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약처, 2017년 화장품에 질환명 표기 허용 … 피부과 의사 “화장품 맹신하다 치료시기 놓쳐”
국내 코스메틱산업 육성을 위해 기능성화장품 범위를 넓히려는 화장품업계와 이를 반대하는 피부과 의사 간 갈등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기능성화장품은 질환이나 증상 명칭이 함께 표기되는데, 이럴 경우 소비자에게 ‘화장품=의약품’이라는 인식을 줘 치료 시기를 놓치고 병을 키울 수 있다는 게 의료계의 주장이다.
지난 6월 피부과 의사들과 소비자단체는 기능성화장품에 아토피피부염·여드름 개선을 포함시킨 화장품법 시행규칙을 개정해야 한다며 공동성명서까지 발표했지만 주무부처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기능성화장품은 미백, 주름개선, 탈모 개선 등 효과와 안전성을 식약처로부터 인증받은 제품이다. 2017년 이전까지는 미백, 주름개선, 자외선차단 등 3종만 기능성으로 인정되다 2017년 5월부터 여드름 개선 등 8종이 추가됐다.
현행 ‘화장품법 시행규칙 제2조’는 △피부에 멜라닌색소가 침착하는 것을 방지해 기미·주근깨 등의 생성을 억제함으로써 피부미백에 도움을 주는 화장품 △피부에 침착된 멜라닌색소 색을 엷게 만들어 피부미백을 돕는 화장품 △피부에 탄력을 줘 피부주름을 완화 또는 개선하는 화장품 △강한 햇볕을 방지해 피부를 곱게 태워주는 화장품 △자외선을 차단 또는 산란시켜 피부를 보호하는 화장품 △모발 색상을 변화(탈염·탈색 포함)시키는 화장품(염모제) △체모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화장품(제모제) △탈모 증상 완화에 도움을 주는 화장품(탈모방지제) △여드름성 피부 완화에 도움을 주는 화장품 △튼살로 인한 붉은 선을 엷게 만드는 화장품 △아토피성 피부로 인한 건조함 완화에 도움을 주는 화장품 등 11종을 기능성화장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중 염모제, 제모제, 탈모방지제는 원래 의약외품으로 분류됐다가 2017년 5월 30일부로 기능성화장품으로 전환됐다. 11종에 해당되는 기능성화장품은 제품에 아토피, 여드름, 탈모 등 질병명을 표기할 수 있다.
주무부처인 식약처가 화장품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기능성화장품 범위를 넓힌 명분은 ‘K-뷰티산업 육성’이다. 화장품 수출 성장세는 지속되고 있지만 2010년 이후 중국·일본 화장품 브랜드의 약진과 국내 시장 침체 및 경쟁 과열로 K-뷰티산업이 하락기에 접어들었다는 우려가 나오자 국내 기업들이 기능성화장품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들 기업은 ‘서구화된 식습관 및 미세먼지·화학물질 노출로 인한 피부질환 발생’과 ‘구매력 강한 40~50대 여성 및 남성의 피부미용 관심도 증가’로 기능성화장품 수요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식약처에 기능성화장품 품목 확대를 강력하게 요구해왔다.
여기에 피부질환 치료 노하우를 보유한 제약사와 유명 피부과 병원이 화장품 산업에 진출, 질환치료에 중점을 둔 ‘더마코스메틱(Dermocosmetic)’ 제품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기능성화장품 시장은 더욱 확대됐다. 2018년 기준 14조4000억원 규모인 국내 화장품 시장에서 기능성화장품은 20%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더마코스메틱은 화장품을 뜻하는 코스메틱(cosmetic)과 피부과학을 의미하는 더마톨로지(dermatology)의 합성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흔히 ‘약국 화장품’으로 불린다.
의료계와 시민단체는 기능성화장품 품목에 아토피, 여드름, 탈모 등을 포함시키는 것을 강력 반대해왔다. 화장품에 질병명이 붙는 순간 의약품으로 오해받고 치료제로 둔갑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게 아토피피부염이다. 피부과 의사들은 피부과질환 중 아토피피부염은 진단과 치료가 까다롭고, 환자 개별 특성에 맞는 치료가 필요한 만큼 화장품에 질환명을 표기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석민 대한피부과의사회 회장은 “화장품 대기업의 요구로 아토피 등 질환명이 포함된 내용을 용기에 표기하는 것은 환자에게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킬 우려가 있다”며 “화장품만 맹신하다 병원에 갈 시기를 놓치면 환자의 경제적 부담만 가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토피로 인한 건조함 완화에 도움된다는 것은 결국 보습이 잘 된다는 의미일 뿐이라 굳에 아토피라는 질병명을 넣을 필요가 없다”며 “기능성화장품은 보통 일반 화장품보다 가격이 두 배 이상 비싸기 때문에 결국 의미 없이 환자의 경제적 부담만 가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한피부과학회 관계자는 “화장품 업체가 보습력에 ‘아토피’라는 표현까지 추가해 꼭 필요한 제품인 것처럼 마케팅하면 중증 환자 입장에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갑을 열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환자는 경제적 부담과 좌절감으로 고통받고 화장품 업체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부과 의사들은 기능성화장품을 의약품으로 오인해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역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배유인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피부과 교수는 “아토피피부염에 보습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며 “아토피 증상이 너무 심한 부위에 보습화장품을 바르면 손상된 피부 각질층으로 보습 성분이 침투해 상태가 악화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행규칙이 개정된 지 2년이 지난 현재 아토피피부염 기능성화장품이 허가된 사례는 아직 없다. 대한피부과의사회 관계자는 “아직 아토피가 표기된 기능성화장품이 허가 및 출시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식약처도 심적인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며 “피부과 의사들의 반대의견을 전하기 위해 식약처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아토피, 여드름, 탈모 같은 질병명이 들어가는 기능성화장품에 ‘의약품이 아니다’는 주의 문구를 표기하면 불필요한 사용을 억제할 수 있다”며 “아토피 기능성화장품 효능·효과 평가를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며 올해 안으로 관련 가이드라인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기능성화장품 확대에 열을 올릴 게 아니라 치료제 급여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현재 중증 아토피피부염 환자를 위한 거의 유일한 생물학치료제인 ‘듀피젠트(성분명 두필루맙, dupilumab, 사노피아벤티스)’는 아직 비보험이라 연간 환자부담금이 한 달에만 200만~400만원(1회주사 한 앰플당 96만원선)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토피피부염은 가려움증과 피부건조증이 주로 나타나는 만성 염증성 피부질환이다. 중증이면 전신에 발진, 심각한 가려움증, 피부건조증, 갈라짐, 딱지 및 진물 등 증상이 발생한다. 알레르기비염과 천식이 동반되기도 한다. 국내 환자는 2018년 기준 104만여명 정도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