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산과 들녘의 모양새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아늑한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영락없이 충청도에 들어선 것이다.
야트막한 구릉이 물결치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모습은 온화한 할아버지의 미소처럼 푸근하다. 어디선가 ‘어셔 오셔유. 오시느라 고생했시유.’ 하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충청도 사람들이 대체로 모난 구석이 없고 성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는 게 이런 산과 들을 닮아서인 듯도 하다. 기분 좋게 살기에도 짧은 세상 굳이 각을 세우고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터득했을까.
간혹 충청도 사람들에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속이 음흉하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다’는 박한 평가를 내리는데 이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충청도의 자연에서 비롯된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서산에는 역사문화 유적지나 문화재 등 볼거리가 없는 듯한데 알고 보면 또 너무 많아서 놀라움을 선사한다. 특히 백제시대 해로를 통해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던 문화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유적지 및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고대 중국-한국-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문화 교류의 증거이자 한국 고대미술의 걸작품으로 꼽힌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보원사는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나 승려들이 머물면서 수행을 하던 곳으로 이 역시 백제-중국 간 문화교류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백제의 미소’
충청도 지방에서 발견되는 사찰이나 불상들이 하나같이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풍기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상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애불이 바로 ‘서산 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이다.
서산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 용현계곡에서 처음 서산 마애삼존불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풍저수지를 지나 시작되는 용현계곡 또는 강댕이골 계곡 깊숙이 들어가 제법 긴 계단을 올라서면 일명 ‘서산 마애삼존불’이 환하게 웃으며 방문객을 반긴다. 세 분의 부처님들이 일제히 충청도 특유의 느린 말투로 ‘어서 와유, 오느라 힘들었지유?’ 하고 환하게 웃어주는 듯 하다.
서산의 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에는 근엄함이나 엄격함 대신 자비로움과 인간미가 가득하다. 장터에 나가 손주들 군것질거리를 사들고 들어오는 할아버지의 얼굴처럼 환하고 인자하다. 오른쪽 한 손에 보주를 들고 서 있는 보살이나 왼편의 한쪽 다리를 다른 쪽에 올리고 앉아 있는 보살의 표정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다. 돌에 새겼다고 믿기 힘든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한 얼굴 표정과 부드럽게 늘어지는 옷자락 등 섬세한 솜씨에 ‘말문이 막힌다’라는 표현 외에 달리 어떤 표현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하게 동짓날 해뜨는 방향을 향해 서 있는 서산마애불의 미소는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아침의 미소는 평화롭고, 저녁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띤다. 혹자는 ‘가을해가 서산을 넘어간 어둔 녘에 보이는 잔잔한 미소가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하는가하면 혹자는 첫 새벽의 미소를 최고로 친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이 아름다운 미소는 어딘지 충청도 사람들의 미소를 닮아 있다. 봄이 오는 문턱에서 코로나19로 인해 유난히 길고 힘든 겨울을 난 중생들에게 서산 마애불이 어떤 미소로 맞이해 줄 지 한번 가 볼 일이다.
서산시는 지난 해 서산마애삼존불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첫 사업으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태안군과 예산시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태안마애삼존불(국보 제 307호), 예산사면석불(보물 제 794호) 등을 묶어 함께 등재를 추진할 방침이다. 조만간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이 탄생할 날을 기대해본다.
서산마애삼존불에서 용현계곡으로 2km정도 더 올라가면 탁 트인 분지에 옛 보원사 절터가 나온다. 보원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돼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융성했던 사찰로 옛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5층 석탑, 부도와 부도탑비, 석조 등이 남아 있다.
보원사지와 5층석탑
보물 제 102호로 지정된 보원사지 석조(石槽)는 길이 3.48m, 너비 1.75m, 높이 0.65m로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용기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보원사 5층 석탑(보물 104호)은 고려시대 석탑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기단부와 5층 몸돌 사이에 넓적한 굄돌이 하나 더 올라가져 있는데, 보령 성주사터 삼층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이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의 특징으로 눈여겨 볼 만하다.
상왕산 개심사 – 마음이 열리는 절
보원사지에서 20여 분 떨어진 상왕산(象王山) 기슭에는 마음을 여는 절 ‘개심사’(開心寺)가 다소곳하게 들어 서 있다. 서산 8경 중 4경으로 꼽히는 개심사는 654년(의자왕 14)에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개원사(開元寺)라 했으며,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처능이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바꿔 불렀다. 현재의 전각들은 1955년 이후 전면 보수를 거쳤으며 대웅전은 보물 제 143호, 명부전과 심검당은 충남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다.
‘지혜의 칼을 찾는 곳’인 심검당(尋劍堂)의 휘어지고 갈라진 기둥은 자연스럽게 나이들어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가만가만 절 마당과 연못 주변을 거닐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 하다.
개심사는 무엇보다도 봄날의 나뭇가지가 처질 정도로 활짝 피어나는 주먹만한 왕벚꽃과 여름날 100일 동안 선홍빛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가 유명하다. 다른 곳의 벚꽃이 다 지는 4월말이 되면 개심사는 왕벚꽃이 가득한 꽃대궐로 변한다. 특히 개심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청벚꽃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든다.
해미읍성, 서산 제1경 – 230년간 충청병마절도사영 건재
개심사에서 1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해미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서산 해미읍성은 1418(태종 18년)~1421(세종 3년)년에 서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성이다.
해발 130m의 낮은 구릉지에 높이 4.9m, 총길이 1800m로 쌓은 성 안에는 동헌을 비롯해 아사 및 작청 등 관청 건물과 민가가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성 둘레에는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 탱자성이라고도 불렸다. 해미읍성 성벽에는 청주, 공주 등 고을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 고을별로 정해진 구간을 맡아 성을 쌓게 하고 만약 성벽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해미읍성은 1652년 (효종 3년)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내포(內浦, 예산·당진·홍성·서산 일대)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다.
해미읍성 동문
1970년 이후 동문과 서문이, 1980년 이후 동헌과 객사 등이 복원됐다. 동서남북으로 모두 4개의 성문이 있으며 주 출입구는 남쪽의 진남문(鎭南門)이다. 현재 진남문 우측의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데다가 코로나19 방역으로 출입이 어수선하다.
성문에서부터 일직선으로 길게 뻗은 길을 따라 가면 병마절도사(호서좌영장, 충남북서부 관할)와 해미현감을 겸하는 장의 집무실로 사용되던 동헌과 살림집이었던 내아 및 객사가 복원돼 있다. 길 양편에는 조선 시대의 다양한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최대 순교성지로 천주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약 10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해미읍성에서 처형당했다. 성 곳곳에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특히 성문과 동헌의 중간 쯤에 서 있는 300년 넘은 회화나무에는 신도들의 머리채를 매달아 놓았던 철사줄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의 처참함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호야나무는 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인데, 해미읍성의 순교성지를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된다. 2014년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해미읍성을 찾은 것도 이곳이 천주교 신도들의 순교성지였기 때문이다.
해미읍성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해미순교성지에는 기념관, 무명순교자의 묘, 순교탑 등과 교황 방문 기록 등이 보관돼 있다. 한국 천주교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인근의 보령 갈매못성지와 베론성지 등의 천주교 성지를 함께 방문해도 좋다.
동헌의 뒤편 언덕 위에는 울창한 소나무숲과 대나무 숲이 조성돼 있고, 1491년(성종 22년)에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세운 정자 청간정(淸澗亭)이 복원돼 있다. 1494년 해미읍성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가 시를 남겼고 권오복의 문집 ‘수헌집’에도 청허정을 방문한 사람들이 지은 시들이 전한다.
청허정은 1872년 ‘해미현지도’에 이미 옛터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청허정 터에는 일제의 신사 건물이 있었으나 광복 후 철거됐다. 청허정은 1976년 복원되고 2011년에 재정비돼 현재에 이른다.
간월암 - 달을 품은 절
바다 한가운데서 울리는 풍경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조선 태조의 왕사 무학대사는 서해안 간월도에 배꼽처럼 붙은 작은 섬에 암자를 짓고 검푸른 바다 위에 뜬 하얀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간월암
간월암(看月庵)은 삼국시대에는 피안도 피안사(彼岸島 彼岸寺)라 불렸으며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물이 가득찼을 때는 한 송이 연꽃이 피어 있는 듯도 하고, 한 척의 배가 떠 있는 듯도 하여 연화대 혹은 낙가산 원통대라 불렸다.
간월암은 하루 두 차례 썰물 때에 바닷길이 열려야 들어갈 수 있다. 예전에는 정원 25명의 나룻배가 쉴 새 없이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지만 지금은 공사 때문인지 나룻배는 운행하지 않는다. 간월암에 도착하니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갯벌 위로 공사 차량이 서둘러 빠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갯벌을 건너 간월암으로 올라서니 마치 배 갑판에 승선한 느낌이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 위에 배 몇 척이 떠 있지 않았다면 바다인지 땅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바다는 잔잔하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간월암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암자의 보호난간에는 알록달록한 소원 종이들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관음전과 산신각, 용신각은 단청을 새로 칠해 말끔해졌고 종각도 새로 조성됐다. 이제 작은 암자가 아니라 어엿한 사찰의 모습을 갖췄다.
1941년 만공스님은 폐사 상태의 간월암을 중건하고 조국해방을 기원하는 천일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고 3일 후 기적처럼 해방이 되었다고 한다.
간월암에서 생산되는 어리굴젓은 무학대사가 태조에게 진상했을 정도로 맛나다. 이후 간월암 어리굴젓은 궁중의 진상품이 됐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만조 시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에서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 군왕제가 열린다. 3~4월은 주꾸미와 새조개가 제철이다. 간월암에 오면 어리굴젓과 살오른 새조개와 주꾸미를 맛보는 것도 잊지 말자.
서산 부석사, 보석같은 절
간월암에서 약 10km 거리에 있는 서산 부석사(浮石寺)는 서산의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곳으로 이곳에도 만공선사의 일화가 전한다. 도비산 자락의 이 절은 677년(문무왕17)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있다.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중건했다고 전한다.
서산 도비산 부석사
서산 부석사 안양루(安養樓)에 서면 멀리 천수만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천수만의 풍경이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산자락에 펼쳐져 있는 거석들과 휘어진 고목들도 매력적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의 안양루도 이름이 같고 소백산 석양을 서정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다.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89년(숙종15년)에 경종의 탄생을 기념해 조성한 것으로 원래 용봉사라는 절에 있던 것을 1905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산신각 뒤편으로 올라가면 만공선사가 수행하던 토굴이 있다.
영주 부석사와 동일한 ‘선묘낭자’ 창건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며 선묘각에 선묘낭자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경내에 ‘부석사’라고 적힌 바위가 있다. 돌 석자 ‘石’의 가운데에 점이 하나 찍혀 있는데, 이는 공중에 떠 있는 돌이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기 위해서라고 한다. 부석사 현판은 만공스님이 70세에 쓰셨고, 요사채로 사용하는 심검당 현판은 경허스님의 글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