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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 ‘그루밍 성범죄’ 잦은 이유 … 유죄판결 받아도 면허 그대로
  • 박정환 기자
  • 등록 2019-08-29 09:02:24
  • 수정 2020-09-22 10: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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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면허정지 규정만, 면허박탈 조항 없어 … 복지부 ‘복지부동’도 논란, 정신과 의사 김모 씨 사건 관망
대한의사협회는 지난해 12월 발의된 성범죄 의료인을 강력 처벌하는 의료법 개정안에 대해 ‘직업선택의 자유 침해’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성범죄는 꼭 강압적인 분위기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심리적으로 의지하게 만든 뒤 성적인 폭력을 가하는 ‘그루밍 성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최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정신과 의사 김모 씨의 사례처럼 정신과 병·의원을 찾는 환자는 대부분 심신 미약 상태라 상담 의사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되기 쉽고, 이로 인해 그루밍 성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커 관련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루밍(groomin)은 길들인다는 의미의 영단어다. 즉 그루밍 성범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와 환자, 교사와 학생, 목사와 신도처럼 수직적 관계에서 자주 발생하는 게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피해자 고르기 △피해자와 신뢰 쌓기 △피해자의 욕구 충족시키기 △피해자 고립시키기 △피해자와 자연스러운 신체 접촉을 유도하며 성적인 관계 형성하기 △협박과 회유를 통한 통제 등 6단계를 거쳐 이뤄진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거나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신뢰를 쌓은 뒤, 서로 비밀을 만들며 피해자가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든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가해자를 조력자, 멘토,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성적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고, 피해자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벗어나려고 하면 회유하거나 협박하면서 폭로를 막기도 한다. 피해자는 자신이 학대당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표면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여 수사나 처벌이 어려워 문제가 심각하다.
 
2013년 한 연예기획사 대표가 여중생에게 강요해 성관계를 가졌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여중생이 연예기획사 대표에게 ‘사랑한다’와 사랑을 의미하는 이모티콘을 문자로 보낸 것 등을 인용해 여중생이 자발적 성관계를 가졌다고 봤다.
 
정신과 의사가 자신이 상담하는 환자를 그루밍 성폭행한 사건은 최근 MBC ‘PD수첩’에 의해 보도됐다. 정신과 의사인 김모 씨는 2018년 4월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 A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당시 환자 A 씨는 “김씨가 제안한 일본 여행을 따라갔다가 성폭행을 당했고, 이후 여러 차례 성관계를 제안했는데 이를 거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모 씨는 오히려 자신이 환자에게 강제로 성추행을 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7개월 뒤인 지난해 11월 대구지검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올해 3월 이에 불복한 A 씨가가 낸 항고도 기각됐다.
 
그러던 중 김 씨에게 그루밍 성범죄를 당했다는 또다른 피해자 B 씨의 증언이 나왔다. B 씨는 “김 씨에게 호감을 표시하자 김 씨가 성관계를 제안했다”며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치료 기간 중에 다섯 차례 이상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 B 씨는 김 씨를 고소했지만 경찰은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며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피해자들은 김 씨가 피감독자 간음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형법은 이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신의 수행비서인 김지은 씨와 성관계를 가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받았던 혐의다. 안 씨는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현재 2심 판결에 의해 구속된 상태다. 당시 법원은 “안 지사는 자신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김씨를 의사에 반해 간음·추행했다”며 “안 지사는 김씨가 자신의 비서이면서 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상의 특징 때문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김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했다.
 
의료인의 성범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장정숙 바른미래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성범죄 의사 검거현황’에 따르면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는 2015년 109명, 2016년 119명, 2017년 137명, 2018년 161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K 정신과 전문의는 “정신과 환자는 대부분 심리적 미약 상태에서 병원을 찾기 때문에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 대상이 되기 쉽다”며 “특히 상담자와 강한 전이관계에 있는 내담자는 상담자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엄격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70년 미국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이 발표한 ‘임상심리학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성적 관계가 얼마나 일어나는지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상담자의 17%가 내담자와 성적 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성적인 관계는 환자에게 심각한 정신적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 연구에서 상담자와 성관계를 맺은 내담자의 11%는 정신병원 입원이 필요한 정도의 정신적 피해를 입었고, 그 중 1%는 자살을 시도했다.
 
환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진 상담자를 법적으로 제제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미국의 26개 주에선 상담자가 환자와 성관계를 맺은 경우 환자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면허 자격을 박탈한다. 독일에서도 의료인이 치료관계를 악용해 성범죄를 저지르면 가중 처벌하는 법 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국내엔 성범죄 의료인의 면허 박탈 규정이 없다. 의료법 제66조에 따르면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행위를 한 의료인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1년의 범위에서 면허자격을 정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법원에서 유죄 선고가 나와도 의료인 면허 자체는 유지돼 징역형을 받아도 출소 후 다시 의사로 근무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일각에선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의 성범죄를 막기 위해 상담자를 법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상담의 자율성만 해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의료인의 그루밍 성범죄가 사회적 이슈가 된 상황에서 보건당국이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현재 그루밍 성범죄 가해자로 고소당한 정신과 의사 김 씨는 대구에서 정상적으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사건이 처음 불거졌던 지난해 4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윤리위원회는 ‘김 씨는 의사로서 진료해서는 안 되는 상태’라는 결론을 내리고 학회에서 제명시켰고, 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에 ‘진료 중단 권고’를 통보했다. 하지만 복지부는 김 씨 병원을 관할하는 대구 수성구 보건소에 사건을 조사하라고 지시한 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복지부는 “진료 행위 중에 강간이나 유사강간 행위를 했으면 면허정지 12개월의 행정조치가 가능하지만 김 씨의 사례는 진료가 끝난 뒤 일어난 것이라 관련 행정처분 규칙이 없으며, 재판 등 법적인 절차가 다 끝나야 행정처분을 고려해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12월 국회 차원에서 성범죄 의료인을 강력 처벌하는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상임위에 묶여 있는 상태다. 장정숙 의원이 발의한 이 개정안은 의료인이 성범죄를 저질러 기소되면 재판이 확정될 때까지 면허를 일시 정지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재판 결과 금고 이상 형을 선고받으면 면허취소, 벌금형을 선고받으면 면허정지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개정안을 반대하고 있다. 의협 관계자는 “의료인은 업무 특성상 환자의 신체에 직접 접촉하는 방식으로 의료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며 “환자가 진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의료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할 경우 진술만으로도 기소되고 유죄 판결까지 내려질 수 있음을 감안하면 개정안은 부적절하고 헌법 불합치적인 수단”이라고 밝혔다.
 
의사들의 제편 감싸기식 대응이 그루밍 성범죄 등 의사의 비윤리 행위를 야기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환자단체연합회 관계자는 “의사단체들이 이익이나 정치적 사안엔 발빠르게 대응하면서 환자안전 문제나 의사의 비윤리 행위 등엔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4일 의료인이 진료환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가중처벌하는 의료법 일부법률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신 의원은 “환자에 대한 의사의 성범죄는 일반적인 성범죄와 구분해야 한다”면서 “외국과 같이 국내에도 의사의 성범죄에 대한 가중처벌 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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