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우모 씨(32)는 최근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손목이 아파 인근 정형외과의원을 찾았지만 “예약이 꽉 차 있어 진료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근 정형외과에서도 “예약 없이 당일 진료는 힘드니 지금 예약날짜를 잡고 다음에 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 씨는 “큰 수술도 아니고 어디가 왜 아픈지만 진료만 받고 싶을 뿐인데 불가능하다고 하니 황당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주로 피부과나 성형외과에서 문제가 됐던 일반 환자에 대한 진료거부 문제가 이젠 정형외과 의원에서도 나타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부과에서 무좀치료나 사소한 습진치료를 거부하고, 성형외과에서 화상치료를 기피하는 부정적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손목이 욱신거리거나, 어깨를 결리는 환자 중에서 고가 비급여치료로 연결된 만한 경우가 아니면 간호사 등을 통해 사전에 걸러내 아예 진료도 못보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저수가와 과당경쟁으로 경영난에 직면한 정형외과 의원들은 물리치료, 주사시술, 교정치료 등 수익성이 높은 비급여 진료에 집중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환자에게 직접적인 거부의사를 표하기보다는 예약이 꽉 차 있어 진료가 어렵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경우가 많다.
한 정형외과 원장은 “아무리 수익을 좇는다고 해도 대놓고 진료를 거부하는 병원은 아직까지 별로 없다”며 “하지만 평일 오후나 토요일 진료 시간대를 물리치료 등 비급여 진료 환자의 예약으로 꽉 채워 일반진료 환자가 어쩔 수 없이 다른 병원으로 가도록 하는 꼼수를 부리는 곳이 제법 많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실제로 예약이 꽉 찼는지, 아니면 말로만 그렇게 둘러대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근골격계질환은 유독 비급여 진료항목이 많다. 증상이 경미하다고 판단될 땐 물리치료, 추나요법, 체외충격파 등 손과 기계로 근육을 만지거나 자극하는 치료를 시행한다. 연골재생주사를 포함한 주사요법도 수술 없이 관절통이나 운동범위 제한 등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어 인기다. 문제는 비급여항목의 경우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부족해 치료효과가 환자마다 다르게 나타나거나, 병원 입지나 의사 처방에 따라 진료 단가가 크게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규모가 큰 병원보다 재정 상황이 열악한 의원급 의료기관의 경우 일반 진료만으로는 직원들 월급 주기도 빠듯한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급여 진료 환자를 늘리려는 것은 이해되지만 진료 거부는 엄연한 불법 행위다.
의료법 15조는 ‘의료인은 진료 또는 조산의 요구를 받은 때에는 거절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진료를 거부한 의료인은 면허정지 1개월 등 행정 처분을 받을 수 있다. 지난 7일엔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할 경우 의료인은 물론 의료기관 개설자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한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우 씨의 사례처럼 예약이 꽉 찼다는 이유로 환자를 받지 않는 것은 의료법상 진료거부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밖에 △의사가 부재중이거나 신병으로 인해 진료할 수 없는 상황 △병상·의료인력·의약품·치료재료 등 시설 및 인력 등이 부족한 상황 △의사가 다른 전문과목 영역 또는 고난도 진료를 수행할 전문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상황도 진료 거부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항목에 해당하지 않고 무작정 진료를 거부하더라도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실제로 시술 환자만 골라 받는 의원들의 행태가 진료 거부로 인정돼 제재받는 일은 거의 없다. 최근 3년간 진료거부로 행정처분 받은 건수는 2013년 1건, 2014년 0건, 2015년 2건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심미적 목적으로 비보험 의료행위만 한다면 분명 위법”이라며 “하지만 추측만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도 많아 상세한 내용을 확인해야 하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다”고 말했다.
강태헌 의료소비자연대 위원은 “교정, 에스테틱, 주사 등 비급여 진료만 하려고 급여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엄연한 진료거부 행위지만 관련 법조항만 있을 뿐 구체적인 시행령 등이 마련되지 않아 처벌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진료거부 행위를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 일반진료 항목의 수가인상 및 비급여항목 통제 등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비급여치료 확산에 따른 안전성 문제도 우려된다. 2008년 세계척추학회지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도수치료에 포함되는 카이로프랙틱을 받은 뒤 5~20%의 비율로 관절통, 두통, 피로감, 다리로 뻗치는 통증(방사통), 현기증 등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드문 확률로 요추간판수핵탈출증(허리디스크) 등 척수손상, 전신마비 등으로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오십견(유착성관절낭염)이나 회전근개파열 환자는 처음부터 무리하게 도수치료를 받으면 오히려 통증이 심해질 수 있고 척추추간판(디스크) 수핵이 이미 탈출돼 신경성 증상이 나타난 환자도 단기간의 도수치료만으로는 호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유기원 대한척추외과학회 가이드라인위원회장(가톨릭대 성빈센트병원 정형외과 교수)은 “만성요통 환자를 대상으로 한 레이저치료, 신경전기자극치료, 물리치료 등은 효과가 크게 없어 권고하지 않는다”며 “현재 요통 등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다양한 비급여 치료법이 난립하고 있는데 정확한 진단 후 치료받지 않으면 질환이 만성화돼 환자의 고통만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