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 정복과 종자개량 등에 ‘유전자 가위’ 기술이 혁신을 가져올 것이란 전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올해 노벨화학상은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CRISPR을 발견하고 개발한 두 여성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7일(현지시각) 유전자를 교정하는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A. Doudna·56)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 캠퍼스 교수와 프랑스 출신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Emmanuelle Charpentier·52) 독일 막스플랑크 병원체 연구소장을 2020년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두 사람은 1911년 마리 퀴리 이후 노벨 화학상을 받은 6~7번째 여성 과학자가 됐다. 노벨 화학상에서 여성들이 공동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람은 2012년 세계적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DNA에서 원하는 부위를 자유자재로 잘라낼 수 있는 ‘크리스퍼 카스9 유전자 가위’ 기술을 발표했다.
크리스퍼유전자가위(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CRISPR) scissors)는 유전자의 특정 부위를 절단해 유전체 교정을 가능하게 하는 리보핵산(RNA)기반 인공 제한효소(절단효소)이다. DNA를 자르는 제한효소(단백질)와 가이드 역할을 하는 크리스퍼RNA(crRNA)를 붙여서 제작한다. 길잡이 역할을 하는 crRNA가 DNA 염기서열 중 목표한 위치에 달라붙으면 제한효소가 해당 DNA를 잘라낸다.
유전자 가위가 잘라낸 부위를 정상 유전자로 대체하면 유전 질환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또는 작물에 병충해의 공격을 방어할 유전자를 심음으로써 농업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주목받았다.
이 기술은 박테리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박테리아는 자신에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 일부를 표식으로 갖고 있다가 나중에 같은 유전자를 가진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바로 제한효소(단백질)로 절단한다. CRISPR는 박테리아(세균)의 유전체(게놈)에서 특이하게 발견되는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짧은 회문구조의 반복서열’이다.
박테리아가 천적인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 일부를 Cas1(CRIPSR-associated protein 1)과 Cas2 단백질이 협력해 자르고 다듬어(cleavage and trimming) CRISPR 어레이(Array)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게 CRISPR이다. 이렇게 박테리아 염기서열 속에 박혀 있는 바이러스 유래 DNA 일부들은 반복적인 염기서열(repetitive sequences, direct repeats)을 띠며 이들의 저장공간이 스페이서(Spacer)다. 박테리아는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메모리에 넣어뒀다가 바이러스가 재차 침입하면 이를 제압한다.
박테리아를 연구한 샤르팡티에 박사는 국제학회에서 세계적인 단백질 분석가인 다우드나 교수를 만나 손상된 유전자를 교정하는 기술로 개발하기로 의기투합해 이같은 역사적 성과를 일궜다.
이번 수상자들의 논문이 나오고 이듬해 MIT 장펑(Feng Zhang, 張鋒) 교수와 하버드대 조지 처지(George Church) 교수, 서울대 김진수 교수가 각각 인체 세포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적용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후 실제 질병 치료에서 여러 성과가 나왔다. 지난해 중국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을 원천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같은 방법으로 혈액암을 치료했다.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 수석 연구위원(전 서울대 교수)은 “다른 유전자교정 기술은 숙련된 전문가만 쓸 수 있었지만 크리스퍼 카스9 유전자 가위는 누구나 금방 쓸 수 있고 속도도 훨씬 빠르다”며 “생명과학 혁명을 가져올 기술로, 예전부터 노벨상 수상이 점쳐졌다”고 말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농업 분야에서도 활용이 늘고 있다. 기존 유전자 변형 농작물(GMO)처럼 다른 생명체의 유전자를 집어넣지 않고 농작물 자체의 유전자를 교정해 병충해와 가뭄에 견디도록 만들 수 있어서다. 다른 소를 다치게 하는 젖소의 뿔을 없애고, 근육량을 늘린 수퍼 육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1962년 제임스 듀이 왓슨(James Dewey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이 나선형 DNA 구조를 밝혀 노벨생리의학상을 탄 이후 많은 과학자가 유전자 편집과 관련해 노벨상을 탔다.
1978년에는 분리 정제된 제한효소가 DNA를 잘라내는 것을 보여준 베르너 아르버(Werner Arber, 1929년생 스위스), 다니엘 네이선스(Daniel Nathans, 1928년생 미국), 해밀턴 오서널 스미스(Hamilton Othanel Smith, 1931년생 미국) 등이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1980년에는 폴 버그(Paul Berg (1926년생 미국)가 인류 최초로 유전자재조합 기술을 완성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대장균의 젖당 대사와 관련된 세 가지 유전자를 SV40 동물바이러스의 유전체에 삽입시킨 뒤 숙주세포로 넣는 방법을 개발했다.
1993년 엑손(유의미한 DNA 정보서열)과 인트론(의미없는 DNA 정보, 전체의 90% 이상)의 개념을 밝혀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MIT의 필립 샤프(Philip Allen Sharp) 교수는 최근 “노벨상 역사를 비춰보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원리 발견뿐 아니라 인체 세포 적용 연구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는 장펑 또는 김진수 교수에게도 수상의 기회가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