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그림형제가 쓴 동화 ‘백설공주’에는 주인공인 공주가 마녀의 음모에 빠져 사과를 먹고 정신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마녀가 사과에 독을 넣어 기절했겠지만 멀쩡한 사과를 먹고 쓰러졌더라도 이는 허무맹랑한 장면이 아니다. 사과씨에 약간의 독성물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과씨에는 ‘시안화물’(청산가리, cyanide) 계통인 ‘아미그달린’(amygdalin)이 함유돼 있다. 아미그달린이 인체에 흡수되면 경련, 호흡곤란, 의식마비 등을 일으킬 수 있다. 아미그달린은 위 속으로 들어가 소화효소 등에 의해 분해됐다가 수소와 만나면 기체 형태의 시안화물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사과 1~2개 속 씨앗을 모두 먹어도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시안화물이 생명을 위협하려면 사과씨를 최소 반 컵 분량 정도 먹어야 한다. 게다가 사과씨 속 아미그달린이 체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씨를 씹어먹을 때 이야기다. 실질적으로 사과씨를 먹고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혹시나 꺼림칙하다면 사과씨를 씹지 말고 제거한 뒤 과육만 먹는 게 좋다.
사과씨 외에 과일 씨앗 중에는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물질을 함유한 게 많다. 매실, 살구, 포도 등이 대표적이다. 요즘 한창 수확 준비를 마친 매실에는 사과와 마찬가지로 아미그달린이 들어 있다. 주로 씨앗에 농축돼 있지만 덜 익은 것은 과육에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익지 않은 풋매실은 되도록 먹지 않는 게 좋다.
예부터 서양에선 살구씨를 먹으면 암이 치료된다는 민간요법이 전해져 내려왔다. 아미그달린을 이용한 항암요법 ‘레트릴’이 암세포 사멸효과가 뛰어나고 부작용이 적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때 암환자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아미그달린은 체내에서 시안화물로 바뀌기도 하지만 거꾸로 체내에서 암세포를 죽이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각국에서는 아미그달린으로 인한 효과보다 부작용이 크다며 섭취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독일 식품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독일연방위해평가원(BfR)은 최근 “인터넷 상에서 암 예방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살구씨를 과다 섭취할 경우 건강에 위험할 수 있다”며 “살구씨를 먹으면 심각한 중독 증상을 보일 수 있고 심할 경우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하루 두 개 이상의 살구씨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포도씨에는 불포화지방산, 폴리페놀 등이 풍부하다. 특히 폴리페놀은 성인병을 예방하고 노화를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포도씨에는 소화저해제 ‘엔자임 인히비터’(enzyme inhibitor)가 다른 과일에 비해 많이 들어있어 평소 소화가 안돼 고생인 사람에게는 복통과 설사를 유발할 수 있다. 이같은 이유로 포도씨 자체를 먹는 것보다 포도씨의 유효성분만 추출한 포도씨유를 섭취하는 게 좋다.
대부분 사람들은 매실이나 살구는 과육만 먹고 씨앗을 버리기 때문에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씨앗이 몸에 좋다는 정보만 믿고 과다 섭취할 경우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어린이들은 씨앗의 알맹이가 터져 나온 것을 무심코 먹을 가능성이 있어 보호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과일 씨앗 중에서는 먹어도 몸에 해롭지 않은 것도 존재한다. 참외씨, 수박씨, 호박씨 등에는 몸에 이로운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오히려 건강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
한방에서는 참외씨를 약으로 사용한다. 참외는 성질이 찬 과일로 평소 몸에 열이 많고 혈압이 높은 사람이 먹으면 좋다. 민간에서는 뱃 속 뭉쳐진 덩어리를 풀어주고 피고름을 없애는 약재로 참외씨를 사용하기도 했다. 참외씨에는 칼륨, 인 등 미네랄이 풍부하고 섬유질이 많아 변비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참외씨를 먹고 배탈이 나는 것은 과도하게 숙성된 참외씨를 먹었기 때문이다.
수박씨도 먹으면 좋은 씨앗이다. 불포화지방산의 일종인 ‘리놀렌산’(linolenic acid)이 풍부하다. 이 성분은 혈액 내 콜레스테롤의 침착을 감소시키며 혈관의 노화를 방지하고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효능을 갖고 있다. 체지방 축적을 막아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수박씨가 먹기 힘들다면 씨를 말린 뒤 마른 팬에 넣고 볶은 뒤 선식이나 미숫가루를 만들 때 함께 빻아 넣으면 된다. 볶아 차로 마셔도 좋다.
호박씨는 서양 남성들이 정력강화를 위해 먹는 건강식 중 하나다. 불가리아, 터키, 우크라이나 등에서는 전립선비대증 치료를 위해 매일 한 줌 씩 호박씨를 까 입에 넣는 남자가 꽤 많다. 호박씨에는 전립선 크기를 줄이는 아연이 약 8㎎ 함유돼 있다. 전립선 건강에 좋은 알라닌, 글리신, 글루탐산 등 아미노산도 들어있다. 하루에 호박씨 반 컵을 먹으면 아미노산 하루 권장량의 최대 20배까지 충당할 수 있다.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도와주는 마그네슘도 포함돼있다.
한방에서는 호박씨는 ‘남과인(南瓜仁)’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성질이 따뜻해 자양, 강장 등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여름과 가을사이에 호박씨를 채취에 껍질에 붙은 얇은 속을 제거한 뒤 햇볕에 말려 먹으면 치질, 당뇨병 등 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