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행하는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 ASF)은 인체에 유해하지 않지만 인간이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KMI한국의학연구소 학술위원회(위원장 신상엽 감염내과 전문의)는 최근 국내에 유행하고 있는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 ASF)’에 대한 건강정보를 30일 공유했다.
KMI 신상엽 학술위원장(전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관)은 “ASF가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다”며 “정부가 ‘사람은 ASF에 걸리지 않는다’라고 발표하고 있지만 ‘돼지독감’으로 불렸던 ‘신종플루’의 대유행을 경험했던 국민들의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사람은 ASF에 걸리지 않는 것일까. 바이러스는 유전자(DNA 또는 RNA)와 단백질막으로 구성된다. 바이러스는 세균과는 달리 다른 생명체(숙주)의 세포 안에 들어가야만 생존과 번식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아무 세포에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 단백질막이 열쇠, 숙주 세포벽이 자물쇠라고 했을 때, 열쇠와 자물쇠가 맞는 세포에만 들어갈 수 있다. 때문에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생존할 수 있는 숙주와 세포는 대개 정해져 있다.
일반적으로 RNA 바이러스는 크기가 작고 유전자 변이가 쉬워 들어갈 수 있는 숙주의 폭도 넓고 열쇠 모양을 계속 바꾸는 변종이 수시로 만들어져 과거에는 동물만 감염시켰던 바이러스가 ‘종간 장벽’을 넘어 사람도 감염시키는 ‘인수공통감염병’을 유발하는 경우도 흔하다.
반면에 DNA 바이러스는 크고 안정적 구조를 갖추고 있고 유전자 변이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아 ‘종간 장벽’을 넘어 감염 가능한 숙주의 폭을 넓히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 사이에 유행하는 인플루엔자바이러스는 작은 RNA 바이러스다. 돼지나 조류 사이에 유행하는 인플루엔자바이러스도 있지만 사람 사이에 유행하는 바이러스와는 구조가 달라 사람을 감염시키기 어렵다.
그런데 돼지의 세포벽은 돼지, 조류, 사람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열쇠 구조가 모두 들어맞는 엉성한 자물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돼지 세포가 ‘혼합 용기(mixing vessel)’ 역할을 해서 돼지 세포 안에서 돼지-조류-사람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RNA가 모두 섞여 종간 장벽을 넘을 수 있게 된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탄생했고 처음에는 돼지독감으로 알려졌던 신종플루가 사람 사이에서 대유행했다.
ASF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비교적 큰 DNA 바이러스다. 지금까지 100여년간 50개국 이상에서 ASF 대유행이 있었지만 아직 단 한번도 ASF가 사람에게는 발생한 적이 없다. 종간 장벽을 넘을 수 있을 정도의 특이한 ASF 바이러스의 유전자 변이도 보고된 적이 없다.
아직 현대의학의 수준이 바이러스 단백질 구조를 분석해서 인체 감염 가능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에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ASF의 과거력과 ASF 바이러스가 DNA 바이러스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미래에도 사람이 ASF에 걸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ASF 바이러스는 돼지 내에서 백혈구의 일종인 단핵세포(monocyte)/대식세포(macrophage)를 주로 감염시키고 파괴한다. 세포가 깨지면서 염증반응이 일어나고 염증매개물질이 나오면 고열이 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세포들은 비장에 모여 제거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하가 걸린 비장은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이 때문에 ASF 초기에는 발열이 특징적이고 ASF로 죽은 돼지를 부검하면 비장종대가 관찰된다.
ASF는 1921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최초 보고된 이후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풍토병으로 자리잡았다. 2018년 8월 아시아 최초로 중국에서 발생한 이후 주변 여러 나라로 확산 중으로 이번에 국내에도 유입되었다. 그런데 ASF의 국내 유입경로는 아직 불명확하다.
ASF의 감염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직접전파다. 감염된 동물이 건강한 동물과 접촉할 때 발생한다. ASF의 국내 유입경로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직접전파에 의해 국내 확산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살처분 및 이동제한 등을 시행하고 있다.
두 번째는 간접전파다. ASF 바이러스는 환경 저항성이 강해 냉장육에서 수개월, 냉동육에서 수 년 이상 생존이 가능하며, 햄과 소세지 같은 식육제품에서도 장기간 생존한다. 이렇게 ASF 바이러스에 오염된 매개물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 간접전파다. 사람이 간접전파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실제 ASF 바이러스에 오염된 잔반을 열처리하지 않고 건강한 돼지에 먹인 후 ASF의 전세계 대유행 및 전파가 시작된 경우가 많다. ASF의 국내 유입도 해외에서 국내로 바이러스에 오염된 매개물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간접전파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매개체 전파다. ASF 바이러스를 보유한 새물렁진드기(Ornithodoros)가 돼지를 물면 ASF에 걸린다. 새물렁진드기 내에서 ASF 바이러스는 수년간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한 ASF 매개체가 될 수 있고 실제 과거 여러 유행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국내에도 새물렁진드기가 존재한다. 홍도, 칠발도 등의 섬지역의 철새와 새 둥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2013년부터 3년간 방역 당국에서 전국적으로 돼지와 돼지 축사 주변 환경에서 진드기를 조사했을 때 내륙에서 새물렁진드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철새는 날아다니면서 언제든 진드기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ASF가 발생한 곳이 철새가 많이 다니는 서해에 인접하고 있는데다 북한 지역에는 ASF에 감염된 진드기가 존재하고 조류 등에 의해서 진드기가 남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ASF의 국내 유입 경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ASF 발생 농장 인근 및 국내 전역에서 새물렁진드기에 대한 면밀한 역학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신상엽 학술위원장은 “사람이 ASF에 걸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ASF 유행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는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잘 익힌 돼지고기는 ASF에서 안전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먹어도 되지만, ASF의 유입과 확산을 막기 위해서 국내외 여행 시 불필요한 돼지 축사 접근은 피하고 해외에서 돼지고기나 돼지고기 가공품 등을 가지고 입국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