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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단군신화부터 대몽항전, 병인양요까지 …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2-26 14:29:48
  • 수정 2021-06-16 09: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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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인돌, 참성단,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당, 광성보로 이어지는 파노라마 … 유배와 망국의 恨 가득
강화도는 수도권에서 가깝고 역사문화 유적지와 즐길 거리가 풍부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석모도, 무의도, 교동도 등 인근 섬들과 연결되는 연륙교까지 놓이면서 예전보다 풍성한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강화도는 제주, 거제도, 진도에 이어 네 번째로 큰 섬이다. 김포반도의 일부였으나 바다와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나와 섬이 됐다. 주변에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여러 강을 끼고 있는 강 아랫고을이란 뜻으로 ‘강하’(江下) 라고 불리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경 처음 ‘강화’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1997년 개통된 강화대교와 2002년 건립된 초지대교를 건너는 방법이다. 강화대교는 강화도 갑곶리와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사이에 놓인 다리로 강화읍과 강화읍성,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일대를 여행하기에 용이하다. 강화군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초지대교를 건너면 마니산과 정족산, 전등사, 초지진 등을 먼저 만나게 된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모든 역사의 전 과정을 백업받아 놓은 파일 저장소 같은 섬이다. 단군 신화에서부터 선사시대와 대몽항전, 신미양요, 개항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증명하는 유적지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섬은 단연 강화도가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난을 피해 쫒겨온 왕조나 몰락한 권력자나 벼슬아치들이 잠시 머무른 피난처 또는 유배지의 역사이고 침략세력을 끝까지 막아내지 못한 수탈의 현장이었기에 슬프고도 쓸쓸하다. 

몽고군이 침략하자 고려는 수도를 강화로 옮겨 39년 동안 대몽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원나라에 투항하고 개성으로 환궁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강화도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했다. 화친이라는 명분 아래 이뤄진 치욕스런 항복이었으니 고려왕조와 민중들의 한이 서린 섬이 강화도이다. 

한 많은 고려왕조의 네 명의 왕실 사람들의 묘와 고려시대 최고의 문인으로 꼽히는 이규보의 묘가 강화도에 남아 있다. 몽고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민중들의 염원과 불심으로 완성된 위대한 ‘고려 팔만대장경’의 16년에 걸친 판각작업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이뤄졌고 1399년(조선 태조 8년)에 경남 합천 해인사로 옮긴 것이다. 

1866년 프랑스 극동함대가 자국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박해를 이유로 강화도로 쳐들어왔으나 정족산성에서 막아냈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강화도 광성보에서 어재연 장군이 미국 해군과 격전을 치렀다. 1876년에는 조선과 일본의 강화조약(병자년 조일수호조규)이 체결돼 강제적인 개항이 이뤄졌다. 이런 비운의 역사를 앞서 맞은 게 강화도다. 

그런가하면 조선시대에 강화도는 높으신 양반들의 단골 귀양지였다. 25대 철종이 되는 이원범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였고, 연산군은 인근 교동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 묘는 서울 방학동에 있다. 철종을 모신 예릉(睿陵)은 경기도 고양에 있다.

강화도 정족산에는 단군의 세 명의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정족산성)이 있다. 마니산에는 단군께 제사를 지낸 참성단이 있으니 강화도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건국 신화에서부터 조선의 멸망까지 우리 민족의 전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강화도에서 일어났고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강화도를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부를 만한 이유다. 강화 여행은 바다와 산의 풍광을 즐기면서 나무와 풀, 길과 바람이 들려주는 역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답하는 ‘역사와의 대화’에 다름 아니다. 

시대별 혹은 주제별로 꼼꼼 여행 

강화도 여행은 크게 단군신화가 깃든 마니산과 참성단, 정족산성과 전등사 일대, 강화읍과 강화읍성 및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철종의 잠저 용흥궁, 고려궁지 일대 및 젓갈시장으로 유명한 강화 외포리선착장과 최근 연륙교로 인해 육지가 된 석모도 일대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거리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볼거리가 많아 시간 안배를 잘 해야 한다. 강화도에는 시기를 달리하는 유적들이 섬 전역에 산재해 시대별로 구분해 여행 계획을 짜 볼 수 있다. 또는 성지순례, 근대문화 등 테마별로 짜보는 것도 좋다.

고려궁지와 외규장각 의궤 

고려궁지의 일부인 외규장각

용흥궁공원 일대에는 고려궁지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용흥궁, 진무영 순교성지 등이 집중 분포되어 있고 최근 핫한 옛 조양방직 건물을 개조한 카페도 멀지 않다. 

용흥궁공원에서 북문로를 따라 언덕 끝까지 가면 고려궁지가 있다. 강화도는 대몽고 항전시기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1232년(고종 19년) 강화도로 천도했고, 1234년 최우는 2000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  궁궐을 지었다. 규모는 개경의 궁궐보다는 작지만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1270년 고려는 몽고와 화친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 때 몽고의 요구에 따라 강화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했다. 

조선시대에 고려궁지에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봉선전과 조선 행궁(1631) 및 유수부 동헌, 이방청(1654)과 왕의 영정을 봉안하는 장녕전(1695)과 만녕전(1713), 외규장각 등이 차례로 건립됐다. 정조 때 지어진 외규장각(1781~1782)에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절차와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해 총 1000여권의 서적이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의궤 191종 297권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해갔고 건물까지 불태웠다. 1964년 고려궁지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1970년대 이후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강화 동종 및 외규장각 건물이 복원됐다. 

2011년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 290여권이 모두 한국에 반환되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서지학자 고 박병선 박사의 끈질긴 노력과 집념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박 박사는 1975년 프랑스 도서관 촉탁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알게 돼, 도서 목록을 한국 정부에 알리는 등 끈질기게 환수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정부에 반환을 요청했다. 마침내 1866년 약탈당한 지 145년, 소재 파악이 된 지 36년, 환수 협상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 300여 권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박병선 박사는 의궤가 반환되던 해 프랑스에서 별세하였다. 그녀의 유해는 국적기에 실려 태극기와 함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러나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5년마다 임대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여전히 의궤 반환은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03년 복원된 외규장각 안에는 의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영조 임금의 혼례식 행차 등을 재현해놨다. 

진무영 순교성지, 대한성공회강화성당 & 용흥궁

고려궁지에서 북문로를 따라 내려오면 진무영 순교성지와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조금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다. 강화도에는 갑곶순교지, 제물진두 등 천주교 순교지와 유적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진무영(鎭撫營)은 해안경비를 담당하던 군영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진무영 순교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 리델(1830~1884)을 중국으로 탈출시켜 준 죄로 진무영에서 처형당한  평신도 두 명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됐다. 그러나 당시 처형이 이루어졌던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어  진무영과 가까운 천주교 강화성당(성공회 강화성당과 다름) 내에 조성하였다. 진무영에서 처형당한 천주교 신자들은 이들 두 명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성당에서 용흥궁공원쪽으로 내려오면 1900년 한국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프(John Corfe)가 건립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1896년(고종 33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강화도에서 성공회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건립했다.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으로도 불리며 한국의 건축양식과 서양건축 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건물 양식 때문에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 성당 건축에 백두산 참나무가 사용됐고 경복궁 복원 공사에 참여했던 목수들이 건축을 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한옥성당으로 얼핏 보면 성당이 아니라 작은 궁궐이나 사찰 느낌이 많이 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기독교적 요소들이 묻어난다. 

팔작 지붕 꼭대기에는 궁궐 지붕 양식에 쓰였던 잡상(雜像)과 비슷한 조형물이 장식돼 있고 꼭대기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또 중문과 외벽 및 창문 등에 태극 문양과 십자가 문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기독교가 조선민중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이 성당 건축에서도 엿보인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잠저인 용흥궁

이 성당 맞은 편에는 조선 25대 왕인 철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이 있다.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 즉위 이후 강화유수가 크게 중건했다. ‘용흥궁’(龍興宮)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헌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원범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조선 25대 철종임금이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장조)의 증손으로 헌종과는 7촌간이다. 헌종은 정실(정조의 증손자)이었으나 철종은 사도세자와 후궁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원군의 손자였다.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의 손자가 흥선대원군이니 철종과 대원군은 6촌지간이다.

철종이 왕이 되지 못했다면 강화도에서 한낱 촌부로 삶을 마감했거나 다른 왕손들처럼 역모에 엮여 처형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긴 했어도 권문세가에 휘둘리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요절했다. 

용흥궁에서 나오면 높이 솟은 원통 모양의 굴뚝이 보인다. ‘심도직물터’이다. 1947년 설립된 심도직물은 노동자 1200여명을 거느린 국내 최대 방직공장이었으나 시장에서 도태되면서 2005년도에 문을 닫았는다. 과거 심도직물터에 용흥궁공원이 조성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굴뚝의 일부를 남겨 놓았다. 1968년에 발생한 ‘심도직물 노조 사건’은 천주교의 노동운동 개입 및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천주교 강화성당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 조직을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천주교가 앞장 선 것을 기념하는 ‘노동사목’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가하면 1km 거리에 1933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근대식 방직공장인 조양방직 공장이 있다. 현재는 카페로 개조돼 운영되고 있다. 

대로변 비각 안의 비석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대항해 자결한 김상용을 기리는 ‘김상용순절비’이다. 인조 때 문신인 김상용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남문루에 올라 화약을 쌓아 놓고 불을 붙여 자결하였다고 한다. 남문터에 있던 비를 옮기던 중 숙종 때 세워진 구비가 발견되어 신구비 2개를 나란히 세웠다. 국난이 있을 때마다 비석이 눈물을 흘리듯 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용흥궁 일대 여행을 마쳤으면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 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다.  

고려 최고의 문인인 이규보 묘 … 무신정권 하에서 ‘어용’ 소리 듣기도  

평온한 느낌을 주는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의 묘역

정족산성으로 가는 길목인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는 선원사지와 고려시대 문신이자 문인인 이규보 묘역이 있다. 선원사는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사찰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이규보 묘역에는 묘와 사당인 유영각 및 재실이 나란히 조성돼 있다. 묘역에는 봉분과 상석과 석등 및 망주석 한 쌍이 있고 양 옆으로 석인(石人)과 석양(石羊)이 각각 한 쌍씩 놓여 있다. 석물들의 규모가 무척 아담하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강화의 너른 논들이 펼쳐진다. 참 아늑한 명당자리다. 

여주 이씨인 이규보(1168~1241)은 고려 최씨 무신정권 시대의 문신이자 걸출한 문인이다.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오른 이규보는 현실 정치에서는 고려 무신정권에 아첨한 어용지식이라는 비난과 함께 중세 한국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문인이라는 찬사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생선전’  등 55권의 유작을 남겼다. 

이규보 묘 뒤편 소나무 숲 길로 들어서면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길로 접어들게된다. 고려왕릉인 곤릉, 석릉, 가릉을 차례로 만날 수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전등사로 향한다. 

조선왕조실록 지킨 정족산성과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찰 전등사 

해발 220m 정족산(鼎足山)은 생김새가 세 발 달린 가마솥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가졌다. 

산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이 지금의 정족산성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된 전등사(傳燈寺)는 국내 최고의 사찰로 정족산 기슭에 이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 160여 명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동문 쪽에 이를 기념하는 양현수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산성에는 남문, 동문, 서문, 북문지가 있다. 성 안에 1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문과 1976년 복원된 남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남문에는 ‘종해루’(宗海樓)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어 동문보다 훨씬 운치가 있다. 남문으로 들어서서 노거수가 울창한 숲 길을 따라 10여분 정도 오르면 전등사이다. 성벽을 따라 걸을 수도 있다. 이 절엔 특이하게도 일주문과 사천왕이 없다. 마치 남문이 전등사의 일주문 같다. 

정족산 전등사 전경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지어졌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등사 대웅보전과 약사전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 중 으뜸으로 꼽힌다. 대웅보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고개를 들어 대웅보전의 처마 모서리를 올려다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부가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나부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

사연은 이렇다. 대웅보전 중건에 참여한 도편수는 주막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는 여인과 결혼 약속까지 하고 자신이 받은 공사비를 여인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돈을 가지고 다른 남자와 그만 달아나 버린 것이다. 도편수는 배신감에 떨면서 한동안 공사도 중단했다. 겨우 정신은 차렸지만 여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여인을 나부상으로 만들어 영원토록 지붕을 떠받치게 하는 나름대로의 형벌을 내린 것이다. 중생을 계도하고 온 천하에 자비를 베풀기 위해 오신 부처님의 집에 나부상이라니 어쩐지 조금 불경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도편수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는 것 또한 인지상정인가보다. 전등사를 찾는 사람은 모두 한 번씩은 고개를 들어 나부상을 쳐다본다. 여인의 형벌은 무거운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것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것이 더 큰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보물 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특이하게도 무쇠로 만들었다.  1097년(고려 숙종 2년)에 중국 송나라에서 제작돼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 있던 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중국에서 제작된 유일한 철제종이다. 어떤 사연으로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왔을까.

정확한 연유는 파악되지 않지만 일설을 정리하면 세계2차대전 당시 일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강탈해왔는데 그 와중에 쓸려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무기로 만들어지기 전에 일제가 패망하여 부평 군기창에서 쌓여 있는 것을 불심이 깊은 신자가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용 두 마리가 고리 모양으로 엉켜있고 고리 아래 쪽에 8쾌와 16엽의 연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종의 몸통은 이등분돼 각각 여덟개의 사각형이 그려져 있고 각각의 면에는 명문과 문양을 새겼다. 종의 재질이나 형태가 우리나라의 종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쇠로 만들었는데도 조각 솜씨가 세밀하고, 소리 또한 무척이나 청아하다고 한다. 

전등사 명부전 쪽으로 50m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가 복원돼 있다. 조선 왕조 472년의 역사를 기술한 ‘조선왕조실록’은 강화도 정족산 사고에서 지켜졌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심하게 파손돼 방치돼 있던 것을 1998년 복원하고 현판을 새로 달았다. 사고 건물은 꽁꽁 닫혀 있어 담장 너머 눈동냥으로 내부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날씨가 좋으면 사고에서 강화 앞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져 사고는 비어 있지만 역사적 의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기록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었다. 연월일 단위로 그날 있었던 일을 작성하는 편년체 형식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사고인 춘추관과 성주, 충주, 전주 등 3개의 외사고 등 모두 네 개의 사고에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분을 제외하고 모두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다. 

선조 39년(1606) 4월 복원작업을 완료해 5부의 실록을 제작했다. 원본인 전주 사고분은 마니산 사고에, 나머진 네 부 중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에는 신인본을, 오대산사고에는 교정본을 봉인했다. 

전주 사고본은 묘향산과 마니산으로 옮겨졌다가 현종 1년(1660)에 정족산 사고를 짓고 장사각과 선원각에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로 옮겨졌고 1930년대 일본 경성제국대학 등으로 반출됐다가 1945년 이후 서울대 규장각에 반환되어 보관 중이다. 춘추관본은 불에 타 없어졌으며, 오대산본은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47책만 2006년에 반환돼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강화도에는 이밖에 조선시대에 군사 요지로 쌓은 5진, 7보, 54돈대 가운데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돈대 등이 남아 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도 많아 전북 고창, 전남 화순과 함께 강화도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은 고조선 시대인 기원전 51년에 단군왕검이 봄과 가을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으로 알려져 있다. 마니산은 백두산 천지와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에 위치한 상징성을 갖고 있어 지금도 전국체육대회 성화가 이곳에서 피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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