자인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 유학자 백인걸(白仁傑)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파산서원(坡山書院)이 있다.
보광사 곳곳에 영조의 흔적 … 생모 숙빈 최씨 사당 ‘어실각’과 영조가 심은 향나무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의 원찰인 파주 고령사 보광사
파주시 광탄면 고령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보광사(普光寺)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파주의 한계령이라 불리는 됫박고개를 넘어야 한다. 보광사는 사계절이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이다. 봄에는 주차장부터 대웅보전까지 목련과 벚꽃, 명자꽃이 만발한 꽃대궐로 변신한다. 가을에는 빨간 단풍과 은행나무가 알록달록 산사를 물들인다. 해탈문을 지나 계곡을 5분 정도 오르면 돌로 높게 쌓은 축대와 담장 위로 전각들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축대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서면 만세루와 높이 20m를 훌쩍 넘는 은행나무와 쌍사자 석등이 먼저 반기고, 곧이어 아담한 마당과 대웅보전과 원통전, 응진전, 지장전, 범종각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광사는 원래 파주와 양주의 경계를 이루는 고령산(高靈山, 高嶺山)의 이름을 따서 고령사(古靈寺)라 불렀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8년(894)에 임금의 명으로 도선국사가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 고종 2년(1215)에 원진국사가 중창했고 우왕 14년(1388)에 무학대사가 삼창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돼 광해군 4년(1612)에 설마와 덕인 두 스님이 법당과 승당을 복원했다. 보광사의 마지막 중창은 조선시대 고종 33년(1896)과 고종 38년(1901) 사이에 이뤄졌으며 당시 많은 궁중의 여인들이 불사에 동참했다고 한다.
보광사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와 친모 숙빈 최씨와 깊은 연관이 있는 절이다. 영조는 생모가 무수리라는 이유로 재위 내내 신분적 열등감에 시달렸다.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과 왕실의 지위 격상을 위해 묘제를 바꾸는 일련을 조치를 취했다. 그는 1753년 고령산 팔일봉에 있는 생모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묘를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시키고 인근에 있던 고령사를 보광사로 개칭하고 소령원의 원찰로 삼고 어실각(御室閣)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어실각 옆에는 자주 찾아올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향나무를 심었다. 대웅보전 오른쪽 뒤편에 사방 한 칸짜리 어실각과 향나무가 서 있다.
영조는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대대적으로 중수했고 대웅보전의 현판을 직접 썼다. 영조가 보광사를 중수할 당시의 건물인 만세루는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상궁이나 부녀자가 불공을 드렸던 곳으로 추정된다. 만세루 툇마루에 걸려 있는 커다란 목어가 시선을 끈다. 몸통은 분명 물고기인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고 머리에 뿔까지 있는 것이 영락없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과 만세루는 6.25전쟁에도 타지 않고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보광사의 대웅보전은 다른 절집 벽들처럼 석회를 바른 회벽이 아닌 나무벽이다. 벽면마다 민화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범종각에는 인조 9년(1631)에 만들어진 범종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58호)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 뒤편 미륵전에는 최근에 조성된 거대한 미륵보살이 고령산과 보광사를 굽어 보고 있다. 가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또 하나 보광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나무 숲이다. 입구와 절 뒤편에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푸른 전나무 숲이 웬만한 휴양림 못지않다. 내친 김에 도솔암이나 정상인 앵무봉까지 올라도 좋다.
파주 三陵 : 한명회의 셋째딸 넷째딸 묻힌 공릉과 순릉 … 사도세자 형님 부부는 영릉
보광사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파주 삼릉이 있다. 보광사 관람 후 영조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 소령원을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소령원은 허가를 받아야 관람이 가능하다.
파주 삼릉에는
공릉, 영릉, 순릉 등 3기의 왕릉이 있다. 공릉(恭陵)은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조씨가 묻혀 있다. 한명회의 세째 딸인 장순왕후는 세조의 차남인 예종(睿宗 1450~1469)의 세자빈이 되었으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원자를 출산하자마자 꽃다운 열 일곱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세자빈묘로 단출하게 조성됐다. 병풍석과 망주석 등도 모두 생략됐다. 1468 왕위에 올라 1년 만에 승하한 예종은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와 고양 서오릉 창릉에 묻혀 있다.
순릉(順陵)은 성종(예종의 첫째형인 의경세자의 차남, 형은 월산대군)의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이다. 열한 살에 세조의 손자인 성종과 가례를 올리고 열세 살에 왕비로 책봉됐다. 성종 5년(1474)에 후사 없이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릉 중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순릉에 묻힌 공혜왕후와 공릉에 잠들어 있는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다. 자매가 지척에 누웠으니 저승에서라도 덜 외로울까. 두 명의 왕을 사위로 맞이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칭호를 받은 한명회(韓明澮)는 어린 두 딸을 잃고 행복했을까. 참고로 한명회는 청주 한씨로 청주시 동부에 있는 상당구가 그의 뿌리다. 말년까지도 부와 권세를 누리다 사망했다. 그러나 이시애(李施愛)의 난 당시에는 반역에 공모했다는 혐의로 사돈인 세조에게 체포돼 신문을 당하기도 했고, 죽은 지 16년 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됐다 하여 부관참시의 형을 받았으니 세상의 권세와 부귀영화도 다 부질없어 보인다.
영릉(永陵)은 추후 진종(眞宗 1719~1728)으로 추존된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와 효순왕후 (孝純王后) 조씨(1715~1751)의 능으로 삼릉 중 유일한 쌍능이다. 효장세자는 사도세자의 형으로 1725년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10세 때 사망했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됐다.
서울서 개성 오가는 길목의 미륵불 모신 기도처,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파주 삼릉에서 7 km쯤 떨어진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 중턱에 고려 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龍尾里磨崖二佛立像)’이 있다. 석불의 크기가 17m에 달하며 얼굴 길이는 2.5m나 된다. 보물 제93호로 지정돼 있다. 용미리는 서울에서 개성을 오가는 길목으로 미륵댕이라 불렸으며, 이 지방 사람들은 이 거대한 석불을 쌍미륵이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겼다.
용암사(龍巖寺) 일주문을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소나무 숲 사이로 불상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새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머리 위에는 돌갓을 쓰고 신체 비율도 맞지 않는 등 그동안 보아왔던 정갈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마애불과는 달리 토속적이고 투박해 보인다. 지방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석상은 남상, 모난 갓의 석상은 여상이라 하는데 불상이 아니라 장지산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
이 마애불상에는 고려 선종과 왕자 한산후(漢山候)의 탄생 설화가 전한다. 고려 선종이 후사가 없어 고민 하던 중 부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에 두 스님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정말로 거대한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도승을 새기고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이 바위 불상은 득남을 원하는 여자들과 병의 완쾌를 바라는 이들의 효험 있는 기도처로 알려져 오늘날에도 많이 이들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