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국내 의약계 미래성장동력으로 주목을 받았던 천연물신약이 어쩌다 애물단지 신세가 됐을까. 정부는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천연물신약 연구개발에 총 3000억원을 쏟아부었지만 각종 발암물질 검출 및 약가 특혜 논란이 불거지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의협 관계자는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된 의약품은 의사의 처방과 약사의 조제를 통해 정확한 용법·용량이 준수돼야 한다”며 “식약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국가기관의 철저한 유통·관리를 받아야 하는 의약품인 천연물신약을 취급 권한이 없는 한의사가 권한없이 유통·판매하는 행위는 약사법 위반에 해당된다”고 강조했다.
안전성 문제도 불거졌다. 감사원이 올해 2∼3월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을 상대로 천연물신약 연구개발사업 추진실태를 점검한 결과 총 11건의 문제점을 적발했다.
복지부는 2001년부터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촉진계획을 수립하고 지난해까지 3092억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기초연구 분야의 경우 208개 연구과제에 1375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했음에도 제품화로 연결된 성과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천연물신약에 대해 안전성 독성시험이 면제되고 성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소홀하게 이뤄진 탓에 5개 회사에서 개발한 6개 약품에서 1급 발암물질인 벤조피렌과 포름알데히드가 검출되기도 했다.
이는 지난해 국감에서도 지적된 사안으로 당시 김재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새누리당 의원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대해 발암물질 관리기준을 정하고 저감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식약처는 안전하다고 주장하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가 감사원 감사를 받고서야 뒤늦게 업체에 발암물질 검출량은 낮추라고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재원 의원은 “천연물신약에서 발암물질 검출돼도 식약처가 그동안 계속해서 안전하다고 주장한 것은 인허가 과정의 부실이나 특혜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며 “감사원 감사를 통해 천연물신약의 연구개발, 인허가, 임상, 보험약가 적용 등 전 과정에서 기준을 위반하고 특혜를 제공한 문제점이 밝혀진 만큼 정부는 천연물신약에 대해 약가 재평가와 안전성·유효성 재검증에 나서야 하고 국민의 안전을 위해 발암물질이 검출되는 의약품은 허가 취소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11년과 2012년 3개의 천연물신약에 대해 건강보험 요양급여 적정성을 심사하면서 ‘신약 등 협상대상 약재의 세부 평가기준’에 없는 평가요소를 인정, 신약의 가격을 적정 가격보다 최대 58%까지 높게 책정하는 바람에 147억여원의 추가 의료비 부담을 초래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문제에도 천연물신약은 여전히 의료계 및 제약업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현재 세계 여러 국가가 다양한 식물을 연구해 천연물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집중하는 중이다. 세계 천연물신약 시장 규모는 약 25조원으로 매년 3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중국이 전체 시장의 90%를 차지한다.
미국은 소규모 기업을 중심으로 중증질환을 타깃으로 연구개발을 진행 중이며 중국은 심혈관계·부인과·근골격계질환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의 1호 천연물신약 ‘베라젠’은 생식기사마귀 치료제로 녹차잎 추출물이 주원료다. 2호 ‘풀리작’은 아마존 자생식물 추출물이다. 미국에서는 현재 20개 이상 후보물질이 임상 2상, 17개 물질이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다.
미국의 경우 200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처음으로 식물약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한 뒤 임상시험 건수가 급증하는 추세다. 1990년대 초반까지 임상 건수는 10건에 그쳤지만 2000~2004년 90건으로 늘었고, 2004년 이후 3년간 120건 이상으로 증가했다.
유럽은 새로운 기원의 천연물 소재가 아닌 기존의 임상적 유용성이 입증된 천연물 원료를 기반으로 임상적응증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국내 제약업계의 관심도 여전히 높은 편이다.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에 따르면 국내 주요 제약사가 개발 중인 신약 분야에서 천연물신약은 화합물신약에 이어 2위를 기록 중이다. 이 중 절반 이상의 제약사가 천연물신약 파이프라인을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또 35개 제약사가 보유 중인 신약 파이프라인 255건 중 천연물 유래 신약 파이프라인은 55품목으로 21.6%의 비중을 차지한다.
국내에서 개발되는 천연물신약은 보통 식약처가 효능을 인정하는 602종의 생약(천연 약)들의 성분을 추출해 만든다. 현재까지 식약처에서 허가를 받은 국내 천연물신약은 △동아제약 스티렌정(위염) 및 모티리톤정(기능성 소화불량증) △SK케미칼 조인스정(골관절염) △녹십자 신바로캡슐(골관절염) △한국피엠지제약 레일라정(골관절염) △구주제약 아피톡신주(골관절염) △안국약품 시네츄라시럽(기관지염) △영진약품 유토마외용액(아토피피부염) 등 8종류다.
이밖에 녹십자와 동아에스티 등 국내 다수 제약사가 위염, 알츠하이머병, 비만, 기관지염 등 다양한 질환에 대한 천연물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동아에스티는 당뇨성신경병증 치료제 ‘DA9801’의 미국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녹십자는 2011년 출시한 천연물신약 신바로캡슐의 4상 임상시험 결과를 국제골관절염학회(OARSI)에서 발표했다. 영진약품은 만성폐쇄성폐질환(COPD)치료제 ‘YPL-001’의 미국 임상2상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제약사들이 천연물신약에 관심을 갖는 것은 투자 대비 수익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약사 관계자는 “천연물신약은 안전성이 보장된 경우가 많아 미국과 한국에서 임상1상 시험을 면제기 때문에 개발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며 “감사원 지적대로 천연물신약 안전성과 유효성 심사기준이 강화돼야 하는 게 맞지만 천연물신약 개발 자체를 부정하는 정책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