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지난 5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교장관과 첫 양국 외교장관회담을 갖고 사실상 강력한 수교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한류문화 확산과 한국 공산품의 대 쿠바 수출에 청신호가 켜질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쿠바는 1949년 대한민국을 승인했지만 1959년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 이후 양국 교류가 단절됐고, 공식 수교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0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대통령으로는 88년 만에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해 ‘개방’을 주문했지만 쿠바 정치권은 방문 직후 ‘공산주의 사수’ 의지를 결연이 했고, 현 집권자인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의 형인 피델 카스트로는 ‘오바마의 선물은 필요 없다’며 시장경제 요소의 확대 도입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1인당 GDP는 1만1258달러에 그치지만 무상 의료와 교육이 제공됨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중 항상 최상위권에 꼽혀 왔던 게 쿠바다. 하지만 오랜 세월 지속된 대 쿠바 경제제재로 이제는 피로감이 누적돼 안팎으로 개방 압력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국내외 여행 마니아들은 더 이상 쿠바에 영미 자본주의 물결이 침투하기 전에 순수한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보러 일부러 찾아나서고 있다.
변화의 갈림길에 놓인 쿠바의 무상의료 제도를 이참에 책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와 영화 ‘식코’를 통해 미국 민간의료보험 제도와 비교해보고자 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보건복지부가 추진하고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지난 3월 의료민영화 논란을 다시 일으켰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보건·의료와 같은 공공서비스의 정책결정권을 서비스산업선진화위원회장인 기획재정부 장관이 갖게 되면 투자개방형 의료복지(영리병원) 등 도입이 쉬워질 수 있다”며 “민간보험사의 해외환자 유치는 보험사가 병원을 지배하는 미국식 의료민영화의 발판”이라고 반발했다. 여당과 정부 측은 청년실업 해소 등 경제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정책일 뿐 의료민영화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해명했으나, 이 법안은 2012년 7월 국회에 제출된 이후 여·야간 의견 대립으로 통과가 저지되다가 자동 폐기된 상태다.
국민들이 의료민영화란 말에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은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영화는 미국인들이 실제로 겪은 자국 의료제도의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 한 노동자는 손가락 두 개가 잘렸지만 보험에 들지 못해 손가락 하나만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의료보험 미가입 인구는 약 5000만명으로 비용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라고 해서 치료비 부담없이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험회사는 헬스케어기업(제약회사·의료기기회사 등), 정치인, 의사와 유착해 보험금 지불을 거부 또는 축소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식코에는 9·11테러 사건 때 구출된 부상자가 공무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후유증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사례도 다뤄진다. 마이클 무어 영화감독은 이 환자를 공적 의료보험제도가 발달된 쿠바로 데려간다. 감독은 쿠바 의사에게 “이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되는 만큼만 치료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의사는 “쿠바에서는 의료비가 모두 무료”라며 이들을 안심시키고 진료를 시작한다.
경제적으로 미국보다 훨씬 열악한 쿠바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식코가 의료민영화로 황폐해진 미국 의료제도를 고발하는 영화였다면, 책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는 저자 요시다 다로가 현장 취재한 쿠바의 모범적인 의료제도를 생생하게 소개해준다.
저자 요시다 씨는 “쿠바를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국민 1인당 소득수준과 신생아사망률이 정확하게 비례한다”며 “쿠바만이 금전적인 부에 의해 의료수준이 결정되는 슬픈 숙명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
쿠바 의과대학은 의학지식 교육만큼이나 인격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따뜻한 인술을 바탕으로 하는 쿠바의 의료수준은 해외에도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스타 마라도나가 약물중독을 치료받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는 등 2007년까지 외부인 2만2000여명이 치료를 목적으로 쿠바를 찾았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피해아동들도 이 곳에서 질 높은 치료를 받은 후 웃음을 되찾았다.
저자는 체계적으로 갖춰진 쿠바의 지역예방 의료시스템을 소개한다. 쿠바 정부는 환자와 밀착한 가정의 제도, 도시가 아니라 농촌을 우선한 1차진료 시스템, 감염예방에 제 몫을 다하는 지역사회 진료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쿠바 정부는 의약품·의료기기 연구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국민보건 향상과 수익창출을 동시에 도모하고 있다. 쿠바 연구진이 자력으로 개발한 세계 최초의 B형 수막구균 백신을 포함한 다양한 백신, 인터페론, 에이즈치료제 등은 진료현장에서 관련 질환 치료제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일부 의약품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유럽 및 주변국가 등으로 수출돼왔다.
미국의 압박외교로 의약품·의료기기 수출 및 수입이 어려워지는 등 경제적 고립이 심해진 쿠바는 약초·자연건강식·기공·요가 등 대체의학을 적절히 활용해 치료비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IT기반으로 의료정보체계를 구축해 종이 부족 문제를 해결했으며, 군사비를 줄이는 대신 의료복지비를 증액하기도 했다.
또 정부 차원에서 ‘국경 없는 의사단’을 조직해 이념과 상관없이 세계 의료봉사 활동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2005년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당시 1500명의 자국 의사를 파견했다. 미국은 쿠바의 호의를 거절했으나, 쿠바는 이 의료봉사단을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인원을 더 늘렸다. 2005년 사상자 약 20만명이 발생한 파키스탄 대지진 때도 900명의 쿠바 의사가 현장을 누볐다.
이 책의 서평을 쓴 고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쿠바가 미국의 가혹한 경제제재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며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천하고, 의학과 과학기술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인도적 의료원조 활동에 나섰다는 게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의료선진국이라 불리는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한 사람의 생명은 가장 부자인 사람이 가진 전 재산보다 100만배 더 가치있다”며 “축재할 수 있는 황금보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인민들이 갖는 감사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의료민영화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