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중인 은행원 최모 씨(32·여)는 최근 절친한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요즘 우울해보인다는 말에 ‘아이가 있는 게 가끔은 힘이 든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단번에 비난섞인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미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데다 자신도 과거에 비슷한 말을 했던 친구라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되돌아온 말은 ‘너무 유난떠는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최 씨는 최근 ‘그래도 엄마잖아’라는 말이 너무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있다.
여자의 인생에서 큰 변화를 줄 수밖에 없는 사건은 단연 임신·출산이다. 이와 맞물려 급격한 심리적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임산부들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변화를 한꺼번에 겪으면서 굉장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주변의 격려와 세심한 배려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오히려 ‘엄마니까 견디라’는 같은 말들은 스트레스를 배가시키기 마련이다. 워킹맘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지 약 20년이 넘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육아는 엄마의 몫이고, 모성을 지나칠 정도로 신성시하는 탓에 엄마들은 힘든 처지를 호소할 수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우울감은 ‘내가 엄마로서 자격이 없나’라는 죄책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우울증에 더욱 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산후우울증을 유발하는 큰 원인은 ‘변화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다. 분만으로 인한 심신의 소모와 회음절개·제왕절개 등 수술로 인한 통증은 물론 임신·출산·육아에 대한 공포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대체로 처음 임신을 경험한 예비맘들이 이러한 우울감에 빠지기 쉽다.
홍나래 한림대 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흔히 아이를 낳고 나면 주변에서 많이 축하해줘 출산을 즐거운 일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정작 아이를 낳은 산모에겐 반드시 그렇게 다가오지는 않는다”며 “아직까지 엄마가 모든 육아를 책임져야 한다는 편견에 따른 ‘독박육아’ 등으로 인한 갈등, 신생아 수유로 인한 수면부족, 몸매변화에 대한 스트레스 등이 더해져 고통받기 쉽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얼마 전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응답자들이 산후우울증의 원인으로 ‘아이 양육이 어려워서’를 가장 많이 꼽은 바 있다. 이밖에 ‘남편의 늦은 귀가와 무관심’, ‘매일 집에 있는 답답함’ 등이 주요인으로 알려졌다.
출산 후 모든 것이 아이 위주로 돌아가면서 ‘나는 도대체 누구지?’라는 의구심도 들게 되는데, 이런 자아 정체성의 스트레스도 무시할 수 없다. 출산 전엔 ‘나’라는 존재가 명확했던 반면 임신 후에는 ‘누군가의 엄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출산 전 행해지는 ‘베이비 샤워’ 선물만 해도 그렇다. 유모차, 젖병, 모빌 등 신생아용품이 대부분이고 정작 엄마를 위한 선물은 없다.
출산 후에 겪게 되는 우울증은 증상에 따라 ‘산후우울감’과 ‘산후우울증’으로 나뉜다. 산후우울감은 아이를 낳은 후 쉽게 짜증이 나거나 모든 일에 의욕이 없는, 말 그대로 일시적인 우울 증상이다.
하지만 정도가 심해지며 갑자기 식욕이 떨어지거나 증가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불안감이 커지는 증상이 나타나면 산후우울증으로 진행될 수 있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출산 이후 2주 이상, 하루 종일 특별한 이유 없이 기분이 우울하고 출산 이전에 좋아하던 일에 흥미가 없어지는 증상이 생겼다면 병원을 찾아 상담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평소 생리전증후군이 심하거나, 피임약 복용 시 기분 변동이 심하거나, 남편이나 시댁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경우에도 치료를 고려해봐야 한다. 이밖에 임신 기간 중 자주 우울하고 불안했거나,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이 많은 경우에도 산후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국내서는 산후우울증이 방치되는 측면이 크다. 최근 인구보건협회가 전국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산모 가운데 무려 90%가 아이를 낳은 후 우울증을 느꼈다고 응답했다. 응답자 3명 중 1명은 자살 충동까지 느꼈으며, ‘아이를 거칠게 다루거나 때린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무려 절반에 달했다.
이를 방치하면 자칫 아동 학대나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수 있음에도 실제 치료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소수다. 대한정신건강재단이 지난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토대로 산후우울증의 유병률을 조사한 결과 전체 산모 중 출산 전후 1년간 우울증 치료를 받은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치료율 10~12%)과 비교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데다가 전국정신건강실태조사에도 산후우울증은 포함되지 않아 현재로선 유병률 파악조차 어렵다.
미국의 경우 출산 직후의 여성은 반드시 우울증 검사를 받도록 하고 있고, 연간 50만명 정도가 산후우울증으로 병원을 찾고 있다. 이에 비해 국내는 방치되고 있는 수준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올해 정신건강실태조사에 산후우울증을 포함시키는 방안이 복지부 출산정책과를 통해 논의되고 있는 점이다.
‘아이가 잘못되면 무조건 내 책임’이라는 생각은 아이와 엄마를 망치기 쉽다. ‘아이는 꼭 엄마가 돌봐야 한다’거나, ‘엄마니까 혼자서도 육아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육아 스트레스를 부른다. 이른바 ‘착한여자 콤플렉스’부터 버려야 우울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이제는 아빠들도 육아를 ‘남의 일’이 아닌 부부 공동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홍나래 교수는 “산후우울증을 예방하거나 개선하려면 남편이 아내가 커피 한 잔의 여유라도 누릴 수 있도록 육아와 가사를 분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편은 가끔 데이트와 산책을 즐기는 등 아내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해야 한다”며 “아내가 너무 육아에만 집착하지 않도록 아이와의 분리 연습을 시켜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산후우울증은 증상을 계속 방치할 경우 산모 자신은 물론이고, 자녀의 발달과 가족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여러 아동학대 사건들의 원인으로 산후우울증이 자주 등장한다. 아동학대 살인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10명 중 4명은 친엄마였고 살해 이유 중 세 번째로 많은 게 산후우울증이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산후우울증이 안타까운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이를 낳은 후 산모가 계속 ‘우울하다’고 호소하거나 평소와 다른 기분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가족들이 시그널을 알아챌 수 있도록 곁에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는 게 핵심이다.
대한정신건강재단 대외협력위원장을 맡고 있는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미국·영국 등 해외에서는 산후우울증에 대한 선별과 치료지원, 사회적 지원을 법제화하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관련법이 개정돼 유병률 조사·치료·인식개선 등이 이뤄지고, 장기적으로는 직접적인 치료지원과 사후관리를 담당할 산후우울증 지원기관이 설립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는 산모는 육아가 중요한 시기라 의료기관과 복지서비스의 접근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며 “해외에서는 산후우울증을 관리할 곳으로 환자가 집 또는 병원을 선택하게 배려해주는 만큼 한국도 방문서비스가 등 다각적인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