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형업체의 ‘단일품목 대량 구독’으로 흘러 약국들 소외받는 구조 … ‘소분’ 대신 ‘소포장’ 바람직
약사에게 득이 될 줄 알았던 건강기능식품 소분판매 시범사업이 알고 보니 약국이 건기식 회사에 종속돼 유통 경로만 넓혀줄 뿐 실익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서 약사회가 긴급대응에 나섰다.
규제샌드박스 시범사업 형태로 진행 중인 소분 건기식 판매는 대용량으로 포장돼 나오는 건기식을 7일, 15일 단위로 증상에 맞게 맞춤처방해 소비자에게 경제적 부담은 덜어주고 실제 질병 개선 효과가 있는지 체험할 기회를 넓혀주며 인터넷, 대형마트, 다단계판매, 방문판매로 국한된 유통경로를 소비자 신뢰도가 높은 약국 등을 기반으로 넓혀보자는 취지로 시행됐다.
지난해 7월 14일 풀무원 매장에서 처음 시작됐다. 약사, 한약사, 영양사 등이 건기식을 맞춤처방해 소정의 수수료를 받고 소분판매업을 허가받은 업체가 이를 주문받아 배송하게 돼 있다.
이에 따라 2월 1일 기준 17개 업체가 시범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1차로 풀무원(퍼팩), 아모레(in&out 맞춤솔루션), 암웨이(마이팩), 허벌라이프 코스맥스엔비티(파이토웨이), 모노랩스(아이엠), 빅썸이 1차 시범사업에 참여했다.
2차로 한풍네이처팜, 온누리H&C, 녹십자웰빙, 바이오일레븐, 누리텔레콤, 투비콘, 한국야쿠르트 등이 2차 시범사업에 합류했다. 이 중 모노랩스와 빅썸, 한풍네이처팜, 온누리H&C가 약국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소분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씨제이는 네이버와 제휴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난 10년간 일반의약품 시장은 2조4000억원에서 2조9000억원으로 제자리인 반면 건기식은 1조2000억원에서 6조2000억원으로 5배 성장했다. 이에 약국들도 건기식 활성화에 관심을 갖고 있으나 대형업체들의 소비자 직접광고나 다단계판매 또는 방문판매 등을 직접 공략에 끼어들 틈이 없다. 사실상 팔짱끼고 커가는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건기식 소분판매에서도 약국은 들러리에 불과하지 않겠냐는 우려다. 건기식에 정통한 한 약사는 “약사가 인증을 해주면 수익은 대형업체가 가져가는 꼴이 전개될 것”이라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먹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건기식에 대해 나름의 지식과 신뢰성을 갖춘 약사가 그동안 환자와의 상담을 통해 축적한 개인정보를 소분업체가 무료로 사용하는 셈이라며 업체에 고속도로를 깔아주는 격이라고 말했다.
특히 맞춤 건기식 처방이 추진 취지와 달리 한달분 이상으로 처방되고 여러 회사의 양질의 제품이 아니라 한 회사에 국한된 제품으로 집중됨에 따라 브랜드파워과 큰 외형을 갖춘 건기식 제조업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건강기능식품 업체의 한 대표자는 “한번 약사가 환자에 맞는 맞춤형 건기식 표준처방을 내리면 1년치를 선결제하고 ‘구독’하는 시스템으로 건기식 소분판매가 진행되는 양상”이라며 “처방약 조제에 맞춘 약사들이 이를 선점하기는 힘든 구조여서, 약사 주도의 제품과 약사에 맞는 마케팅 기법이 뒤따라야 신흥시장에서 일정한 파이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기도의 한 약사는 “건기식 소분판매는 이의경 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성균관대 약대 교수)과 김대업 현 대한약사회장이 의기투합해 만든 제도로 알고 있다”며 “알고 보면 약사에게 독사과가 될 제도를 깊은 성찰 없이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뒤늦게 건기식 소분판매의 맹점을 간파한 대한약사회는 지난 16일 상임이사회를 열고 약사회는 개인맞춤형 건강기능식품 추천⸱판매가 국민건강을 중심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범사업은 기업중심으로 설계돼 이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약사회 관계자는 “ 현재 시범사업은 약국이 주도해서 건기식 제품을 소분해, 판매할 수 없다”며 “약국은 상담만 하고 샌드박스 참여업체의 제품만으로, 소분, 배송하는 구조 ”라고 설명했다.
이에 약사회는 소분 방식이 아닌 소포장 방식으로 사업모델이 진행돼야 한다면서 현행 규제샌드박스 형태로 본사업이 시작되면 업체만 수익을 내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약사회는 현행 시범사업 과정에서 개별약국, 민간 약사단체, 체인업체의 참여는 개입하지 않기로 방향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