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이 자신의 면허와 상관없는 의료기관의 개설 및 운영에 법인이사로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이 추진돼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한의사가 정형외과 등 일반병원, 의사가 한방병원 등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이 법안에 의료계는 대부분 ‘황당하다’는 입장이다.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기획재정위원회 의원은 지난 19일 의료인의 면허로 개설 가능한 의료기관에(만) 한정해 (추가로 신규) 개설·운영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새 개정안은 현행법의 ‘제2항 제1호의 의료인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둘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할 수 없다’는 부분을 삭제하고, ‘제2항 후단에 따라 개설 가능한 의료기관을 둘 이상 개설·운영할 수 없다’로 수정했다.
이는 의료인의 복수 의료기관의 개설·운영 금지 규정을 의료인의 면허로 개설 가능한 의료기관에 한정해 적용하도록 한 것으로, 의료인이 자신의 면허로 개설할 수 없는 의료기관인 경우에는 법인의 이사로서 개설 및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의사는 종합병원·병원·요양병원·의원, 치과의사는 치과병원이나 치과의원, 한의사는 한방병원·요양병원·한의원, 조산사는 조산원을 제외한 나머지 의료기관의 개설 및 운영에 참여 가능하다.
오 의원 측은 법안 발의 이유로 “비의료인의 경우 수 제한 없이 의료법인이나 비영리법인의 이사로 참여가 가능한데, 의료인만 이를 규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의료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료면허와 관련되지 않은 분야에서는 비의료인과 같은 권리·의무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자신의 면허와 상관없는 의료기관의 운영까지 금지하는 것은 입법 목적에 비춰봤을 때 과도한 규제”라며 “이에 따라 의사가 치과병원이나 한방병원을, 한의사가 치과병원이나 의과병원을 개설에 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발의는 법제처 유권해석에 따라 의료기관 개설자이면서 다른 의료법인 이사도 맡고 있는 의료인들이 범법자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법제처는 2013년 4월 의료법인 이사가 별도로 개인 명의의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경우 의료법 33조 8항 위반이냐는 보건복지부 질의에 ‘위반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현행법상 의료인이 어떤 명목으로든 둘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반면 비의료인의 경우 제한 없이 의료법인이나 비영리법인의 이사로 법인 운영이 가능하다. 이는 의료인이 자신이 개설한 하나의 의료기관에서만 의료행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장소적 제한을 두기 위함이다.
그러나 현행법상 의료인 자신이 개설한 의료기관 외에 의료법인이나 비영리법인의 이사로 운영에 참여하는 경우 의료법 위반에 해당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실정이다. 오 의원은 의료인도 비의료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면허와 상관없는 의료기관을 개설할 경우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에 대해 의료계는 의료영리화 및 병원 자본 양극화를 부추길 수 있다며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한 의사단체 관계자는 “의료인과 비의료인의 차별을 없애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한의사가 종합병원을 개소할 수 있다는 점은 황당하다”며 “수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통과될 경우 의료계내 진흙탕 싸움을 부추길 것”이라고 말했다.
한 개원의는 “이 법안이 통과되면 자본력을 가진 의료인 일부가 다수의 의료기관을 개설해 진료가 아닌 수익창출에 몰두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며 “공공재로서 의료의 기능은 마비되고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끔찍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의사 또는 한의사 한 명이 여러개 병·의원을 설립 및 운영하는 것은 영리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또다른 개원의는 “문구가 애매해서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고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며 “애매한 법안은 이를 악용하려는 거대자본의 구미를 당기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 개정안이 자본력을 가진 경영자에 의한 규모의 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반대로 기존 네트워크병원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한 네트워크병원 관계자는 “1인 1개소 법안은 다수의 의료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과도한 규제”라며 “대부분의 개원의들은 작은 의원급에서 시작해 성장하는데, 현재 의료계 상황은 개인의 혼자 힘만으로는 성장이 어려워 네트워크병원 같은 연계시스템이 필수”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개정안을 계기로 공정 경쟁을 막는 불필요한 규제가 조금씩 완화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오 의원실은 “의료인과 비의료인과의 역차별과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한 법안일 뿐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 등 특정 직군에 혜택을 주는 게 아니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1년 12월 양승조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의료인의 복수 의료기관 개설·운영을 금지한 의료법 개정안’, 이른바 1인1개소법은 ‘의료인은 다른 의료인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할 수 없고, 어떠한 명목으로도 2개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할 수 없도록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를 위반한 의료기관 및 의료인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또 의사면허정지 3개월 처분도 가능하다. 이밖에 이 조항을 위반한 자가 보험급여 비용을 청구한 경우 청구액의 5배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업무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다.
1인 1개소 법안은 120개의 분원을 운영하면서 치료비를 30∼50% 가량 저렴하게 책정한 유디치과와 이에 위기를 느낀 일반치과들의 대립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반유디치과법’으로도 불린다. 이 법안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의료영리화를 막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치’라는 의견과 ‘의료계 발전을 막고 환자 선택권을 제한하는 과도한 규제’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