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째 지지부진하던 국립중앙의료원(NMC)의 원지동 이전 계획이 문화재 발굴조사 실시 등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최악의 경우 이전 부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 발굴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묵인한 서울시와 관할 기관인 보건복지부는 서로 내탓이라며 불썽사나운 책임공방까지 벌이고 있다.
보건복지위 김재원 의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보건복지부와 서울시는 국립중앙의료원 서초구 원지동 신축 이전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올해 4월 의료원 측이 서울시로부터 사업부지에 고인돌, 빗살무늬토기 등이 출토돼 문화재 존재 가능성이 높다는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를 확보하면서 이전사업이 전면 중단됐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NMC 이전 부지는 지석묘(고인돌)의 상석으로 보이는 유구, 회색토기, 2점의 토기 등이 출토되는 등 문화재가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원래 서울시는 원지동 부지에 추모공원을 건립하기 위해 2002년 지표조사를 벌였고, 고인돌·석기 등 청동기시대 문화재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돼 시굴 조사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하지만 국립중앙의료원 이전 계획이 추진되고 2009년 4월 추모공원 부지 중 일부가 종합의료시설로 변경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서울시와 복지부가 서로 미루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제때 하지 못해 이전계획 자체가 무산될 지경에 이른 셈이다. 서울시는 문화재 지표조사는 신축 사업자로 변경될 예정인 복지부가 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복지부는 아직 시행자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며 원지동 부지의 매장문화재 보존 조치 의무는 서울시에 있다고 맞섰다.
서울시는 고인돌과 석기가 발견됐다는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를 복지부에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시 조사는 추모공원 건립을 위한 법적 사전절차”라며 “의료원 신축 사업자로 변경될 예정인 복지부가 매장문화재 보존 조치를 하는 게 법적으로 규정돼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복지부는 “매장문화재 보존 조치는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시행자가 하도록 돼 있는데 아직 복지부는 서울시로부터 시행자로 지정받지 못했다”며 “별도 시행자 지정이 있기 전까지 종합의료시설 등 도시계획시설사업의 시행자는 지자체장”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문화재의 존재 때문에 건축 가능 여부도 불투명한 지역을 복지부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900억원에 매각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라며 “매장문화재에 대한 신속한 서울시의 조치가 없다면 국립중앙의료원을 원지동으로 이전하기로 한 양해각서(MOU) 실천에 대해 서울시의 의지가 없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상황이 이렇자 정치권과 NMC 내부에선 원지동 이전 자체가 백지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남인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1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국립중앙의료원에 대한 국정감사 질의에서 “국립중앙의료원 이전부지 지역은 유물산포지로 판단돼 발굴조사가 불가피하고 이와 관련해 보건복지부, 국립중앙의료원, 서울시간 문화재 조사 주체, 비용부담, 부지계약 시점 등에 대해 협의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원지동 이전·신축 현대화사업 계획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의료원은 원지동 이전이 잠정 연기될 경우 2014년 책정돼 이월된 예산 165억3100만원과 올해 예산 401억2700만원을 모두 집행하지 못하고 국가에 반납해야 할 상황이다.
정부는 국립중앙의료원이 국가중추의료기관이라는 상징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시설이 낙후돼 있으며 현 을지로 부지의 시설·장비 현대화 건물 구조변경 등 시설개선에 투자하기에는 비용 효율성이 낮은 것으로 판단하고 을지로 부지를 매각한 뒤 원지동 부지로 이전·신축하는 현대화사업을 추진해왔다.
국립중앙의료원이 제출한 ‘국립중앙의료원 원지동 신축·이전 현대화사업 개요’에 따르면 을지로 현 부지는 대지 2만7573㎡, 건축연면적 4만9008㎡, 492병상 규모다. 반면 원지동 이전 부지는 대지 6만9575㎡에 건축연면적 9만9053㎡, 600병상(감염병전문병원, 외상병원 별도) 규모로 시설이 대폭 확대된다.
병원 신축 부지에 문화재가 출토돼 계획이 변경되거나 아예 무산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1년엔 강북삼성병원이 응급실 증축 과정에서 특혜 시비에 휩말렸다. 불법 건축허가 논란이 된 문화재는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경교장이다.
당시 소관 부서인 종로구 건축과는 경교장이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경교장 주변에 대한 재심의를 서울시에 요청해야 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고 건축허가를 내줬다. 서울시는 종로구청에 문화재 주변 건축허가 지침위반을 통보하고 조치지시 공문을 발송했지만 이에 대한 종로구 처리결과는 문서로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현재 경교장 복원사업은 마무리됐지만 ‘반쪽짜리 복원’에 그쳤다. 병원과 맞닿은 벽과 창문은 복원되지 못했고, 일부 공간은 여전히 닫혀 있다. 병원건물과 주차장에 끼어 얼핏 병원 건물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울아산병원(前 서울중앙병원)도 설립 초기 문화재와 관련돼 각종 특혜 의혹에 시달렸다. 현대그룹은 병원 설립을 위해 1981년 풍납동 일대 6만평 부지를 매입했다. 풍납동 일대는 고인돌이나 토기, 백제시대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는 지역이어서 1984년 착공 이전부터 문화재 유실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병원 부지와 바로 인접한 몽촌토성의 경우 1985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복원작업이 진행돼 이전까지는 근처 유적지나 유물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게다가 1980년대 초중반은 재벌기업들의 병원 설립 경쟁이 현실화된 상황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잠실 및 송파 일대 개발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문화재 보호는 뒷전에 밀리기 마련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저돌적인 경영스타일,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병원 공사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문화재가 소실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후문이다. 지금에야 병원 신축공사에 들어가기 전 문화재청의 문화재 심의를 거쳐야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체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고, 사회적인 관심도 부족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서울중앙병원 사택 공사 과정에서 인근 풍납토성이 훼손됐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울시는 공사현장이 보호구역 밖이라는 이유로 문화재관리국에 통보도 하지 않은 채 건축허가를 내줬다. 이로 인해 풍납토성 성벽 뿌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보호구역 밖 3m 지점에서 굴착기공사가 진행되는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착공 9개월이 지난 뒤에야 문화재관리국의 현장조사가 이뤄지고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이밖에 서울시 소유 도로부지를 무단 점유해 병원 건물을 짓고 서울시로부터 특혜를 받아 유수지 4000여평을 복개해 병원 전용 주차장으로 사용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