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서울 명문대 대학원에 다니던 남학생이 동성 선배에게 1년간 신체 일부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을 당했다며 온라인상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시도해 충격을 줬다. 가해자는 보호관찰소 교육을 받고 연구실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피해 학생은 가해자가 학교로 복귀한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이 목숨은 건졌다.
대기업 하청업체에 다니는 40대 이모 씨는 부하직원인 A모 씨(26)가 일을 마친 뒤 보고하지 않는다며 성기 부분을 꼬집는 등 5차례에 걸쳐 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수원지방법원은 이 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강의 40시간 수강을 명령했다.
지난 2월에는 20대 남성이 찜질방 등에서 자고 있는 다른 남성의 성기를 만진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그는 성적 충동을 느껴 저지른 일이라며 자신의 범행을 시인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성폭력 사건에서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인 경우가 주를 이뤘지만 최근엔 남성이 성폭력 피해를 당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2011년 740여명이었던 성폭력 피해 남성 수는 지난해 1060여명으로 늘었다.
또 지난 17일 발표된 서유정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부연구위원의 ‘직장 성희롱 및 폭력 분석’ 연구에 따르면 근로자 6027명(남성 3159명·여성 2835명) 중 남성 근로자의 22%가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여성 근로자의 피해 응답률 15.9%보다 더 높은 수치다.
업종별로는 서비스업 종사자의 29.1%가 성희롱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해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이어 보건·사회복지(18.9%), 금융·보험(16.0%), 건설업(14.5%), 공공행정·공무(14.0%), 제조업(11.2%) 순이었다.
남성 근로자는 서비스업(35%)의 성희롱 피해 응답률이 높았으며, 여성 근로자는 보건·사회복지(21.3%) 분야에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남성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더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남성이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소연하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아냥을 듣기 쉽다. 성폭력 가해자가 직장상사인 경우 경제적인 부분과 연결돼 신고하기가 더욱 어려우며 상담센터 등에 문의해보는 게 전부다. 하지만 남성도 성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회적인 인식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남성을 상대로 한 성폭력 가해자는 남성과 여성으로 나뉜다. 여성 상사가 남성 부하직원을 성희롱하는 일은 남성간 성희롱에 비해 아직 적은 편이지만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다. ‘영국사회심리학저널(British journal of social psychology)’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마초적인 직장환경에서 일하는 여성 상사는 남성의 계급문화를 답습하는 경향을 보인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환경에 있는 여성 상사일수록 남성 직원을 성희롱 피해자로 만들기 쉽다.
남성간 성희롱은 권력관계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질투와 콤플렉스에 의해 유발되는 여성간 성희롱과 차이난다. 남성의 경우 권력관계를 이용해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만 허용되는 성적 농담이나 행위를 강요한다. 여기엔 권력의 위세를 이용해 상대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는 권력콤플렉스가 깔려 있다. 남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성희롱은 동성애처럼 직접적인 성적 만족을 취하려는 것보다 권력관계를 명확하게 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남성이 남성에게 가하는 성희롱이나 성폭력은 감옥, 수용소 등 사회와 격리된 공간에서 발생하기 쉽다. 1971년 영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의 ‘감옥실험’ 결과, 임의로 교도관 역할을 맡은 피험자가 수형자 역할을 한 피험자에게 다양한 형태의 성희롱을 가했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피험자는 이런 행동이 질서를 지키고 권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진술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 미군이 이라크 포로에 성적 학대를 저지르기도 했다.
동성간에는 여성간 성희롱보다, 남성간 성희롱이 대체로 많은 편이다. 이수정 교수는 “남성이 남성을 성희롱할 경우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세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피해자를 여성에 비견함으로써 여성을 폄하하는 행동을 동시에 보인다”고 지적했다.
주로 여성스러운 성향의 남성을 상대로 보수적이고 마초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강요하기 위해 성희롱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동성이나 이성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하면 무력감, 절망감, 수치감으로 인한 우울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처음에는 불면에 시달리게 되고 회사에 가려고만 해도 가슴이 뛰면서 어지러운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육기환 분당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남성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나 불안감은 여자가 겪었을 때와 다르지 않다”며 “부끄러움, 수치심, 불안, 분노감을 경험하게 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우울증, 대인관계 변화 등이 동반된다”고 말했다.
남자가 피해자인 성폭력의 경우 문제가 밖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분위기와 구체적인 조직내 해결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수정 교수는 “남성 성폭력 피해자들은 동성이나 여자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생각해 신고하지 않는다”며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 남성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하더라도 주변에서부터는 남성이 먼저 건드렸을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성폭력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문제, 사회 전반의 문제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