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이 패혈증 및 급성심부전으로 별세했다. 경남 거제시에서 태어난 그는 멸치잡이 사업을 크게 하던 선친 김홍조 옹의 물질적·정신적 지원으로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 김 옹은 매년 명절 때마다 어획한 멸치 수만 포를 선물용으로 올려 보냈다. 정치권 인사 중 ‘김영삼 멸치’를 받지 못한 사람은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멸치는 크기도 작고 맛도 뛰어나지 않은 별볼일 없는 생선이었지만 대통령을 만든 ‘킹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멸치는 멸, 며르치, 멸따구 등으로도 부른다. 제주도 사람들은 멸치가 이리저리 잘 헤어쳐 다닌다는 뜻에서 ‘행어(行魚)’라 일컫는다. 봄과 여름에 서해와 동해에서 살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남해안을 거쳐 제주도까지 내려간다. 이 때 멸치를 먹이로 하는 갈치, 고등어, 돔, 농어 등이 멸치의 뒤를 따른다.
외국에서는 멸치를 앤초비(anchovy)라 칭한다. 한국 연근해에서 잡히는 멸치는 태평양산으로 ‘퍼시픽 앤초비(Pacific anchovy)’다. 남미산은 ‘안초베타(anchoveta)’, 유럽산은 ‘아치우가(acciuga)’다. 일본에서는 아래턱이 위턱에 비해 작아 턱이 한쪽에 치우쳤다는 뜻에는 ‘가다구치이와시(カタクチイワシ)’로 칭한다. 중국에서는 ‘티위’로 부른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는 물 밖으로 나오는 급한 성질로 인해 금방 죽는다며 업신여길 ‘멸(蔑)’ 자를 써 ‘멸어(蔑魚)’라 적었다. 일부에서는 물고기의 대표란 의미로 물의 고어인 ‘미리’가 며리, 멸 등으로 음운 변화했고 물고기를 뜻하는 접미사인 치와 더해져 멸치가 됐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말려서 유통된다. 볶아 먹거나 국물을 우려내는데 주로 사용한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생멸치를 보기 힘들다. 서양에서는 뼈를 발라낸 게 통조림으로 팔린다. 마른 멸치를 이용해 국물을 내는 것은 일제강점기 전후부터 시작됐다. 과거에는 오로지 멸치를 염장해 젓갈로만 먹었다.
멸치는 2만여 종이 넘는 물고기 세계에서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작은 플랑크톤에게는 무서운 폭식자로, 큰 물고기에는 맛있는 먹이로 바닷 속을 누빈다. 해양생태계 먹이사슬에서 중간자 구실을 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멸치는 일반적으로 봄과 여름에 4000~5000개 알을 낳는다. 수온은 17~27도, 30 psu(바닷물 1㎏에 녹아있는 물질의 질량(g)을 나타내는 단위) 이상의 염분을 만족해야 산란한다. 산란 후 1~2일 지나면 부화하는데 이른 봄에 태어난 멸치는 봄이 지나기 전에 성인 멸치만큼 빠르게 자란다. 험한 세상에서 일찍 성숙하고 알을 많이 낳으면서 대가족을 유지하며 산다.
멸치는 크기에 따라 대멸, 중멸, 소멸, 자멸, 세멸 등으로 나뉜다.
대멸은 7.7㎝ 이상으로 가을에 태어나 이듬해 봄이면 다 자란다. 회, 구이, 찌개 등으로 이용된다. 3~5월의 것이 통통하고 육질이 부드러워 많은 요리에 쓰인다.
중멸은 4.6~7.6㎝로 육수용으로 적절하다. 멸치는 크기가 클수록 내장에 붙어있는 쓸개로 인해 맛이 쓰다. 볶음용으로 쓸 수 있고 그냥 먹어도 좋다. 쓰임새가 많은 덕분에 가격도 가장 비싸다.
소멸은 3.1~4.5㎝로 볶음용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술안주로 고추장에 찍어 먹기 적절하다.
자멸은 1.6~3㎝로 한여름에 주로 잡히며 아이들이 먹기 좋은 크기로 간식용으로도 사용하기 좋다.
세멸은 1.5㎝ 이하로 초여름에 갓 부화한 것으로 볶음용, 비빔밥, 이유식용으로 주로 이용한다.
이관형 전남 여수 기선선인망협회 상무는 “건조가 덜 되거나 신선하지 않은 멸치는 배가 터지기 쉽다”며 “바싹 말린 멸치는 가루가 많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7월부터 시작된 멸치 어획량이 평년에 비해 30% 수준밖에 되지 않지만 가격은 평년 수준”이라며 “올해는 중멸의 품질이 좋다”고 덧붙였다. 공급이 줄었지만 수요도 같이 감소하면서 가격에 큰 변동이 없는 셈이다.
멸치는 권현망, 유자망, 안강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 등 30여개의 방법으로 어획한다. 이 중 전체 멸치의 50~60% 이상을 권현망으로 잡는다. 권현망 어업은 남해안 먼바다에서 이뤄진다. 멸치를 잡는 즉시 선상에서 삶아 말리고 이를 육지로 운반한다. 권현망은 멸두리, 오개도리 등 속칭으로 불린다. 여러배가 선단을 이루는 기업형 어업 형태로 일본인에 의해 개발됐다. 풍어를 상징하는 일본 바다 수호신인 권현신(權現神)에서 이름을 따왔다.
죽방렴(竹防簾)은 국내에서 주로 사용한 멸치 어획법이다. 죽방렴으로 멸치를 잡으려면 먼저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썰물 때 수심이 얕은 바닷 속에 삼각살로 부르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박는다. 삼각살은 한 변의 길이가 수십m에 이르는데 이를 둥그렇게 박은 뒤 대나무로 촘촘하게 발(簾)을 쳐 함정장치인 불통을 만든다. 불통과 살 사이에는 문짝이 달려있다. 문짝은 밀물 때 조류의 힘으로 열렸다가 썰물 때 꽉 닫힌다. 이같은 장치로 인해 불통 안으로 들어온 물고기는 다시 빠져나갈 수 없다. 죽방렴 멸치는 비늘이 벗겨지지도 않고 상처도 없어 그물로 잡은 것보다 몇 배 비싸게 팔린다.
멸치의 나이는 비늘을 보고 추측하지만, 비늘이 없는 것은 이석(耳石, otolith, 귓 속에 들어 있는 돌)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석은 칼슘과 단백질이 주성분으로 이뤄져 몸의 균형을 감지하는 평형기관 구실을 한다. 이석을 쪼개거나 갈아 단면을 살펴보면 일일 생장선(일륜, 日輪)을 찾아낼 수 있다. 나이가 몇살인지 심지어 몇월 몇일에 태어났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즉 멸치 속 블랙박스 역할을 하는 것이다.
멸치는 같은 양의 생선보다 열량과 지방이 적고 칼슘(100g 당 109㎎)이 풍부해 다이어트시 무기질 보충에 도움이 된다. 골다공증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며, 성장기 아이들 발육에도 효과적이다. 멸치는 풋고추와 궁합이 맞다. 멸치의 지방 성분은 풋고추에 함유된 베타카로틴 흡수를 높인다. 풋고추에는 멸치에 함유되지 않은 비타민C가 들어 있어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는 생리작용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