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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사회
‘웰다잉법’, 존엄사 관심은 연령 불문 … 상속문제 등 악용 우려
  • 박정환 기자
  • 등록 2017-11-09 06:40:25
  • 수정 2020-09-13 15: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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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년 2월 정식발효 … 미국선 보험사가 말기 환자 존엄사 종용
‘연명의료결정법’ 시범사업 시행 후 이틀 만에 37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제출했으며, 70대 고령층은 물론 젊은층의 문의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올해부터 환자 스스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존엄사’를 보장하는 ‘연명의료결정법’, 일명 ‘웰다잉법(well-dying)’이 시행되면서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종교계를 비롯한 반대 측은 웰다잉법이 생명윤리에 어긋나고 죽음의 계급화를 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찬성 측은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지 않을 권리도 필요하다’는 논리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웰다잉법은 지난달 23일부터 내년 1월 15일까지 시범사업을 거친 뒤 2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간다. 이 법에 따르면 존엄사를 희망한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4가지의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을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양공급, 수분·산소공급, 체온유지, 배변 및 배뇨 도움, 진통제 투여 같은 기본적인 고통완화 조치는 중단할 수 없다.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으로부터 존엄사 대상, 즉 현재 임종 과정이라는 의학적 판단을 받아야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다. 임종 과정은 치료해도 회생할 가능성이 없거나,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상태를 의미한다.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인데 환자나 보호자가 요구한다고 해서 치료를 중지하는 것은 자살방조에 해당한다. 연명치료 중단 대상이 아닌데 치료를 중단한 의사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징역형을 받으면 7년 이하의 자격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19세 이상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거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전무할 땐 환자 가족 중 2인 이상의 진술을 바탕으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한다.
 
존엄사를 원한다면 아프기 전 건강할 때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거나, 질병 말기 또는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제출하면 된다. 
시범사업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과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등 두 파트로 나눠 시행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각당복지재단, 대한웰다잉협회,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충남대병원 5개 시범사업기관에서만 작성할 수 있다. 19세 이상 성인이면 질병 유무와 상관없이 상담 및 작성 가능하다.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행 기관은 강원대병원, 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고려대 구로병원, 서울대병원,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세브란스병원, 영남대병원, 울산대병원, 제주대병원, 충남대병원 등이다. 연명의료계획서는 사전의향서를 쓰지 못한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하게 된 말기·임종과정 환자가 의사에게 요구해 작성할 수 있다.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관계자는 “시범사업 실시 이틀 후인 지난달 24일 암 치료를 위해 임원 중이던 여성 환자가 처음으로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했다”며 “미리 연명의료 의사를 밝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경우 시범사업 실시 이틀 만에 37명이 작성했으며, 관련 문의도 꾸준히 늘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는 “지난달 23일 시범사업이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간 뒤 존엄사 관련 상담을 위해 20여명이 병원을 찾았고, 전화문의는 벌써 50건이 넘었다”며 “꼭 고령자가 아니더라도 중년층, 심지어 20대 젊은층의 문의도 증가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관련 문의가 급격히 늘면서 시범사업 의료기관들은 호스피스병동을 중심으로 ‘존엄사TF팀’을 구성하고 상담인력을 채용하고 있다. 

웰다잉법이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민감한 제도인 만큼 이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크다.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환자의 의사를 잘못 추정해 환자의 의사와 반대로 가족이 존엄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살인 및 과실치사죄 논란이 생길 여지가 있다. 

돈 때문에 연명의료 중단을 선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존엄사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 오리건주에서는 말기 환자에게 보험사가 존엄사 선택을 종용했다는 현지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 환자가 연명치료를 위해 보험사에 의료비를 청구했지만 보험사 직원은 약값이 너무 비싸고 처방을 받아도 생명연장 가능성이 없다며 약값 대신 존엄사 선택 후 발생하는 비용을 지급하겠다고 발언해 빈축을 샀다. 

특히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의식을 잃었다면 남은 유가족이 상속이나 치료비 부담 등 경제적 이유로 법을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관계자는 “가족이 입원료가 비싼 중환자실에 한 달 이상 입원해 있다면 경제적 부담 탓에 이기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유산이나 치료비 등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환자의 의사는 배제한 채 가족들끼리 연명치료 중단을 합의하는 사례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고 주장했다. 
윤영호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환자 본인과 의사가 직접 연명의료 계획서를 작성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3의 공식기관에서 이를 심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존엄사 논쟁이 본격화한 것은 1997년 12월 보라매병원 사건 때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유지하던 환자의 가족이 강하게 퇴원을 요구하자 병원 측은 사망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은 뒤 환자를 퇴원시켰다. 인공호흡기를 떼자 환자는 사망했고 2004년 법원은 가족과 의사에게 각각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로 유죄를 선고했다. 

2008년엔 존엄사를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그해 2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1년째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김모 할머니의 가족이 기계장치로 생명을 연장하지 않는 게 평소 환자의 뜻이라면서 치료중단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같은 해 11월 존엄사를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렸고, 2016년 1월 국회는 존엄사 조건과 절차를 다룬 연명의료결정법을 통과시켰다. 

존엄사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만 이뤄진다는 점에서 안락사와 다른 개념이다.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에 따라 약물을 투입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적극적 안락사’와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영양공급이나 약물투여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현재 안락사와 존엄사 모두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국가는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이다. 벨기에는 미성년자를 포함한 모든 연령대에서 안락사 혹은 존엄사를 허용한다. 미국은 일부 주에서만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품격있는 죽음을 위해 벨기에를 방문하는 일명 ‘존엄사 여행’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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