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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연천군 임진강변으로 떠나는 역사여행 … 휴전선에 묻혀진 사연 절절한 현장들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1-16 03:57:01
  • 수정 2021-01-16 04: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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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강변 고구려성(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과 신라 마지막 ‘경순왕릉’, 고려 4왕을 모신 ‘숭의전’
경기도 연천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흐른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곳곳에 철조망과 방호벽이 보이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지뢰’ 표지판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어디서 총을 든 군인들에게 막혀 길을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일부 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다.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가 만들어낸 오늘날 연천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연천의 전부가 아니다. 연천의 참모습은 비극적인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걷어내야 비로소 보인다. 연천의 자연은 아름답고 대지는 풍요롭다. 동쪽으로는 고대산, 보개산, 화인봉, 향로봉, 종자산이 펼쳐지고 남쪽은 감악산, 마차산, 종현산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으며, 함경남도 두류산에서 발원한 임진강과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에서 발원한 한탄강이 유유히 흐르며 천혜의 비경을 만든다. 고대산 동남쪽이 철원의 금학산, 서쪽이 대광봉이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량, 적절한 일조량으로 쌀농사, 인삼농사가 발달한 연천평야는 철원과 함께 중부지방의 최대 곡창지대였다. 서해로 흘러가는 임진강과 한탄강 줄기를 따라 형성된 포구들 덕에 6.25 이전 한강 이북의 최대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가하면 연천 지역에는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다수 남아 있다. 한반도 최초의 구석기 인류인 ‘호모에렉투스’의 거주지로 밝혀진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는 기존 뫼비우스 학설(유럽인 사학자가 뫼비우스가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유럽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을 깨는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와 같은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가 발견된 프랑스 아슐성에서 유래) 구석기 유물이 3000여점 이상 출토된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지이다.
 
또한 연천은 31기의 고인돌과 다수의 돌무지 무덤이 발견되는 등 한반도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줄 단초가 되는 지역이다. 어디 그뿐이랴. 연천의 임진강 유역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치열하게 뺏고 빼앗기는 숨막히는 역사의 격전지이자 중세 고려 500년 역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개성)와 인접한 곳으로 다양한 층위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고고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더욱이 한탄강 유역은 국내 유일의 내륙형 주상절리와 협곡이 발달한 지역으로 그 희귀성과 지질학적 가치가 인정돼 2020년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됐다. 더불어 재인폭포, 아우라지베개용암, 좌상바위 등 연천의 대표적인 지질명소가 한탄강 유역의 26개 지질문화명소로 선정됐다.
 
연천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적, 고고학적, 지질학적 유산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군사도시라는 선입견 때문에 여전히 다듬어 지지 않은 원석 상태로 남아 있다. 불행일까 아니면 오히려 다행일까.
 
임진강변 고구려성 ‘호로고루’ … 과거엔 치열한 접전지, 지금은 사계가 아름다운 풍광
 
임진강 북안의 호루고루성1400여 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고대국가의 유적을 만난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남한 지역에서 몇 안 되는 고구려 유적이라 더욱 그렇다.
 
연천 임진강 유역에는 6세기 중엽 신라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한 고구려가 임진강을 따라 쌓은 10여 개의 성 가운데 호로고루성를 비롯해 은대리성, 당포성 등 3개의 성이 복원돼 있다. 이들 3개 성은 모두 임진강 북안(北岸) 현무암 절벽 위에 세워진 평지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호로고루가 위치한 연천 장남면은 파주 적성면과 맞닿아 있다. 파주 적성 전통시장을 지나 장남교만 건너면 ‘인삼의 고장 장남면’이라 적힌 기념탑이 위풍당당하게 방문객을 반긴다.
 
장남면의 또 다른 축은 고려인삼의 원산지격인 북한 황해북도(2003년 6월까지 개성특별시 소속) 장풍군과 맞닿아 있으며 토양과 기후가 같아 역시나 인삼이 유명하다. 장남면 들녘에는 그늘막이 세워진 인삼밭이 끝없이 어어지는데 이 역시 초행길인 여행자에게는 매우 이색적인 풍경으로 다가온다.
 
장남면 들녘을 가로지르면 텅빈 논밭 너머로 얕으막한 구릉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호로고루의 첫인상은 성이라기보다는 농한기에 들판에 길게 누워 쉬고 있는 소를 연상시킨다.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을 맞이해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호로고루는 강가에 위치한 조금 높게 솟은 언덕처럼 보일 뿐 어디서도 과거 치열한 접전지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호로고루란 명칭은 과거 이 지역이 임진강을 뜻하는 ‘호로하(瓠蘆河)’ ‘표하’ 로 불린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을을 의미하는 ‘홀’과 성을 뜻하는 ‘고루’가 합해져서 생겼다는 설이 있다.
 
호로고루 인근 지역은 육로로 평양과 한양을 잇는 최단 지역으로, 수심이 낮은 여울목이 지나고 있어 걸어서도 강을 건너는 것이 가능했다. 때문에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물자나 대규모 병사들의 이동이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한 삼국의 각축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이 지역에서 삼국이 자주 전투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2020년 9월의 호루고루성 앞 해바라기 향연이 지역은 원래는 백제 땅이었으나 4세기 중엽 이후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군에 밀려 임진강 유역까지 후퇴한 고구려는 임진강을 따라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보루, 덕진산성 등 10여 개의 성을 쌓는 등 최남단 방어선을 구축하고 120여 년간 신라와 대치했다.
 
나당 연합군에 평양성이 함락된 후 고구려 부활군은 호로고루에 집결해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결국 당나라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고구려 병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망갔다. 더러는 신라군에 투항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구려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산성과 달리 평지성인 호로고루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동쪽을 제외한 3면은 15m 높이의 주상절리와 절벽이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됐고, 동쪽 평지에만 폭 40m, 높이 10 m, 길이 90m 성벽을 쌓았다. 암갈색 현무암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높이 10m의 성벽은 위로 가면서 좁아지면서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양쪽에는 낮게 성을 한 겹 더 쌓은 옹벽이 설치돼 있다.

계단을 밟고 성벽 위에 올라서서 주변 지형을 둘러보면 왜 호로고루가 천혜의 자연요새인지 단박에 이해가 된다. 특히 서쪽인 고랑포구쪽에서 조망한 호로고루는 그야말로 아찔한 임진강 절벽 위에 세워진 철옹성이다.
 
호로고루는 6.25 전쟁으로 북한군이 포를 설치하는 와중에 방치된 성벽이 드러나면서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1991년 군사보호구역 내 문화유산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고구려 유적으로 확인됐다. 이후 2000년부터 총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다양한 문양의 붉은색 고구려 기와를 비롯해 토기와 토제 및 동물뼈와 탄화곡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호로고루에서는 남한 지역의 고구려 유적들 중 가장 많은 기와가 나와 ‘고구려기와의 보고’로 불린다. 이밖에 주둥이가 뾰족한 호랑이 모양의 휴대용 남성 소변기인 호자(虎子)와 상고(祥鼓)라고 적힌 악기의 일부분으로 보이는 토기조각, 고구려인 모자 형태의 토기 등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됐다. 호로고루 입구에 설치된 홍보관에 들러 호로고루의 발굴 과정과 출토유물에 대한 설명을 참조하면 관람에 도움이 된다.
 
호로고루의 사계는 변화무쌍하다. 봄에는 청록색의 청보리가 일렁이고, 9월이면 수 만송이의 해바라기가 일렁이는 ‘통일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새하얀 눈에 뒤덮힌 겨울 풍경과 호로고루 위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깜깜한 밤 호로고루성 위로 궤적을 그리며 지나는 별들의 향연은 기회가 된다면 꼭 감상해야 할 것이다. 문득 텅 빈 대지 위에서 먼 과거의 시간과 마주하고 싶은 날 이곳 호로고루로 달려오면 된다.
 
호로고루와 똑닮은 당포성 … ‘폐허미’와 한탄강 수직 주상절리의 공존
 

호로고루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진 임진강 남안(南岸)에 호로고루와 똑닮은 고구려 당포성이 있다. 당포나루로 흘러 들어오는 당개샛강과 임진강 본류 사이에 형성된 절벽 위에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평면 대지에 세워진 당포성은 입지 조건과 평면 형태, 축성 방법 등이 호로고루와 쌍둥이처럼 닮은 전형적인 고구려성이다. 
당포성당포성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진입로인 삼화대교 위이다. 삼화대교에 서면 임진강 너머로 주상절리 절벽 위에 서 있는 당포성의 한 눈에 들어온다. 성 아래 길게 펼쳐지는 주상절리와 황톳빛 임진강물, 우거진 수풀에서 전운이 감도는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호로고루보다 찾는 이가 적은 당포성은 폐허의 적막감이 감돈다. 성 위에 홀로 선 휘어진 나무 한 그루가 옛 성터의 쓸쓸함을 더하고, 해질녘 나무 위로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포성은 복원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와 훼손이 심하고 붕괴의 위험까지 있어 흙을 덮고 그 위에 잔디를 식재해 성을 보호하고 있다.
 
동쪽 귀퉁이에 새로 쌓은 동벽을 통해 성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동쪽 성벽의 길이는 200m, 전체 둘레는 450m, 높이 6m 정도로 추정된다. 성벽은 안쪽에 흙을 먼저 다져 쌓은 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을 다듬어서 얹혔다. 우리가 보는 동벽은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으로 자로 맞춘 듯 돌의 크기도 일정하고 정돈돼 있다.
 
당포성은 2020년 한탄강 유역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인증과 함께 지정된 한탄강 지질문화명소 26곳 중 한 곳이다. 당포성 및 임진강변 아래의 주상절리는 수직과 방사상으로 발달했고, 하천의 침식으로 생긴 하식동굴이 많다. 또한 이곳은 화산의 진원지에서 용암이 가장 멀리까지 흘러온 지역으로 현무암층의 두께가 상류에 비해 얇아진 모습을 보인다.
 
전곡읍 연천군 보건소 뒤의 ‘은대리성’ … 고구려 남진 후방 거점기지 추정
 
은대리성은 하천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쌓은 성이다. 이곳은 옛부터 서울과 원산을 잇는 교통로로 활용되는 등 육로와 수로 어느 쪽이든 주변 지역과의 교통이 편리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평안해 보이는 은대리성전곡읍의 연천군보건소 뒤편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서면 성 좌측으로 깎아지른 임진강 절벽 북안 안쪽으로 평지의 은대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성이라기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놀이터 같다.
 
은대리성은 성벽 전면에 펼쳐지는 성곽의 규모가 한눈에 봐도 앞서 두 성과 비교해 가장 크다. 성의 둘레가 약 1km에 달하며 외성과 내성의 이중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탄강과 차탄천이 만나면서 형성된 여울목의 요충지를 통제하는 방어 진지와 고구려 남진 시기 후방의 거점 기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에서 배수 처리를 위한 구(溝) 시설이 확인됐고, 고구려 시대의 토기들이 다량 출토됐었다. 발굴된 토기로 편년(編年)하면 5세기 이후 3개성 가운데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계 유물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후 폐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변 신라 유적지 … 망국의 ‘경순왕릉’ … ‘이역만리’ 구천을 헤매
 

경주로부터 이역만리인 연천에 조성된 신라 마지막왕 경순왕릉호로고루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고랑포 역사공원 쪽으로 10여분 정도 달리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이 있다. 연천의 장단면 끝자락 고량포구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구릉에 조성된 경순왕릉 주변에는 곳곳에 ‘지뢰조심’ 푯말이 붙어 있고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어 긴장감이 느껴진다.
 
견훤에게 시해당한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935년 10월 두 아들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태조에게 국서를 보내 투항했다.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고 경주의 찬란한 문화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이에 반대한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둘째 아들은 화엄사로 들어가 중이 됐다.
 
경순왕은 개경에 머물며 태조의 첫째 딸과 결혼해 정승공으로 봉해졌으며, 경주로 이름을 바꾼 신라를 식읍으로 받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됐다. 978년 경순왕이 개성에서 생을 마감하자 유족들과 유민들은 그의 능을 경주에 조성하기 위해 운구하하자 유민들의 반란을 우려한 고려는 ‘왕족의 능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개경에서 80리 떨어진 장단면 고랑포리에 묻히게 됐다. 망국의 왕은 죽어서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구천을 헤매고 있다.
 
경순왕릉은 임진왜란 후 방치됐다가 영조 23년에 재정비됐다. 한국전쟁 후에 다시 소실될 뻔했으나 한 병사에 의해 수풀 속에 쓰러져 있던 묘비가 발견돼 다시 정비됐다. 경순왕릉에는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봉분 앞에 2기의 석물도 세워져 있다. 경순왕과 관련해 어진 5점이 전하며, 강원도 원주에 영정을 모신 경천묘, 충남 보령에 위패를 모신 경모전이 있다.
 
고려 태조 등 네 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
 
연천군 미산면에는 고려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숭의전(崇義殿)이 있다. 고래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터에 1397년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게 숭의전의 시초가 됐다.
 
태조 왕건 고려 4왕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깎아지른 임진강 절벽 위에 세워진 숭의전은 앞쪽으로 임진강 물결이 유유히 흐르고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 된 느티나무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라고 있다. 조선 태조는 1397년(태조 6년) 역성혁명을 통해 건립된 조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당을 건립해 고려 태조의 위패를 봉안했고, 1399년 태조의 맏아들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게 했다.
 
세종 7년에는 “나라의 종묘에도 다만 5실을 제사하는데, 전조(고려 왕조)의 사당은 8위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위만 봉향하기 시작했다. 1452년(조선 문종 2년)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를 찾아 부사로 삼아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고려 왕 4위와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배향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개성 왕씨 종친회, 숭의전 보존회 주관으로 봄, 가을 두 차례 봉행되고 있다.
 
숭의전은 조선시대 네다섯 차례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반복하다가 6.25전쟁으로 전소돼 1971년 재건됐다. 고려 4왕과 16공신의 위패가 모셔진 숭의전 및 배신청(陪臣廳)을 비롯해 이안청, 전사청, 앙암재 등 5동의 건물과 내신문, 외신문, 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이 있다.
 
숭의전에서 청정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변에 초대 숭의전사를 지내던 왕순례의 묘가 있다. 오랫동안 실전됐다가 1988년 도로 확장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작은 봉분과 최근에 세워진 망주석 한 쌍이 놓여 있으며, 묘표 앞면과 뒷면에 쓰여진 문자를 통해 이 묘가 1485년에 조성된 왕순례의 묘임이 밝혀졌다.
 
왕순례는 고려 제8대 현종의 먼 후손으로 본명은 왕우지이다. 그는 고려 멸망 이후 충남 공주에 숨어 살다가 숭의전 제사를 지낼 후손을 찾았을 때 관에 알려졌으며, 왕명에 따라 ‘순례’라는 이름과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고 숭의전사로 임명됐다.
 
이밖에 고려의 충신으로 알려진 목은(牧隱) 이색(李穡) 영당(影堂, 사당)이 왕징면 노동리에 있고, 조선 초 문신인 운성부원군 박종우와 태종의 딸 정혜옹주의 합장묘가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에 있다. 청산면 궁평리에는 인조와 귀인 조씨 사이의 둘째 아들인 낙선군 이숙(李潚) 묘, 연천읍 상리에는 원나라에 공녀로 갔다가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 묘터가 남아 있다.
 
이밖에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흘러내려 협곡을 이룬 한탄강변의 주상절리에 낙차가 제법 있는 연천읍 고문리의 재인폭포, 일제 강점기에 만든 터널에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선 겨울에 고드름이 거꾸로 선다는 연서면 신탄리의 역고드름 터널이 유명하다. 연천 가장 북쪽의 고대산에서는 넓은 정상에서 철원 평야지대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볼 수 있다. 신탄리역에서 출발하는 게 일반적인 등산 코스다. 연천군 전곡읍의 고구려 시대 신답리 고분도 짬이 나면 가볼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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