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국내에 처음 소개된 쌀국수는 한국 외식산업에 정착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쌀국수가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로 퍼진 것은 베트남 전쟁이 계기가 됐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전역이 공산화되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남베트남 국민들이 여러 나라로 진출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쌀국수는 서양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지금은 세계적은 음식이 됐다.
베트남은 풍부한 수량을 갖춘 강이 곳곳에 흘러 논농사를 짓기에 최상의 환경을 갖췄다. 전국민의 7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대표적인 농업국가로 쌀은 연간 최대 3모작까지 가능하다. 베트남의 쌀 생산량은 전체 농업 생산량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같은 환경 덕분에 예부터 베트남에서는 쌀을 이용한 음식이 발달해 왔다.
베트남 쌀국수는 19세기 말 방직공업이 번성했던 남딘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고깃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던 게 시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쌀국수 발전에 기여한 것은 프랑스의 역할이 크다. 일부에서는 쌀국수가 프랑스 야채수프인 ‘뽀오페(Pot au feu)’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뽀오페가 베트남에 소개되면서 베트남 사정에 맞게 변형됐다는 설이다. 쌀국수는 소 살코기와 뼈로 육수를 낸 것을 기본으로 삼아 조리된다. 과거 베트남에서는 소를 신성시해 식용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면서 소를 이용한 음식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베트남 쌀국수는 소고기에 계피, 향료 등을 넣고 소고기 편육을 얹은 ‘퍼보(Pho bo)’와 닭고기를 고와 만든 ‘퍼가(Pho ga)’ 등으로 나뉜다. 베트남 내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쌀국수가 존재하지만 국내를 비롯한 해외에서는 소고기를 이용한 퍼보가 대중적이다.
퍼보는 기본적으로 소고기, 양파, 생강 등을 넣고 끓인 육수에 숙주나물·고수 등을 얹은 뒤 라임즙을 짜 넣어 만든다. 각 지역의 특색이나 넣는 재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일부 지역에서는 족발, 연골, 선지 등을 넣기도 하고 민트나 바질과 같은 향료도 첨가한다. 면은 납작하며 단면은 직사각형에 가깝다. 다른 면에 비해 부드럽고 잘 넘어간다.
쌀국수 맛의 핵심은 육수다. 소고기의 어떤 부위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대체로 베트남 남부 사람들은 달고 기름진 육수를 선호하고, 북부 사람들은 담백한 맛을 즐긴다. 국물이 시원해 아침 해장식으로도 적합하다.
쌀국수는 베트남 전통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즐겨 먹는다. 동남아시아는 밀이 풍부한 동북아시아와 달리 열대지역의 특성상 쌀(인디카, 안남미)을 재배해 이를 이용한 음식이 발달해 왔다. 여기에 동남아시아 특유의 기후 탓에 독특한 향신료를 첨가해 자신들만의 국수문화를 만들어 냈다.
태국도 베트남 못지 않게 쌀국수를 즐겨 먹는다. 밥을 주식으로 하는 태국에서는 쌀가루를 이용한 면요리도 발달해 왔다. 베트남 쌀국수와 태국 쌀국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육수다. 태국 쌀국수는 전세계 음식문화가 섞여 다양한 향신료로 독특한 향을 낸다. 이같은 이유로 태국 쌀국수는 베트남 것에 비해 자극적이고 향미가 진하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쌀국수는 대부분 베트남식이다. 베트남 요리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달리 상대적으로 기름을 덜 쓰고 진한 소스를 사용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국내 베트남 쌀국수 전문점 상호를 들여다보면 ‘pho’란 단어는 쌀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포’라고 발음되지만 ‘퍼’가 정확한 베트남어 발음이다.
쌀국수에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는 미나리과 일년초인 ‘고수’(학명 Coriandrum sativum)이다. 서양에서는 ‘코리앤더’(coriander), ‘실란트로’(cilantro, 중국파슬리)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향채(香菜)라 불리며 열매는 구풍제, 잎은 채소나 향료로 쓴다. 중국요리인 오향장육에 곁들이로 나와 고기의 누린내를 제거해 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중해에서 들여온 실란트를 절에 심어 모기를 쫓거나 채소로 먹을 용도로 길렀다.
고수 이파리와 열매는 소화액 분비를 촉진하고 위장 및 복부 가스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는 알칼로이드 성분이 함유돼 있다. 술을 먹은 뒤 속이 쓰릴 때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면 속이 편해지는 것도 알칼로이드 덕분이다.
고수열매 속 휘발성 기름인 리날울(linalool)과 코리안돌(coriandol)은 얼얼하고 매운 향을 가진 게 특징이다. 쌀국수 고유의 향을 내는 것도 리날울이 담당한다.
열매는 알맹이 째 피클을 담그는 데 이용하고, 분말은 카레가루와 섞어 닭고기요리에 첨가했다. 영국사탕 등 과자, 케이크, 쿠키, 소시지 등 육가공품 등을 만들 때 향을 내기 위해 분말을 투여한다. 다만 가루로 된 것은 향이 빨리 날아가기 때문에 씨앗을 구입해 밀폐용기에 담아 건냉한 데 보관하는 게 좋다. 쓰기 전에 살짝 볶으면 특유의 나쁜 냄새가 사라지고 더 좋은 향이 난다. 실란트로 씨를 씹으면 구취를 없앨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