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제약사의 노조 설립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노조 가입 직원들이 회사의 독단적 결정에 맞서 근로자 권리를 찾기 위한 치열한 싸움에 나서고 있다. 고액연봉·직원복지·워라밸(일·생활 밸런스) 보장 등 국내 기업과 차별화 된 근무환경으로 ‘신의 직장’이라 불리던 다국적제약사의 지위도 옛말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다국적 노조가 가입한 상급 노조단체는 거의 대부분 한국노총이다. 한노총 산별노조인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에 소속된 한국민주제약노동조합으로 활동 중이다. 2012년 12월 설립된 이 노조엔 현재까지 △갈더마코리아 △한국머크(독일계) △박스터코리아 △사노피파스퇴르 △쥴릭파마솔루션즈서비스코리아 △코오롱제약 △프레지니우스카비코리아 △프레제니우스메디칼케어코리아 △한국노바티스 △한국다케다제약 △한국아스트라제네카 △한국BMS제약 △한국룬드벡 △한국먼디파마 △한국아스텔라스 △한국애브비 △한국엘러간 △한국MSD △한국쥴릭파마서비스코리아 △한국페링제약 등 총 20개사가 가입해 지부로서 활동 중이다.
민주제약노조 가입사를 제외하고 전국화학노동조합연맹 산하에 직접 가입한 제약사는 한국베링거인겔하임, 동아제약, 동아에스티, JW중외제약, JW생명과학, 동구바이오 등 52개사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화섬노련)에 가입한 제약사는 에스티팜(동아쏘시오홀딩스 원료의약품 계열사), 한국애보트, 한독, 한국조에티스(화이자 동물의약품 법인), 조아제약, 한올바이오파마 등이다. 대체로 온건한 국내사 생산직 노조와 다국적사의 영업직 위주 노조는 한국노총에 가입돼 있다. 민노총 산하 화섬노련에 가입한 노조는 생산직 주다.
국내 제약사 노조는 거의 대부분 생산직 위주였고, 영업직은 사측의 끈질긴 저지 노력으로 노조 설립 과정에서 와해되기 일쑤였으나 다국적사가 물꼬를 트자 지난해 4월 코오롱제약이 국내 제약업체로는 최초로 영업직 노조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 5년새 다국적제약사 노조가 19개나 민노총에 가입한 것은 사측의 일방적 사업부 정리 또는 개편 발표와 그에 따른 고용보장 없는 희망퇴직 시행 등에 대한 반발이 커져서다. 불안정한 고용환경에 대한 우려로 직원들이 선제적 대응에 나선 것이다.
한 노조원은 “언제 일터가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일정 수준 금전적 보상을 받고 퇴직하는 길밖에 없다”며 “다수의 다국적기업이 이같은 제도를 활용해 사실상 ‘손쉬운 해고’를 자행하고 있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가장 노사갈등이 고조된 곳은 한국머크로 노조 측은 사측의 일방적인 복제약사업부 정리와 희망퇴직(Early Retirement Program, ERP) 진행 계획의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노조는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글로벌 머크 본사를 설득해 이같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국머크는 지난 9월 23일 당뇨병약인 ‘글루코파지’, 고혈압·협심증 치료제인 ‘콩코르’ 등 2개 의약품 판권을 국내제약사에 넘기고 해당 부서 직원을 대상으로 ERP를 진행하겠다고 일방 통보했다. 이에 직원들의 경영진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최고조에 이르게 됐다는 게 노조 측 설명이다. 노조는 사측의 일방적인 사업개편 통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서 사전 타협과 강제적 ERP 대신 고용 승계 등 안정적인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조영석 민주제약노조 한국머크지부장은 “ERP 대상 사업부 소속인원 37명 중 회사에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야 한다”며 “회사를 떠나더라도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반강제적으로 퇴사하는 것은 반드시 막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국머크 관계자는 “회사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일반의약품 사업의 아웃소싱(외주)을 감행하게 됐다”며 “이번 결정으로 영향받는 직원을 위한 지원방안을 모색해 해당 팀을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용 승계는 글로벌 제약사 간 합병 과정에서 자회사격인 국내 법인 간에도 종종 이뤄졌다. 2006년 화이자가 존슨앤존슨에 일반의약품 사업부분을 매각할 당시 한국존슨앤드존슨은 한국화이자 관련 인력을 모두 흡수했다. 2013년 아스트라제네카가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의 당뇨병사업부를 인수하면서 한국아스트라제네카 관련 인력이 한국BMS로 옮긴 사례도 있다.
지난 7월 민주제약노조에 가장 최근 가입한 한국룬드벡은 불안정한 고용규칙 제정을 이유로 노조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대기발령권 신설 등 임직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취업규칙 변경 과정에서 관련 조항을 누락한 채 직원들로부터 동의 서명을 받는 등 문제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부분 직원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지난해 11월 가입한 한국MSD 노조는 2016년 6월부터 한국MSD를 이끌고 있는 아비 벤쇼산 사장이 부당한 근로계약을 지속적으로 체결하고 연차수당을 미지급한 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 회사는 영업사원을 2년 시한의 계약직으로만 뽑아놓고 정규직으로 전환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MSD 노조 관계자는 “계약직 고용 관행으로 영업사원 수가 매년 줄고 있는 실정”이라며 “인원이 줄어든 만큼 1인당 담당 지역이 넓어진 탓에 업무가 과중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초엔 주말근무에 대한 보상기준도 3~6시간 근무, 6시간 이상 근무한 경우로 나눠 차등 지급하던 것을 노조가 설립될 조짐이 보이자 사측은 시급의 1.5배와 근무시간을 적용해 일률 지급하는 것으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 김명연 자유한국당 의원이 이같은 부당한 근로계약 체결을 질타하기 위해 아비 벤쇼산 한국MSD 대표 등 다국적제약사 대표단을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최종 채택되지 않았다.
다국적제약사가 노조를 설립하면서 불공정 관행 개선을 위한 발걸음을 시작한 가운데 노조 설립을 통해 노사 협약을 이끌어 낸 사례도 있다. 민주제약노조에 가입한 유일한 국내 제약사인 지난해 4월 노조 결성 10개월 만에 특별한 충돌없이 첫 임금 및 단체합의안을 확정했다.
코오롱제약 노사 합의안에는 △영업사원 일비 5만원으로 인상 △징계위원회에 지부장 참여 △장기근속자 포상 확대 △병가규정 신설 및 유급병가 휴직 신설 △정직 3개월로 축소, 이중징계 삭제 △대기발령 조항 수정(자동퇴직 및 주관적인 대기발령 조건 삭제) △휴일근로 이동시간 근로시간으로 인정 △희망퇴직 시 노조와 협의 후 진행 △고객에 의한 성희롱, 성폭행 시 사측이 변호인 선임 등의 내용이 담겼다.
서대원 한국민주제약노조 코오롱제약 지부장은 “노조 출범 직후엔 회사가 노조 가입을 방해하려고 압력을 행사하거나 탈퇴를 회유하는 등 갈등이 있었다”며 “노조 가입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내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해 쟁의행위 없이 원만한 합의에 이르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현재 이 노조엔 영업인력의 30% 정도가 가입됐으며 노조 측은 이를 80%로 올리고 사무직, 생산직으로 가입 범위를 넓혀나갈 방침이다.
민주제약노조에 가입한 20개 제약사 외에도 다수의 다국적제약사가 ERP 등을 활용한 주기적인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있어 향후 이들 기업이 산별노조로 가입할지 주목된다.
예컨대 한국베링거인겔하임,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한국산도스 등이 내건 ERP 조건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근속연수×2개월 + 추가 8개월분’ 기본급으로 계산하며 최대 48개월분을 지급한다. 즉 근속연수가 10년이라면 총 28개월치 급여를 수령할 수 있고 여기에 회사별로 특별퇴직금이 추가 지급되기도 한다. 바이엘은 안성 조영제 공장 철수를 발표하면서 ‘근속연수×1.5개월 + 추가 10개월분’ 급여 외에 폐쇄 시점까지 근무한 위로금 3000만원을 추가로 지급했다.
한 다국적제약사 직원은 “ERP를 신청했다가 반려되는 경우엔 충성도에 의심을 사 오히려 좌천될 수 있고 신청조차 하지 못하는 직원에선 사기 저하가 생기기도 한다”며 “이직 자리를 확정한 직원은 문제가 없겠지만 이직 대상인지 잔류 대상인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직원 입장에서 고용 불안이 지속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억울해 했다.
비교적 이 제도가 잘 정착된 기업의 기준으로 연봉의 3~4배에 해당하는 퇴직위로금을 받고 퇴사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퇴직한 인력만큼 신규 인력이 충원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기존 근무자에 업무가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 사측이 인력감축이 필요할 때 언제든 이 제도를 활용해 우회적인 해고를 남발할 가능성도 크다. 한 다국적제약사 노조는 노동강도 실태를 조사한 결과 조합원의 60%가 업무시간 외 주말에 사무실로 출근해 근무한다는 설문결과도 나왔다.
잇따른 노조 설립으로 ‘꿈의 직장’ 다국적제약사의 부당한 근로환경이 드러나고 있다. 가혹행위·성추행 등 구태의 지속과 실적 압박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까지 발생하면서 정당한 근로자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본임금이 높다는 이유로 다국적제약사 경영진이 안정적 근무여건을 조성하려는 배려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