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임산부와 영유아 등 146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살균제 사망 사건에서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영국계 다국적기업 ‘옥시레킷벤키저(옥시)’가 보고서 조작 및 게시판 글 삭제를 통해 살균제의 유해성을 은폐하고, 책임 회피를 위해 법인을 고의로 청산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검찰은 옥시 측이 서울대와 호서대에 의뢰해 제출한 유해성 반박실험의 조건 자체가 회사에 유리하도록 설정된 사실을 파악하고 실험 과정 및 결과의 왜곡 여부를 수사 중이다. 검찰에 따르면 옥시는 연구팀에 실험을 의뢰하면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다양한 조건을 제시하는 동시에 연구용역비 2억여원을 지원했고, 연구팀은 요구에 맞춰 실험을 진행해 살균제의 흡입독성 데이터를 뽑아냈다. 보고서 조작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옥시는 물론 대학교수 연구팀도 형사처벌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은 또 지난 2월 옥시를 압수 수색해 확보한 사내 전산망 서버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상품후기 및 문의게시판에 올라온 상품 부작용 호소 게시글 수백 건이 삭제된 사실을 파악했다. 지워진 글은 가슴통증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내용이 많았다. 검찰은 옥시 등 제조업체들이 살균제 첨가물질이 인체에 해로운지 알면서도 이를 은폐하기 위해 게시판 글을 지웠는지 수사 중이다.
옥시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민·형사상 책임을 피하기 위해 기존 법인을 청산하고 새 법인을 설립하는 편법을 쓴 정황도 포착됐다. 지난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옥시는 2011년 12월 12일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조직변경을 실시했다. 당시는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살균제의 흡입 독성 중간 실험결과를 발표하고 관련 제품의 수거 조치를 내리는 등 상황이 회사에 불리하게 돌아가던 시기였다.
형사소송법 제328조는 피고인이 사망하거나 피고인인 법인이 존속하지 않을 경우 공소기각 결정을 하도록 규정한다. 대법원도 2005년 이 조항에 근거해 조직 변경으로 기존 법인이 소멸했을 때 양벌규정에 따른 형사책임이 존속 법인에 승계되지 않는다는 판례를 남겼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조직 변경은 가습기살균제 사망 사건의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편법’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2011년 4월 임산부 4명이 원인 미상의 폐 손상으로 숨지면서 불거졌다. 같은 해 8월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살균제 속 유해물질이 피해자들에게 폐 손상 등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역학조사 결과를 내놨고, 보건 당국은 해당 제품에 수거 명령을 내렸다. 피해자가 하나둘 늘면서 민·형사 고발이 이어졌지만 제조업체들은 “살균제가 피해를 입혔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반발, 사건 수사는 4년이 넘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중 검찰은 지난 1월부터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조사해 ‘폐 손상과 살균제 사이 인과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찰에 따르면 시중에 유통된 가습기살균제 10여개 제품 중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옥시레킷벤키저) △와이즐렉가습기 살균제(롯데마트 PB) △홈플러스가습기 청정제(홈플러스 PB) △세퓨가습기 살균제(버터플라이이펙트) 등 4개 제품이 폐 손상과 직접 관련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옥시의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은 사망자146명 중 가장 많은 103명(70%)이 사용한 제품이다.
이들 제품은 모두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인산염’ 또는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Oligo (2-)ethoxy ethoxyethyl guanidine chloride, PGH)’ 성분이 함유돼 있다. 두 물질은 피부독성이 다른 살균제보다 5분의 1~10분의 1 정도로 낮고 물에 잘 녹아 샴푸나 물티슈 등 여러 제품에 사용된다. 하지만 호흡기로 흡입될 때 발생하는 독성에 대해서는 확실한 연구결과가 없어 피해자가 발생할 때까지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
관련 연구를 주도하고 있는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피해자의 80.3%가 PHMG 성분, 16.2%는 PGH 성분의 살균제로 인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며 “1주일 내내 또는 하루에 11시간 이상 가습기를 사용한 사람에서 폐손상 발생 위험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장기간 사용한 사람보다는 단기간이라도 집중적으로 쓴 사람의 피해가 컸다”며 “가습기살균제에 처음 노출된 시기가 4세 이전이거나, 살균제의 공기 중 농도가 1㎥당 800㎍ 이상일 때 사망에 이른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미세한 입자 크기의 살균제 독성물질이 가습기 물 분자에 달라붙은 상태로 기도에 들어가면 기관과 세기관지가 손상되고 주변 폐조직에 염증이 생긴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처음엔 특이 증상이 없다가 갑작스럽게 폐가 딱딱하게 굳는 폐섬유화가 진행되면서 심한 호흡곤란을 호소했다. 이는 전형적인 간질성 폐질환과 다른 양상이다.
특히 소아 환자의 피해가 컸다. 홍수종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간질성 폐질환으로 입원한 소아환자 중 60%가 사망했다”며 “중증폐질환이나 급성호흡부전증으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는 환자의 사망률이 약 25%인 것을 고려하면 가습기살균제 관련 소아환자의 사망률은 매우 높은 수치”라고 설명했다.
가습기살균제는 1997년 국내에 처음 출시돼 2011년 사실상 판매가 중단되기까지 20여종 제품이 연간 약 60만개(20억원) 판매됐다.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14년간 전국 가정에서 약 840만개가 사용된 셈이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옥시레킷벤키저는 영국에 본사를 둔 레킷벤키저가 2001년 동양화학의 계열사이던 옥시의 생활용품 사업부를 인수해 설립했다. 2011년 11월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이 판매중단 및 수거 조치될 때까지 10년간 가습기살균제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했다.
세탁세제인 ‘파워크린’과 항균제 ‘데톨’, 제모제 ‘비트’, 변기세정제 ‘이지오프뱅’, 위산식도역류 치료제 ‘개비스콘’, 빨아먹는 인후염치료제 ‘스트렙실’, 콘돔 ‘듀렉스’, 방향제 ‘에어윅’ 등 세제·방향제·위생용품·일반의약품 등 다수의 히트상품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