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공약이었던 보건의료 분야 조직 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그동안 보건부 독립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의료계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자 대안으로 복수차관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전임·현직 보건복지부 장관이 모두 복수차관제 도입을 강조한 데다 국회도 긍정적인 입장이어서 늦어도 내년 상반기 안엔 관련 정부조직법이 개정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복수차관제가 도입되면 불필요한 보건 분야 고위직이 생겨나고, 보수적인 의료계의 특성과 맞물려 일종의 카르텔이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의료계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복지부에서 보건의료 분야를 분리한 보건부 신설을 요구해왔다. 제19대 대선 때에도 ‘2017 국민을 위한 보건의료정책 제안’을 통해 보건부 분리를 강조했다. 복지부 전체 인력과 예산 구성이 복지 분야에 쏠리다보니 보건의료 분야 전문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올해 복지부 전체 예산 57조 6628억원중 건강보험을 제외한 보건의료 예산은 4.0%(2조3353억원)에 그친다”며 “대부분의 의료 관련 부서들이 행정고시 출신 관료들로 채워져 전문성과 대규모 감염병 유행 등에 대등할 위기상황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불균형적인 예산배분과 인력배치가 정책예산 축소로 이어져 전문인력이 줄어드는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는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구고령화로 의료와 복지가 점차 밀접해지는 상황에서 보건부 독립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이에 의료계는 복수차관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재정경제부, 외교통상부, 행정자치부, 산업자원부 등 4개 부처를 대상으로 복수차관제를 시행했다. 현재는 기획재정부, 외교부, 국토교통부,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복수차관제로 운영 중이다.
보건복지부의 경우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에 복수차관제 도입이 검토됐다가 무산됐고,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MERS) 사태의 원인으로 보건의료 컨트롤타워의 부재가 꼽히면서 재차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복지통인 박능후 복지부장관이 임명되면서 복수차관제 도입이 탄력을 받는 분위기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초대 장관으로 복지전문가가 지명되면서 보건의료분야 정책이 소외되지 않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보건과 복지 분야의 균형, 보건의료정책의 일관성과 전문성을 높이려면 복수차관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보건의료와 사회복지라는 두 가지 분야를 함께 담당하고 있지만 업무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연계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현재 복지부의 소관 법령은 299개, 예산은 57조7000억원으로 정부 부처 중 두번째로 많은 수준”이라며 “현행 1장관·1차관제는 의사결정의 병목현상을 가중시켜 다양하고 복잡한 보건의료 관련 정책에 적절히 대응하고 정책의 질을 향상시키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도 취임 전 인사청문회에서 “늘어나는 복지수요에 대응하고 저출산·고령화대책 총괄조정, 국민건강 등 보건복지 분야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복수차관을 두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복수차관제로 보건 업무와 복지 업무를 분리하면 의료정책이 경제논리에 휘둘리는 것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당시 보건·복지를 포함한 사회정책이 예산권을 틀어쥔 경제 부처의 의료산업화 기조에 요동쳤다”며 “대표적인 게 의료계가 강력히 반대했던 원격의료 정책 추진”이었다고 주장했다.
의료계는 지난달 20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복수차관제 도입과 질병관리본부를 격상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날 안건엔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관련 내용이 부대의견으로 명시돼 늦어도 내년 상반기 안엔 국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국회는 이날 △미래창조과학부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변경 △국민안전처 폐지 △중소기업청의 중소벤처기업부로 격상 △국가보훈처장 장관급 격상 등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복수차관제 도입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김정숙 건강세상네트워크 집행위원은 “인구고령화와 양극화로 ‘의료빈민’이 점차 증가하는 상황에서 복지와 보건 분야를 따로 떼어놓으면 오히려 정책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정책 추진에 의사 직군의 입김이 작용하기 쉬워 선심성 정책이나 과도한 민원이 쏟아질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복수차관제가 보건의료인을 중심으로 한 관료주의적 기득권 체제를 공고히 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