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질병 유무를 파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최근엔 피 한방울로 암이나 각종 심혈관질환 위험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진단의학 기술이 발전했다. 이는 각종 질병으로 인한 환자 사망률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혈액 속 C반응성단백질(C-reactive protein, CRP)을 통해 체내 염증이나 조직손상 여부를 가늠해보는 진단이 떠오르고 있다.
CRP는 급성기 반응물질 중 몸 안에 염증이 생기거나 조직이 손상되면 생성된다. 감기 등 바이러스질환, 류마티스관절염 등 자가면역질환, 암, 심혈관질환 등을 앓으면 인터루킨-6(interleukin-6)가 간세포를 자극해 CRP 생성을 촉진, 혈중 CRP 농도가 올라간다.
CRP는 특히 염증을 빠르게 진단하는 데 도움된다. 염증이 비만·당뇨병·암·뇌질환 등 각종 만성질환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야 염증과 만성질환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들이 보고되면서 관련 연구가 점차 활발해지는 추세다.
염증은 손상 초기에 세균을 막는 방어적기전으로 작용하지만 만성화될 경우 오히려 건강에 독이 된다. ‘침묵의 염증(silent inflammation)’은 염증반응이 지속되지만 직접 불편한 증상을 알아채지 못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보통 염증이 3주 이상 지속될 때 만성염증으로 진단한다.
CRP는 백혈구보다 민감도(Sensitivity)가 높고 급성 염증에 특이적으로 반응해 수치 상승이 곧 염증의 존재와 직결된다. 따라서 염증 여부를 초기에 판단하는데 유리하고, 이미 진단된 환자의 치료 모니터링과 예후 판단 지표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인체에 감염물질이 유입될 경우 혈중 CRP 수치는 6~10시간 이내에 증가하고, 36~50시간에 최고치를 찍으며, 병변이 회복되면 24~48시간 이내 감소한다. 정상인에서는 검출되지 않거나 0.5㎎/㎗ 이하로 검출된다. CRP의 정상 수치는 국내외로 통일돼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0.5~1.0㎎/㎗(5~10㎎/ℓ)로 본다. 실제 임상에서는 CRP의 미세한 변화에 초점을 두고 질병 여부를 판단하는 고감도 C-반응성 단백질검사를 실시한다. 이 검사에서는 정상 수치가 CRP 검사보다 훨씬 낮은 0.3㎎/ℓ 이하다.
CRP는 단순한 염증 지표가 아니라 직접 염증을 유발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의학계에서는 CRP가 높으면 관상동맥질환, 허혈성심장질환, 뇌혈관질환 위험도가 각각 45%, 60%, 30% 정도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CRP 수치가 정상 범위를 넘으면 당뇨병 위험이 최대 16배 이상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다.
이는 암에도 해당된다. 췌장암, 대장암, 유방암의 경우 CRP 수치가 낮을수록 환자의 생존율이 높은 편이다. 특히 비만인 경우 복부지방에서 다량의 CRP가 생성되면서 각종 질환의 위험도가 높아지는 만성 염증 상태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지방세포는 종양괴사인자, 인터루킨-6, C-반응성단백(CRP)과 같은 염증표지들을 생산한다. 이는 류마티스관절염 발병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만과 류마티스관절염 위험이 동반 상승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또 CRP 같은 염증유발물질이 체내에 쌓이면 근원섬유단백질(근육의 수축·이완을 담당하는 단백질)을 분해하고 체내 단백질 합성을 방해해 근육 손실을 유발한다. 임수 분당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체내에 산화 스트레스가 쌓여 있으면 염증유발물질이 더 많아져 근력이 떨어진다”며 “당뇨병·고혈압·비만이나 흡연·스트레스·수면부족은 산화스트레스를 높이는 원인”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경우 CRP 수치가 정상이어도 확률은 낮지만 동맥경화 위험이 높아질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지난해 최희정 을지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팀은 건강검진자 중 염증수치가 정상 범위에 있는 20세 이상의 건강한 성인 남녀 1347명(남 748명, 여 599명)을 대상으로 염증수치와 동맥경화도의 연관성을 조사했다. 이 연구에서 염증수치(CRP)가 정상 범위(0~0.5㎎/㎗)에 있어도 수치가 ‘0.2~0.5㎎/㎗’에 속한 여성은 ‘0.1~0.19㎎/㎗’ 범위의 여성보다 여성보다 동맥경화 위험이 2.7배 높았다. 반면 남성은 CRP가 정상인 경우 아무도 동맥경화 위험이 증가하지 않았다.
CRP는 정신적인 부분에도 악영향을 준다. 덴마크 코펜하겐대병원 보레 노르데스트고르 박사팀의 연구 결과 혈중 CRP수치가 높은 사람은 우울증이 나타날 위험이 2~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CRP는 적혈구침강속도(ESR)와 자주 비교된다. ESR은 혈액에서 적혈구가 얼마만큼 밑으로 가라앉는지 나타내는 수치로 다양한 질환의 유무를 판단하는 데 유용하다. 응고방지제를 섞은 혈액을 눈금이 있는 시험관에 넣어 수직으로 세워두면 적혈구가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침전물을 형성한다. 약 1시간 후 밑에 가라앉은 적혈구를 제외한 혈장의 높이를 측정하는데 남성은 적혈구 침전물을 제외한 혈장의 높이가 0~9㎜, 여성은 0~20㎜일 때 정상으로 본다.
ESR은 검사 비용이 저렴하고 간편하며 종양, 자가면역질환, 급만성 염증질환의 진단에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임신, 빈혈, 결핵 등의 인자에 의해 결과가 다를 수 있고 CRP에 비해 반응이 덜 신속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CRP는 염증반응으로 인한 수치가 36~50시간이면 최고치에 달해 진단이 용이한 반면 ESR은 최대 1주일까지 소요된다. 이로 인해 급성염증질환 진단시에는 ESR보다 CRP가 선호된다.
이처럼 유용한 CRP도 ‘낮은 질병 특이도(Specificity)’가 단점으로 꼽힌다. 즉 검사 결과 CRP 값이 증가한 경우 어떤 질병이 있다고 전반적으로 파악할 뿐이지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는 구별하기 어렵다. 즉 CRP검사는 특정 질병을 진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염증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거나, 이미 진단된 질병의 치료 경과를 모니터링하는 데 유용하다.
최근엔 당뇨병 진단에서 CRP검사의 한계를 보완한 방법이 등장했다. 윤건호·이승환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팀이 개발한 이 진단법은 중성지방과 포도당 수치로 당뇨병 여부를 판단한다. 아직 명확한 정상 수치 범위나 계산 공식 등은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당뇨병 진단에선 CRP보다 민감도가 높아 검사 정확도가 향상된다. 중성지방(triglyceride)을 의미하는 Ty, 포도당(glucose)을 의미하는 G를 합쳐 TyG지표로 명명된다. 윤건호 교수는 “TyG 지표가 높아지수록 당뇨병 위험이 최대 4배 이상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TyG지표는 간단한 혈액검사만으로 결과 확인이 가능해 정상인 중에서도 당뇨병 발생 위험이 높은 사람을 쉽고 정확히 선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