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대화 주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A형은 소심하고, AB형은 사이코 아니면 천재’라는 등 혈액형별 성격이나 기질, 특징 등에 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다. 혈액형이 한 사람의 성격을 결정한다는 이론에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인체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혈액인 만큼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혈액형이 의학적으로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해외를 중심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그동안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던 신종 돌연변이 혈액형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혈액형별로 기질이나 성격이 다르듯 자주 걸리는 질병도 조금씩 차이난다. 하지만 혈액형과 질병과 연관성은 축적된 임상근거가 부족하고 국내보다는 해외 학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주로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어떤 혈액형에서 어떤 질병이 자주 발생하는지 명확한 해답을 구하기가 어렵다. 다만 혈액형별 기질과 해외 연구결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혈액형별로 발생률 높은 질환에 대해 추측할 뿐이다.
국내의 경우 지난해 박경운 분당서울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정부의 정책연구용역사업을 통해 혈액형별 자주 발생하는 질환에 대해 분석했다. 해당 질병 치료 과정에서 어떤 혈액형을 수혈했는지 파악해 질병과 혈액형간 연관성을 파악했다.
이 연구에서 A형은 빈혈, 자궁경부 악성신생물, 간암 등의 발병률이 높았다. O형은 위장출혈, B형은 척추전방전위증, AB형은 대퇴골 경부 골절 등이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단순히 혈액형이 발생률을 높인다고는 단정짓기 어렵다. 박경운 교수도 “질병의 발병에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떤 질병은 어떤 혈액형이 많다’고 일반화하기에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밖에 여러 해외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혈액형별로 어떤 질환에 잘 걸리는지 대략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성격이 예민하다고 알려진 A형은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해 신경성 위염, 대장암, 위암 등의 발병률이 높다. 이 때문에 흡연이나 음주를 줄이고 비스테로이드성소염진통제 등을 함부로 먹어선 안 된다.
반면 감기 등 유행성 질병이나 감염에는 내성이 강한 편이며 백혈병이나 혈액암도 잘 걸리지 않는다.
성격이 활달하고 욱할 때가 많은 O형은 위산이 자주 분비돼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에 걸리기 쉽다. 갑상선호르몬은 분비량이 적어 갑상선기능저하증의 발병률이 높은 편이다.
O형의 특징은 A형이나 B형과 달리 혈액과 관련한 항체가 없다는 점이다. O형 피가 묽게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로 인해 외부 병원체에 상대적으로 취약해 각종 알레르기질환이나 감염병에 자주 걸린다.
반대로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낮고, 노화로 인한 인지기능 저하 위험이 다른 혈액형에 비해 적은 편이다. 안나레나 베네리 영국 셰필드대 신경과 교수팀이 건강한 성인남녀 189명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으로 분석한 결과 O형인 사람은 다른 혈액형보다 뇌의 회백질이 많았다. 이는 그만큼 인지기능 저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의미다.
또 다른 혈액형보다 췌장암에 걸릴 확률이 37% 정도 낮다.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이 O형을 제외한 혈액군에서 신체 면역성을 저하시켜 췌장암 발병률을 높인다.
개성이 강하고 유머러스하지만 다소 변덕스러운 B형은 간암이나 심장병에 취약하다. 또 미국 국립암연구소 연구 결과 B형은 O형보다 췌장암 발병 위험이 72% 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폐암, 고혈압, 알레르기질환 등에 걸릴 위험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AB형은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강해 세균에 감염될 위험성이 낮지만 고혈압, 심장병, 혈액암 등의 위험이 높다. 직설적인 성격 탓에 혈압이 급하게 올라가고 폐암이 상대적으로 생기기 쉽다.
또 다른 혈액형에 비해 나이를 먹을수록 학습이나 기억능력 등 인지기능에 장애가 올 위험이 높아진다. AB형은 위암 발병률도 높다. 정확한 수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B형과 O형 대비 26% 정도 더 높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은 혈액형별로 생기기 쉬운 질환은 단순히 성격을 바탕으로 짐작하거나 통계조사 결과에 근거한 것에 불과해 100% 신뢰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한의학의 사상체질 분류처럼 자신의 부족한 점과 넘치는 점을 대략적으로 판단하고 건강관리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이용하는 것은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처럼 혈액형은 질병의 바로미터가 되기엔 임상근거가 아직 부족한 상황이지만 수혈을 할 땐 공식이 존재할 정도로 확실한 지표가 된다. 또 수혈을 할 땐 같은 혈액형의 피를 사용해야 혈액응고 등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는다. O형의 경우 A형, B형, AB형 모두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로 인해 모든 다른 혈액형 환자에게 수혈 가능하지만 정작 O형 자신은 같은 혈액형 끼리만 수혈할 수 있다.
반대로 AB형은 다른 혈액형으로부터 수혈받을 수 있지만 다른 혈액형에 수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 이런 경우에도 소량 수혈만 가능할 뿐 대량수혈은 같은 혈액형끼리만 가능하다. A형과 B형은 어떤 경우에도 서로 수혈할 수 없다. 이같은 혈액형의 분류법은 장기이식, 친자감별, 범죄수사에도 사용된다.
하지만 이처럼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외웠던 혈액형 공식을 무조건 맹신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얼마전 국내에서 B형 부모 사이에서 AB형 자녀가 태어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조덕 성균관대 삼성서울병원 교수와 신희봉 순천향대 교수가 처음 발견한 이 혈액형은 ‘시스-AB(cis-AB)’로 명명됐다. 혈액형의 경우 가족간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거나 잘못된 수혈 등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앞으로 이런 돌연변이 혈액형이 또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조덕 교수는 “시스-AB형처럼 특이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은 상식적인 혈액형 유전법칙을 벗어나기 때문에 가족간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거나 적혈구 수혈시 AB형이 아닌 다른 혈액형제제를 수혈받을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유전자 변이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던 혈액형과 실제 혈액형이 다를 수 있으므로 수혈이 필요한 경우 수혈의학 전문의에게 정밀검사를 받고 자문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