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월 17일은 ‘세계 혈우인의 날(World Hemophilia Day)’이다. 피가 멈추지 않는 무서운 병으로 알려진 혈우병은 혈액응고인자의 선천적 결핍으로 발생하는 출혈성 질환이다. 혈우병 환자는 정상인보다 출혈이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지만 더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어 신체 내부손상의 위험이 있다. X염색체에 존재하는 제8응고인자와 제9응고인자의 결핍이 가장 흔하며 전자는 A형 혈우병, 후자는 B형 혈우병으로 불린다. A형 혈우병은 전체 환자의 약 80~85%를 차지하고 있다. 2018년 기준 국내 혈우병 환자는 약 2148명으로 이 중 A형 혈우병이 1721명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혈우병B는 427명으로 상대적으로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혈장유래제제부터 유전자재조합제제까지 … 출혈 예방, 관절 보존
혈우병 치료제는 혈장에서 필요한 혈액응고인자를 뽑아 만든 혈장유래제제와 생명공학 기술을 활용한 유전자재조합 제제가 있다. 혈장유래제제는 한 사람을 치료하는 데 3000명 정도의 일반인 혈장에서 필요한 응고인자를 뽑아내 만든다. 혈장유래 방식의 2세대 치료제인 GC녹십자의 ‘그린모노주’(성분명 C단클론항체정제사람혈액응고제VIII)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혈장유래제제는 안정적 공급이 어렵고, 감염 우려가 있어 문제가 됐다. 혈장유래제제를 공급받은 혈우병 환자가 후천성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 C형간염 바이러스(Hepatitis C virus, HCV)에 감염된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감염 우려가 적은 유전자재조합 제제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유전자재조합 제제는 혈액응고인자 유전자를 다른 세포에 넣어 응고인자 단백질을 만들기 때문에 혈액이 사용되지 않는다. 때문에 혈장분획 제제보다 감염 위험이 낮다. 대신 항체 발생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족한 응고인자 보충해 치료 … 보충요법·유지요법으로 나뉘어
혈장유래제제부터 유전자재조합제제까지 투여할 수 있게 되면서 혈우병 환자 치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응고인자 투여로 출혈을 예방하고, 혈우병의 가장 흔한 합병증인 관절염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관절을 보존할 수 있게 됐으며, 치료 방식도 ‘출혈 시 응고인자 투여’에서 ‘응고인자의 유지요법’으로 전환됐다.
혈우병은 주로 부족한 응고인자를 보충해 치료한다. 혈액응고인자의 결핍 정도에 따라 경증·중등도·중증으로 나뉘며 중등도 이상인 경우 주기적으로 혈액응고인자를 공급받아야 한다. 치료는 크게 출혈이 있을 때마다 응고인자를 투여하는 보충요법(replacement therapy, on-demand)과 정해진 계획대로 보충해주는 유지요법(maintenance therapy)으로 나뉜다. 보충요법은 출혈 부위와 정도에 따라, 응고인자에의 접근성에 따라 권장 투여량이 다르다.
유지요법은 주기적으로 응고인자를 투여해 인자활성도의 기저치를 1% 이상(혈우병성 관절병증이 있는 경우 3%)으로 유지해 자연출혈을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중증 혈우병 환자를 인위적으로 중등도 환자로 만들어 출혈 빈도를 낮출 수 있다. 자연출혈과 관절병증 예방이 목적이라서 ‘예방요법(prophylaxis)’으로 부르기도 한다.
유지요법은 중증 출혈을 감소시키고,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현재 혈우병 치료의 큰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다. A형 혈우병 환자에 대한 유지요법은 1958년에, 혈우병 B에 대해서는 1972년에 스웨덴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혈우연맹(WFH)은 1995년에 유지요법을 중증 혈우병 환자를 위한 합리적 치료법으로 권장했다.
김효철 내과의원 원장(아주대 명예교수)은 “혈우병은 출혈이 날 때 빠르게 응고인자를 투여하는 게 중요하다”며 “큰 수술 전에는 응고인자 활성 수준을 지혈에 필요한 60~80%, 수술 후에는 40~60%로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혈우병 치료제는 대체 치료제가 많지 않고 환자 수가 적은 희귀의약품으로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다. 치료제를 주기적으로 평생 투여해야 하므로 약효 지속시간을 늘려 약물 투여 횟수를 줄이고, 편의성을 높이는 게 치료제 개발의 핵심으로 꼽힌다. 높은 비용, 짧은 반감기, 낮은 활성도 등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치료제 개발에 많은 제약사가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사용되는 혈우병 치료제를 자세히 알아본다.
A형 롱액팅 치료제, 엘록테이트·애디노베이트
국내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A형 혈우병치료제는 샤이어파마코리아 ‘애드베이트주’(ADVATE 성분명 옥타코그알파 Octacog-α)다. GC녹십자 ‘그린진에프주’(베록토코그알파 beroctocog-α)와 함께 국내 혈우병 치료제 시장의 75%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 3세대 유전자재조합 제제는 주 2~3회 정맥주사 형태로 주입한다. 한국화이자제약의 ‘진타솔로퓨즈프리필드주’(모록토코그알파 moroctocog-α)도 같은 3세대 A형 치료제에 속한다. 그린진에프는 지난해 5월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National Medical Products Administration, NMPA)에 혈우병 치료제 ‘그린진에프주’의 품목허가 신청을 마친 상태다.
응고인자 유지요법은 반감기가 짧아 주기적으로 계속 투여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른다. 환자순응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으로 개발된 게 반감기를 연장한 롱액팅(long-acting) 제제다. 다양한 기전의 약물이 개발돼 이미 사용 중이거나 출시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 약물은 융합과 페길화(PEGylation) 방법을 사용해 기존 응고인자제제에 비해 약물 역동학적으로 향상된 결과를 나타낸다. 페길화는 폴리에틸렌글리콜(PEG)를 결합시켜 의약품의 반감기를 늘리는 기술을 뜻한다. 반감기 연장 8번 응고인자 제제(A형)의 경우 기존 약제 대비 1.4~1.6배로 반감기 연장 결과를 보이는 반면 반감기 연장 9번 응고인자 제제(B형)는 4~6배까지 연장되는 효과를 나타낸다.
흔히 4세대 치료제로 불리는 혈우병 A 반감기 연장 제제로는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의 ‘엘록테이트주’(성분명 유전자재조합 제8혈액응고인자 Fc 융합단백질), 샤이어파마코리아의 ‘애디노베이트주’(Adynovate성분명 유전자재조합 제8혈액응고인자, 루리옥토코그알파페골, ruriOctocog-α-PEGol)가 국내에 허가됐다.
엘록테이트는 A형 환자의 출혈 억제·예방, 수술 전후 관리, 일상적 예방요법에 사용된다. 제8응고인자와 항체 불변 부위(Fc) 단백질을 융합함으로써 체내 약효 지속시간을 늘린 첫 장기지속형 혈우병A 치료제로 3~5일에 1회 투여한다. 임상연구에서 일상적 예방요법과 급성출혈 치료 관련 효과·안전성·내약성이 입증됐다. 일상적 예방요법으로 3~5일에 한 번씩 환자 체중(㎏) 당 50단위(IU)를 투여하며, 환자 반응에 따라 용량을 체중 당 25~65단위까지 조절할 수 있다. 2017년 8월 국내 시판 허가를 받은 제품이다.
애디노베이트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A형 치료제인 애드베이트와 동일한 제8혈액응고인자 전장 단백질을 사용해 만든다. 혈액응고인자 성분에 고분자화합물인 폴리에틸렌글리콜(PEG, polyethylene glycol)을 붙이는 페길화(PEGylation) 기술이 적용돼 애드베이트 대비 반감기가 1.4~1.5배 길다. 제8인자 전장 단백질은 간에서 저밀도지단백 수용체 관련 단백질1(low density lipoprotein receptor-related protein 1, LRP-1) 수용체와 결합, 분해·제거된다. 이 때문에 기존 치료제는 일상 예방요법으로 주 3~4회 정맥 투여해야 한다. 애디노베이트는 페길화 기술 덕분에 제8인자와 LRP-1수용체 간 결합을 막아 치료제의 효과 지속기간을 늘리고 일상 예방요법 투약 횟수를 주 2회로 줄임으로써 환자 투약 편의성을 높였다.
B형 롱액팅 치료제 알프로릭스·아이델비온·릭수비스
B형 치료제 시장은 한국화이자제약 ‘베네픽스주’(성분명 노나코그-알파 nonacog-α)가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일본·유럽·호주 등 주요 국가에서도 가장 많이 처방돼 온 치료제다. 베네픽스는 세계 최초의 유전자재조합 B형 치료제로 전 제조과정에 인간∙동물 유래 물질을 배제해 바이러스 유입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또 다단계 바이러스 안전성 프로그램을 통해 HIV, 간염바이러스, 파보바이러스(parvovirus) 등 혈액을 매개로 감염될 수 있는 병원균의 유입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B형 반감기 연장제제로는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의 ‘알프로릭스주’(성분명 에프트레노나코그-알파 Eftrenonacog-α)가 국내 허가를 받았다. 알프로릭스는 지난 3월 출시된 신약으로 국내 최초 반감기 연장 B형 치료제다. B형 혈우병 환자에서 △출혈의 억제 및 예방 △수술 전후 관리 (외과적 수술 시 출혈 억제 및 예방) △출혈의 빈도 감소 및 예방을 위한 일상적 예방요법을 위한 치료제로 사용된다.
알프로릭스는 ‘Fc 융합단백 기술’로 혈액응고인자 9인자의 반감기를 연장한다. 주 1회 투여(50IU/kg) 혹은 10~14일에 1회(100IU/kg) 투여로 일상적 예방요법이 가능하다. 연간 약 100회에 달하는 기존치료제의 정맥주사 횟수를 절반 이상 줄였다.
호주의 글로벌제약사 CSL의 자회사인 CSL베링의 ‘아이델비온주’(성분명 알부트리페노나코그알파 albutrepenonacog-α)는 소아 및 성인 B형 혈우병 치료제로 승인받았다. 허가받은 적응증은 B형 혈우병의 △출혈의 억제 및 일상적인 예방 △수술 전후 관리(외과적 수술 시 출혈억제 및 예방)이다. 면역관용요법으로는 쓸 수 없다. 일상적 예방요법의 경우 주 1회 35~50 IU/kg 투여를 권장하며, 주 1회 요법으로 잘 조절되는 12세 이상의 소아 및 성인 환자는 10일 또는 14일 간격으로 75 IU/kg을 투여할 수 있다. 3~4일 간격으로 투여해 출혈을 예방하는 베네픽스보다 반감기가 길다.
샤이어파마코리아의 ‘릭수비스주’(노나코그-감마 Nonacog gamma)는 유전자재조합 IX 인자 제제다. 이 약은 B형 환자의 출혈 억제, 출혈빈도 감소를 위한 일상적 예방요법, 수술 전후 관리요법을 적응증으로 갖고 있다. B형의 일상적 예방요법으로 허가받은 약은 릭수비스가 처음이다.
A형 최초 피하주사 ‘헴리브라’ … 항트롬빈억제제 ‘피투시란’
부족한 응고인자를 혈관주사를 통해 보충하는 기존의 치료법은 체내에서 소비되는 반감기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정맥 투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러한 한계 극복을 위해 응고인자 제제는 아니지만 지혈 기능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기전의 약물이 개발됐다. 이 약물은 응고인자와 유사하게 작용하지만 잘 분해되지 않거나, 항응고 단백을 방해하거나, 응고촉진인자의 결핍을 보상하는 기전으로 작용한다. 피하주사가 가능하며 응고인자에 대한 자가항체 발생 위험이 없고, 자가항체를 가진 혈우병 환자에서도 사용 가능한 게 장점이다.
JW중외제약 ‘헴리브라피하주사’(성분명 에미시주맙 emicizumab)가 대표적이다. 일본 쥬가이제약(스위스 로슈그룹의 자회사)이 개발한 이 약은 A형 혈우병의 일상적 예방요법제다. 지난해 초 항체를 보유한 A형 혈우병에 대한 예방요법제로 허가받았으며 올해 3월 비항체 환자의 일상적 예방요법까지 치료 범위를 넓히게 됐다.
헴리브라는 유전자재조합의약품으로 제8인자의 혈액응고 작용기전을 모방했다. 활성화된 제9번 응고인자(activated factor IX, FIXa)와 10번 응고인자 (factor X, FX)에 동시에 결합하는 이중특이항체로서 9번 인자와 10번 인자가 8번 인자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활성화되도록 가교역할을 한다. 정맥주사가 아닌 피하주사 제형으로 A형 혈우병치료제가 품목허가를 받은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출시된 치료제는 모두 주 2~3회 정맥주사를 해야 했으나 헴리브라는 주 1회 피하주사로 예방효과가 지속되는 등 환자의 편의성을 개선하면서 지속효과도 향상시켰다. 특히 혈액 내 부족한 제8인자와 비슷한 물질(유사단백질)을 생성해 주입하는 기존 치료제에 대한 내성을 가진 환자에게도 효과를 보였다.
사노피가 보유한 ‘피투시란(Fitusiran)’은 안티트롬빈(antithrombin) 표적 RNAi 치료제로 혈우병 A형, B형, 항체 유무에 상관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항응고인자 중 하나인 안티트롬빈을 억제하는 기전으로 헴리브라보다 초기 단계에서 작용해 혈전을 만들어낸다. 4주마다 1회 피하에 직접 투여한다. 국내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다.
아직 개발 중인 치료제도 있다. GC녹십자의 신약후보물질 ‘MG1113’은 응고인자를 활성화시키는 항체로 만들어졌다. 항체치료제 특성상 기존 약에 내성이 생긴 환자도 사용이 가능하며 A·B형 혈우병 환자에 모두 사용할 수 있다. 기존 약보다 반감기가 긴 고농도 제형으로 피하주사가 가능하다.
바이오마린·로슈·화이자 등 유전자 치료제 임상 진행 중
유전자치료제는 잘못된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바꾸거나 치료 효과가 있는 유전자를 환부에 투입해 증상을 고치는 차세대 바이오 의약품을 말한다. 혈우병 치료에서는 신체가 결핍된 응고인자를 생성하도록 유도한다. 유전자치료는 혈우병과 같은 단일 유전인자 질환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바이오마린(BioMarin)의 혈우병 A형 유전자치료제 ‘발록스(Valrox, 성분명 valoctocogene roxaparvovec, 코드명 BMN-270)’는 지난 2월 21일 미국 식품의약국(FDA) 우선심사(Priority Review) 대상 의약품으로 지정돼 6개월 후인 오는 8월 21일까지 허가 여부가 결정난다.
로슈와 스파크테라퓨틱스(Spark Therapeutics)도 혈우병 B형 치료제 후보물질 ‘SPK 9001’와 A형 치료제 후보물질 ‘SPK 8011’의 임상 3상을 진행중이다. SPK-9001은 제9혈액 응고인자를 생성하는 유전자재조합 아데노 관련 바이러스(AAV) 캡시드로 2016년 FDA로부터 혁신치료제로 지정된 바 있다.
네덜란드 생명공학기업 유니큐어(uniQure)는 혈우병 B형 유전자 치료제 ‘AMT-061’(etranacogene dezaparvovec) 임상을 진행 중이다. 이 신약후보물질은 9번응고인자를 무해한 AAV5 바이러스 벡터에 적용한 단일 주사로 구성돼 있으며 이는 Padua 변이체(FIX-Padua)라 불리우는 FIX 유전자 버전을 사용해 9인자의 활성화를 9배까지 증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이자와 상가모테라퓨틱스(Sangamo Therapeutics)의 A형 유전자치료제 ‘SB-525’도 임상 2상까지 좋은 결과를 얻어 3상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