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건강검진 사업을 수행하는 건강관리협회가 간부의 친인척을 특혜 채용해온 것으로 밝혀지면서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 협회는 막강한 조직과 인력을 바탕으로 양적인 건강검진 분야에서 선두를 달려왔지만 한편으로는 수익사업 치중, 건강검진 환자 싹쓸이, 예방접종 가격 덤핑 등 부도덕적인 경영행태를 지속적으로 지적받아왔다. 숱한 비판에도 별다른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건강관리협회지만 이번 만큼은 근본적인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인재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이 기관은 최근 5년간 전·현직 임직원의 자녀 33명과 처, 조카, 동생, 사촌 등 친인척 등 50명을 채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올해만 해도 협회 서울지부 의무직에 있는 간부는 부인을 의무직, 강원지부 본부장은 조카를 행정직에, 인천지부 본부장은 자녀를 간호사로 취업시켰다. 이들은 2014년까지 모두 비정규직으로 채용된 뒤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게다가 계약직 신분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특혜와 차별이 있었다. 이들 전·현직 임직원 자녀 및 친인척 50명 중 퇴사자 8명과 입사 1년 미만 17명을 제외한 25명 중 64%인 16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입사한 나머지 계약직은 483명 중 32.5%(157명)만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67.5%(326명)는 아직도 계약직 근로자로 남아있다.
이 기관은 또 2년을 초과해 기간제근로자를 채용한 경우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의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도 위반했다. 현재 협회에는 2년 이상 된 계약직 근로자만 471명이고, 이 중 5년 이상 된 직원은 127명이다. 10년 이상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직원도 14명이나 됐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그동안 건강관리협회 내부에서 쉬쉬했던 문제가 이제서야 터진 것 같다”며 “정규직 전환을 위해 하루하루 살얼음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나머지 계약직 직원들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재근 의원은 “국가건강검진 사업을 수행하는 단체에서 현대판 음서제가 은밀히 진행되고 기간제법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일자리 대물림, 이른바 ’고용세습‘ 관행에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건강관리협회는 1964년 설립된 한국기생충박멸협회를 모체로 한다. 1982년 비전염성·만성·퇴행성질환의 조기발견 및 치료를 목적으로 한국건강관립협회가 설립됐으며 1986년 기존에 있던 기생충박멸협회와 통합하면서 현재 건강관리협회의 형태를 이루게 됐다.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현재 전국 16개 시도 지부에 건강검진센터가 있으며 의사 150명과 직원 1600명을 두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나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정부 부처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건강관리협회는 전국 단위의 네트워크 조직을 바탕으로 건강검진 환자를 싹쓸히 해 주변 개원의원들의 원성을 사 왔다. 그래서인지 불법으로 환자를 유인 알선한다는 의혹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지난해의 경우 약 300만건 이상의 국민건강검진을 실시해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1000억원이 넘는 건강보험 급여를 지급받았다.
4~5년 전에는 불특정 다수 대상자에게 검진 안내문을 발송, 개인정보 입수 과정에 불법적인 요소가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2011년 법원이 이같은 혐의를 인정, 벌금 300만원의 행정처분을 내리면서 불법 환자유인 행위가 사라졌다가 최근 예방접종 가격 덤핑 문제가 불거졌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의사회와 서울시 25개구 의사회는 독감 예방접종 시기에 건강관리협회와 인구보건복지협회(옛 가족계획협회) 등이 무차별적 가격할인으로 환자를 유인해 동네의원을 초토화시키고 의료시장 질서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건강관리협회는 독감백신 접종가를 1만5000원으로 책정했다. 이에 대해 개원의들은 적정 접종가격이 백신공급가 1만원, 의사진찰료 1만원, 세금 및 부대비용 등을 포함해 최소 2만5000원 이상은 돼야 한다고 맞섰다.
일각에선 건강검진 환자를 뺏긴 일선 병·의원들이 의도적으로 건강관리협회를 폄훼한다는 주장도 있다. 주변에 적이 많은 만큼 루머도 다양하다. ‘고위 보건복지 공무원을 간부로 위촉해 공공기관 행세를 한다’, ‘청와대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전담해 빽이 든든하다’는 루머가 대표적이다. 매출 향상 및 인건비 감축을 위해 공보의를 혹사시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이번 현대판 음서제처럼 대부분의 루머는 실제 사실에서 기인한다”며 “건강관리협회는 수익사업에 치중할 게 국민의 잘못된 건강지식을 바로잡고 확산시키는 순기능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