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원은 남쪽으로 포천과, 서로는 연천과 포천과 맞닿아 있다. 동쪽으로는 화천과 홍천 등과 경계를 이룬다. 강원도 양구와 함께 지도상으로 우리나라 최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38선 이북 민통선에 근접한 철원은 백마고지, 땅굴 등 먼 변방의 접경지역의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새로 생긴 세종포천고속도로로 달리면 서울에서 한 시간이면 38선을 지나고 다시 20여 분 후 철원 군청에 닿는다. 그렇게 먼 변방의 도시가 이젠 아니다.
풍요의 땅, 한반도 젓살 같은 곳 ‘철원 평야’
철원을 강원도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산골짜기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철원군 철원읍·동송읍·갈말읍·김화읍·서면·근북면과 북한 평강군 남면 등에 펼쳐지는 철원평야는 강원도 최대 평야지대로 이곳에서 나오는 쌀 생산량은 강원도 쌀 생산량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용암지대가 풍화를 거치면서 형성된 비옥한 토양에서 재배되는 철원 오대산쌀, 철원 사과 등은 맛나기로 유명해서 비싼 값에도 잘 팔려나간다.
북한의 김일성은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 아까운 전답을 다 빼앗겼으니 우린 이제 무얼 먹고 사느냐면서 말이다. 철원 땅 드넓은 평야를 보면 김일성이 통곡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다.
경의선 종착역인 신탄리를 지나 점점 좁아지던 협곡이 한 순간 소멸하며 광활하게 펼쳐진 철원평야는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철원평야는 겨울이면 탐조 여행의 중심지로 탈바꿈한다. 독수리와 두루미 때를 볼 수 있다. 흰두루미와 재두루미가 대부분이고 어쩌다 흑두루미가 눈에 띈다. 시인 서정주는 ‘산 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어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라고 묘사했다. 학의 날아가는 모습을 읊을 것인데 왠지 불우한 지식인과 분단의 현실이 잘 어우러지게 표현한 것 같다.
궁예의 전설이 흐르는 곳 … 도피안사와 미륵국가 건설
철원은 궁예의 나라다. 궁예가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철원을 태봉국의 수도로 정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서기 865년 세상은 어지러워 도적이 날뛰고 신라귀족들은 권력 다툼에 날 새는 줄을 몰랐다. 철원의 먹고 살 만한 농부 1500명이 돈을 모아 불상을 지었다. 그게 바로 도피안사(到彼岸寺)의 철불인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철원 화개산 자락에 자리한 도피안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도선국사가 세운 절이다. 도선국사가 철조 불상을 암소 등에 실어 철원 수정산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옮기던 중 그만 철조 불상이 사라져버렸다. 한참 만에 불상이 발견된 자리에 지은 절이 바로 지금의 도피안사이다.
도피안사 대적광전에는 865년에 제조된 철조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 있다. 도선국사가 잃어버렸다 되찾았다는 불상이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에 만들어져 전국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도피안사 철불은 대좌까지 철로 주조된 유일한 철불로 문화적 가치가 높다. 검은 얼굴에 담담함과 씩씩함이 묻어나느 표정이 독창적이며 연화좌대의 연꽃 모양과 연잎이 꺾여 올라간 모양이 아름답다.
불상의 등에 함통 6년(경문왕 5년 865)에 지역의 향도 1500명이 결연해 조성했다는 139글자가 새겨져 있다. 앞마당의 3층 석탑 또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이는 탑은 기단부 팔각받침을 연화대좌로 대신해 마치 불상의 좌대 위에 석탑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유홍준 교수는 이를 보고 ‘석탑 조형의 아름다움보다는 무엇이든 정형을 파괴하려고 했던 그 조형 의지가 주목된다’라고 평가했다. 도전과 파괴의 힘이야말로 도피안사 철불과 석탑의 조형 목적이었다며 격찬하고 있다. 사진이 취미인 노스님이 담은 도피안사를 감상하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철불이 세워진 지 40년 만인 905년에 궁예가 철원에 미륵국가를 건설했다. 신라 후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궁에서 쫓겨나 비렁뱅이 생활을 하던 궁예는 삼한통일, 모두가 잘 사는 미륵세상 만들기를 내 걸고 세력을 확장했다. 궁예(弓裔)는 활쏘기를 잘한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뜻으로 고구려 후예임을 자처했다.
농민군을 기반으로 동쪽으로 영월, 평창, 울진, 강릉 등을 접수하고 점차 서진했다. 896년 개성의 왕건 세력이 궁예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궁예의 미륵국가 건설은 신화가 될 뻔했다. 그러나 이후 궁예의 비현실적인 사고는 패착을 불러일으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하자 도선국사는 금학산을 주산으로 하면 왕조가 300년을 갈 것이고, 고암산을 주산으로 하면 25년을 갈 것이니 이왕이면 금학산쪽으로 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도선국사의 말을 무시하고 고암산 쪽에 수도를 정했다. 그래서인지 궁예의 태봉국은 단명했고 궁예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태봉국 왕궁터는 민통선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어 직접 가볼 수 없다. 풍운아 궁예의 황성옛터는 지존에 등극했다가 퇴락한 이의 설움과 분단의 아픔이 함께 서려 있다. 이 외에도 철원과 포천 일대에는 궁예가 관한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와 그에 유래한 지명들이 전한다.
도피안사는 자궁터로 불릴 정도로 천하명당으로 꼽힌다. 야트막한 화개산 능선 안에 포근하게 안겨 있다. 틀에는 500년 넘은 느티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대적광전에서 몇 걸음 걸으면 넓은 철원평야와 그 너마 금학산이 곧게 내다보인다. 이름 그대로 속세로부터 도피하고 번뇌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도피안사를 오대산 적멸보궁, 양양 낙산사와 함께 강원도 3대 사찰로 꼽는 이도 있다.
철원의 안보관광 … 백마고지역, 노동당사, 월정리역, 소이산
2012년 개통된 백마고지역은 철원의 안보관광이 시작되는 곳이다. 백마고지역에 설치된 ‘철도 종단점’과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조형물에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기찻길 너머로 마을과 논밭 풍경은 그지 없이 평화롭지만 구철원 일대는 10분 단위로 분단과 전쟁의 아픔이 느껴지는 곳이다.
백마고지역은 1914년 개통된 용산과 원산을 오가는 경원선의 한 역이다. 백마고지역-철원역-월정리역을 거쳐 북한의 원산역에 닿는다. 그러나 해방 이후 38선 이북이 북한 땅이 되면서 백마고지역 이북의 역들은 모두 북한에 귀속됐다. 휴전 이후 철원땅이 수복된 후에도 6.25 전쟁으로 철로가 완전히 끊어져 사실상 운행이 불가능해졌다.
2012년 다시 철로가 놓이면서 50년 만에 강원도 땅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9년 4월 이후 동두천-연천 복선전철화사업으로 다시 운행이 중단된 상태다.
역사 안에는 안보관광안내센터가 있으며, DMZ 안보관광버스가 운행된다. 노동당사, 민통선 안 월정리역과 감리교터, 철원평화전망대 등을 돌아볼 수 있다.
백마고지역에서 2 km 거리에 백마고지 전적지가 있다. 중부전선의 심장부였던 백마고지는 6.25전쟁 때 중공군과 한국군 사이에 최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당시 모두 1만40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우리 측 사상자만도 3400명에 달한다.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위치한 해발 395m의 야산에 전선이 형성되면서 ‘철의 삼각지’의 중요한 지형물이 되었고 ‘395고지’로 불렸다.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치 하얀말이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이라 해서 ‘백마고지’란 이름이 붙여졌다.
길 양편에서 펄럭이는 태극기가 마치 병사들이 사열해 있는 것만 같아 숙연해진다. 무명용사의 탑과 기념관이 있다. 매년 10월 16일 민·관·군 합동 위령제가 열린다.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관전리 방향으로 5분만 걸어가면 철원군 조선노동당사 건물이 나온다. 1946년에 러시아식으로 지어진 벽돌 건물이다. 전쟁 중 폭격을 받아 벽면에는 여기저지 총탄과 포탄의 흔적이 가득하고 시멘트 조각이 떨어진 자리에 벽돌이 흉물스럽게 드러나 전쟁의 참화를 보여준다.
당시 공산당은 건물을 짓기 위해 지역주민들로부터 강제모금을 하고 강제로 주민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내부는 보안 유지를 위해 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반공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곳에 끌려와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당사 뒤편 방공호에서 유골과 실탄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노동당사 바로 맞은편에는 해발 362m의 소이산이 자리잡고 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백마고지, 철원역, 노동당사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 60년간 민간인 통행이 금지되었던 지역이나 2012년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 조성됐다. 지뢰꽃길, 생태숲길, 봉수대 오름길이 있다.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고 전쟁의 참상을 말해주는 가슴 아픈 시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등산로를 따라 설치된 철조망과 지뢰 경고판 등은 여전히 분단국가임을 일깨워준다.
민통선 안에는 월정리역과 전망대 및 교회감리터가 남아 있다. 역에는 전쟁 전 마지막 운행을 했던 기차와 폭격을 맞아 파괴된 북한의 화물열차가 그대로 방치돼 있다. 폭격으로 무너진 감리교회터와 얼음창고 등도 그대로 남아 있다. 월하리의 월정역이라 이름 자체가 아득한 슬픔을 전해주는 느낌이다.
한탄강의 비경을 담은 지질 명소 … 송대소·직탕폭포·고석정
최근 철원 여행에서 가장 핫한 것이 한탄강 유역에 형성된 지질 여행이다. 한탄강은 북한의 강원도 평강군 추가령곡에서 발원하여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철원평야를 관통하여 흐르다 연천과 포천을 지나 임진강으로 합류하며 길이가 133.4km에 달한다.
한탄강은 본디 큰 여울이라는 뜻으로 ‘한여울’로 불렸으나 이를 한자로 은하수처럼 길고 넓다고 하여 은하수 한(漢)자와 여울 탄(灘)자를 붙여 한탄강이라 부른다. 한탄강은 길이가 140km로 강 동쪽은 산악이고 서쪽은 평야다. 대못으로 깊게 후벼 판 것처럼 강 양안은 절벽이다. 오늘날처럼 양수시설이 없었더라면 물이 흘러도 농사에 이용해먹기 어려운 지형이다. 이 때문에 농민들이 가물이 들면 아쉬운 마음에 한탄강이라 불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한탄강 유역은 50만~12만년전 북한의 평강군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굳어지면서 형성된 주상절리, 베개용암, 퇴적암 등 내륙에서는 보기 어려운 화산지형이 잘 보존돼 있다. 지질학적 가치가 높은 곳으로 2020년에는 ‘세계 유네스코 지질공원’ 인증을 받았다. 철원 한탄강 구비구비에 고석정, 삼부연 폭포, 직탕폭포, 송대소 등이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철원군은 태봉대교-송대교-고석정-순담계곡으로 이어지는 한탄강 협곡을 따라 부표 다리를 놓아 한탄강 물윗길을 개장한 데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철원 한탄강 은하수교를 열었다.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상사리 간 한탄강 협곡 위에 폭 3m, 길이 180m의 현수교인 ‘철원 한탄강 은하수교’를 설치해 한탄강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두루미의 모습을 형상화한 다리 모습이 일품이며 야간 조명으로 밤하늘의 은하수 같은 풍광을 연출한다.
다리 아래 수직적벽(垂直赤壁)인 송대소(松臺沼) 구간은 철원 한탄강 협곡 중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송대소에서 고석정까지 높이 30~40m의 수직 주상절리가 이어진다. 얼음 트래킹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근접 지질 여행이 새로 난 물윗길과 은하수교로 사시사철 어느 때가 가능해졌다.
송대소에서 5분 거리에 직탕폭포(直湯瀑布)가 있다. 가로 10m 높이 3m의 직탕폭포는 다른 폭포들과 달리 가로가 긴 폭포이다. 우리나라의 ‘나이아가라 폭포’라는 별칭이 붙어 있지만 크기만 따지면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직탕폭포가 형성되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절대 실망할 수 없다. 폭포 위쪽의 오래된 다리가 철거되고 새로 예쁜 돌다리가 놓여 운치 또한 그만이다. 바람이 불면 하얀 폭포수는 어머니 흰 속치마처럼 나부낀다. 겨울에는 수염고드름이 왁자하다.
철원은 몰라도 고석정(孤石亭)은 안다고 할 정도로 고석정은 철원 최고의 명승지다.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 위로 거대한 화강암 바위 하나가 바위섬처럼 불쑥 솟아 있는 것도 신기한데 꼭대기에는 소나무들까지 자라고 있다. 물줄기를 따라 깎아지른 주상절리와 절벽이 펼쳐지고 강가에는 하얀 백사장이 펼쳐지니 그야말로 절경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신라 진평왕이 한탄강에 다녀간 뒤 고석바위 근처에 누각을 짓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누각을 고석정이라 불렀는데 애초의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지금의 정자는 1971년에 새로 지었다.
고석바위 정상에는 성인 몇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동굴이 있으며, 벽면에 ‘유명대(有名坮) 본읍금만(本邑金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 진평왕이 세운 비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높이 1m 정도의 작은 감실이 있다고 한다.
겨울이면 하얗게 암벽을 타고 내려오는 거대한 빙벽이 장관을 이룬다. 여름이면 부표다리를 설치해 조성한 물윗길을 걸으며 강가의 기암절벽과 협곡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철원군 동송읍과 갈말읍을 잇는 승일교는 1948년 철원이 북한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짓기 시작한 다리이다.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8년 한국정부가 완성했다. 승일교는 ‘남북합작다리’인 셈인데 남과 북이 건설한 다리 모양과 건축 공법이 서로 달라서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현재 승일교는 사람만 건널 수 있으며 차량 통행은 승일교와 나란히 있는 한탄대교를 이용하면 된다.
‘승일교’ 다리 이름에 대한 유래가 재미있다. 혹자는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을 따서 승일교라 했다고 하고, 또 혹자는 김일성을 이기자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당시 공사를 맡았던 공병대장 박승일이 자기 이름을 갖다 붙였다는 게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