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임상시험 대상으로 삼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 신의료기술평가 유예안이 지난 21일부터 원안대로 시행되면서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원래 새로 개발된 의료기기는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인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안전성과 유효성 평가를 받은 뒤 건강보험요양급여·비급여로 의료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 유예안은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품목허가를 받은 신의료기기는 보건의료연구원 산하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의 신의료기술평가를 1년간 유예해 곧바로 의료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복지부는 지난 6월 이같은 내용이 ‘신의료기술평가에 관한 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정부는 의료기기 산업을 활성화시킨다는 목표로 시민단체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예안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처음엔 유예안을 찬성하던 의료기기업체들도 그에 따른 세부규정이 마구 생겨 시행절차가 복잡해짐에 따라 오히려 불편함만 커지게 됐다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결국 주관기관인 보건복지부는 졸속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안전성 확보를 위해 기존에 활용되고 있는 기술과 비교한 임상문헌을 갖추도록 임상시험 요건을 강화하고, 식약처에서 허가시 특정한 사용목적·대상질환 등에 대해 임상시험 자료로 안전성을 확인한 범위 내에서 사용이 허용된다.
해당 의료기술의 실시에 따라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 의료기기 제조·수입업자 등은 복지부장관에게 즉시 보고하고,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는 위해수준을 검토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결과를 통보해야 한다.
개정안에 대해 정치권과 시민단체는 일제히 안전성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최동익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올해 국정감사에서 “복지부가 말하는 ‘임상시험을 거친 의료기기’는 먼저 국민에게 적용하고 나중에 평가할 만큼 안전하지 않다”며 “평가 없이 먼저 의료기기를 사용하라는 것은 국민에게 임상시험의 대상이 되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복지부는 식약처의 품목허가를 통해 안전성 및 유효성을 일정 부분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신의료기술평가는 시술을 받은 환자에게 나타나는 부작용과 합병증·사망사례 등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포함돼 있지만 식약처 의료기기 품목허가는 물리화학적 안전성과 성능 등 단기적 유효성만 평가한다. 이로 인해 기존 신의료기술 평가가 평균 1년의 과정이 필요한데 반해 품목허가는 80일이면 받을 수 있다. 결국 8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안전성 및 유효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식약처의 임상시험을 거친 의료기기 중 상당수가 추후에 안전성 및 유효성을 평가할만큼 안전하지 못한 실정이다. 2011~2013년 신의료기술 평가결과 임상시험자료가 있는 의료기기 26건 중 8건(31%)이 안전성·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평가에서 탈락된 8건 중 6건(75%)는 아예 심의단계에서 근거 부족으로 탈락했다.
신의료기술은 물론 기존 기술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의원은 “신의료기술 평가는 797건인데, 기존 의료기술 재평가는 2014년 시범연구를 수행한 2건에 불과하다”며 “의료기술의 안전성과 유효성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존재하므로 한번 기술평가를 받았더라도 주기적으로 재평가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시민단체 등의 반발에도 개정안 시행을 밀어붙인 것은 전형적인 ‘대기업 밀어주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실제로 현재 체외진단검사기기 등 분야에는 삼성, LG, SK 등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진출한 상황이다.
무상의료운동본부 관계자는 “업계 이윤을 보장하는 졸속 입법”이라며 “복지부는 개정안을 7일간만 입법예고해 40일 이상 해야 하는 규정을 어겼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가 국민의 건강을 해칠 위험이 있는 데다, 입법예고 기간도 못 지킨 개정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료비 상승의 주범이 될 수 있따는 지적도 나왔다. 의료기기가 신의료기술평가를 받지 않고 건강보험으로 신청할 경우 대부분 비급여가 될 것이고, 이는 대부분 환자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의료기기산업 활성화라는 도입 취지가 무색하게 의료기기업체들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개정안에 포함된 비교임상 논문 제출 등이 오히려 이중규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관계자는 “미국이나 유럽연합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품목허가나 의료기술평가를 실시할 때 기존 기술과의 비교임상을 강제하는 경우는 없다”며 “의료기기는 윤리성이나 비현실성 등의 다양한 이유로 비교임상을 실시할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지적했다.
특히 현행 신의료기술평가에도 비교임상논문을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데, 새로운 규제를 부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부작용 발생시 식약처와 보건복지부장관에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이미 의료기기법에는 의료기기취급자가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도중에 사망 또는 인체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했을 경우에 식약처장에게 즉시 보고하고 기록을 유지하도록 돼 있다. 그럼에도 같은 부작용 내용을 보건복지부장관에게 다시 보고해 나가는 부분은 불필요한 이중 행정조치라고 꼬집었다.
의료기기 허가 당시 임상시험 결과 검토를 미국 식품의약국(FDA) 수준으로 엄정히 하고 신의료기술평가 내용을 식약처 허가 단계에 흡수시켜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민안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의료기기 업계의 피로도를 줄이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