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스마트의료’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제한적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추진하면서 찬반 논쟁이 재점화되고 있다. 의료계가 정부의 스마트의료 시범사업을 1차의료 붕괴 및 환자안전 침해를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는 가운데 일부 의료계 개혁인사와 IT업계는 의사들이 ‘집단 이기주의’를 버리고 원격의료를 받아들여야 국가경쟁력과 만성질환 환자의 삶의 질 향상이 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무의미한 힘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쟁국인 일본과 중국 등은 원격진료를 선제적으로 도입하고 관련 인프라 구축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이러다간 의료·IT 강국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스마트의료는 헬스케어 기기로 수집된 만성질환 환자의 데이터를 의사, 방문간호사, 지역공보의 간 협진시스템으로 분석한 뒤 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에 논의됐던 원격진료보다 더 진보된 웨어러블 의료기기를 활용해 데이터 신뢰도가 높고, 방문간호사가 직접 환자와 대면함으로써 오진 위험을 줄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도서벽지 의료 취약계층의 의료기관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돼 미국 등 선진국은 관련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보건당국은 스마트의료 도입 시 836만명이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의료는 원격의료와 마찬가지로 ‘대면진료’ 원칙을 주장하는 의료계의 반대에 부딪혀 번번히 시작 단계에서 무산되고 있다. 지난 7월 중소벤처기업부는 강원도 춘천과 원주 지역 만성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원격진료를 제공하는 ‘강원도 디지털헬스케어사업(원격진료 실증특례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업은 도내 격오지의 고혈압·당뇨병 재진 환자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자가 측정한 혈압과 혈당 수치를 의사에게 전송하고, 이를 토대로 상담받을 수 있는 서비스 체계를 구축한다. 방문간호사 입회 아래 의사가 원격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약 처방까지 내릴 수 있다. 방문간호사는 의사가 처방한 약을 환자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맡게 된다.
하지만 도내 의사회가 일제히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사업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현재 원격의료 참여 의사를 밝힌 의료기관은 원주 내 의원급 한 곳뿐이다. 강원도는 동네의원이 진료를, 대형병원이 연구개발을 전담해 환자 쏠림현상을 막을 수 있다며 설득 중이지만 입장이 좁혀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8월엔 충남 서천군이 보건지소 의사와 방문간호사를 연계해 월 1~2회 방문 또는 원격으로 환자별 맞춤형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2019년 의료취약지 의료지원 시범사업’ 계획을 발표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대한의사협회, 충청남도의사회, 서천군의사회는 공동으로 충남 서천군청 앞에서 ‘서천군 원격의료 시범사업 및 공중보건의사 강제동원 규탄 집회’를 열고 원격의료 시범사업 즉각 철회를 촉구했다.
같은 달 복지부와 전북 완주군이 운주·화산면 환자 40여명을 대상으로 원격의료 시범사업 계획을 발표했지만 시작도 전에 잠정 보류됐다. 사업안이 발표되자마자 전북의사회가 완주군 보건소를 항의 방문해 시위까지 벌이며 거세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의료계가 원격의료 도입을 반대하는 가장 먼저 내세우는 명분은 환자안전이다. 환자를 직접 보거나 만지지 않고 화상으로 진료하면 오진이나 의료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박종혁 의협 대변인은 “원격의료는 모니터를 통한 시각적 판단과 환자의 주관적인 답변에 따른 청각적 판단만 가능하고, 촉진·검사 등 직접 진찰을 통한 객관적 판단의 근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불완전한 진료 형태”라며 “스마트의료이든, 원격의료이든 정부와 지자체가 졸속으로 관련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국민 건강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예상치 못한 의료사고 발생 시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에 대한 문제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1차의료 붕괴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것도 원격의료 도입을 반대하는 이유다. 1차의원은 원격모니터링시스템, 화상상담 등 통신기능이 탑재된 고가의 컴퓨터를 갖출 여력이 없어 대형병원으로 환자쏠림 현상이 심해질 것이라는 논리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현재 전국에 있는 1차의료기관들은 지리적 접근성에 기반해 생존을 유지하고 있다”며 “지리적 접근성을 뛰어넘는 원격진료가 허용되면 의료기관 종별간 무차별 경쟁이 발생해 동네의원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치권의 의료계 눈치보기로 법적·제도적 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6년 6월 박근혜정부가 대표 발의한 ‘원격의료법(의료법 일부개정안)’은 2017년 3월 법안심사소위에서 마지막 논의된 뒤 공식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지난해엔 문재인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당정협의를 거쳐 군부대·원양어선·교정시설·의료인이 없는 도서 벽지 등 4개 유형에 한해 의료인과 환자 간 원격의료를 추진하기로 했지만 현재까지 발의된 법안은 없다. 이는 2015년 박근혜정부가 추진하려던 원격의료법을 무산시켰던 민주당이 원격의료 찬성으로 입장을 선회할 경우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비난 여론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원격의료 찬성 측에선 의료계의 아집으로 인해 한국의 우수한 의료·IT 역량이 점차 뒤처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국내 의료기기 회사 관계자는 “IT와 보건의료 분야 우수인력이 집중된 현 상황에서 향후 10년 안에 의료·IT산업 성장 기회를 놓치면 제대로 된 미래 먹거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며 “의료계 반대에 부딪혀 원격의료 발전이 지지부진한 사이 미국, 일본, 중국 등 선진국은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원격의료 관련 인프라와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조사 기관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전세계 원격진료 시장 규모는 2015년 181억달러(21조3525억원)에서 2021년 412억달러(48조5995억원)로 두 배 이상 확대될 전망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원격진료 허용 등 의료규제를 풀면 최대 37만4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1990년대부터 원격진료를 도입해 현재 전체 진료 6건 가운데 1건이 원격진료로 이뤄지고 있다. 원격진료 후 약을 집에서 배달받을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됐다.
일본은 2015년 원격진료를 전면적으로 허용하고, 같은 해 5월엔 로봇을 활용한 원격수술도 할 수 있게 됐다. 2020년까지 영상진료는 물론 처방약을 집에서 받을 수 있는 원격진료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원격진료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면 의료비 지출이 3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중국은 2016년부터 원격진료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으며 지난 3월 기준 스마트폰으로 진료받은 사람이 1억명을 넘어섰다. 최근엔 5G(5세대 이동통신, 최대속도가 20Gbps에 달하는 이동통신 기술)를 이용해 3000km 떨어진 환자의 뇌수술에 성공, 의료계의 관심을 모았다.
스마트의료 논란이 재점화되자 원격조제, 온라인약국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의약계 내부에서 스마트의료 시범사업의 하나로 의약품 택배배송이 추진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약사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복지부가 “의약품 택배배송은 검토 대상이 아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현행법상 국내에선 의약품을 온라인으로 처방받아 택배로 받아보는 원격조제 및 온라인약국 시스템은 불법이다. 다만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산하 헬스케어위원회가 의약품과 의료기기의 온라인 판매 허용 문제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미국, 영국, 일본, 중국, 인도, 불가리아, 캐나다, 우즈베키스탄 등이 온라인 약국을 허용하고 있다.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에선 온라인약국이 성업 중이다. 지난해 미국 거대 전자상거래기업 아마존은 온라인 의약품 배송업체 필팩을 7억5300만달러(약 9020억원)에 인수하고 본격적인 원격처방 및 조제약 배송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필팩은 미국 50개주에서 의약품 유통면허를 보유한 온라인약국(Mail-Order Pharmacy)을 통해 매일 가정까지 환자의 처방약을 배달해준다.
국내 약사들은 원격의료와 마찬가지로 원격조제 및 온라인약국 시스템을 반대하고 있다. 기존 약국의 입지 축소, 의약품 오남용, 개인 질병정보 유출 우려 등이 주요 반대 이유다. 실제로 영국에선 온라인약국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기존 약국의 40%가 폐업하고 약사 일자리가 1383개 줄어든다는 보고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도서·산간 지역 거주자나 거동이 불편한 고령환자 등 의약품 접근성이 낮은 사람에 한해 선택적으로 의약품 배송서비스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아 장기적으로 관계 부처와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