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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엔 클래식, 우울증엔 힙합
  • 박정환 기자
  • 등록 2015-08-24 01:10:59
  • 수정 2020-09-14 12:4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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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상근거 여전히 부족, 기존 의학적 치료와 병용시 일정 부분 효과 … 치매·뇌전증 증상 개선에 도움
음악의 질병치료 효과를 입증할 만한 임상근거는 아직 부족하지만 전문가들은 기존 치료와 병용할 경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음악이 없는 인간의 삶이란 상상하기 힘들다. 특히 음악과 인간의 정신세계는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아름다운 선율은 감정이 메말라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다.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한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s, 마음의 평정 또는 획일화)은 모든 인간이 획일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그래서 독서나 음악 감상 등 인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위가 금지되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이 영화에서 경찰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고 클래식음악을 듣는 등장인물의 모습은 음악이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아무리 스토리와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라도 배경에 깔리는 음악이 없다면 앙꼬(팥앙금) 없는 찐빵처럼 밋밋해진다.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는 프로포즈도 음악이 없다면 감동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엔 음악이 가진 장점을 질병 치료에 적용하는 ‘뮤직테라피(음악치료)’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아직 음악의 질병치료 효과를 확실히 입증할 임상근거는 부족하지만 전문가들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론이라고 입을 모은다. 선행 연구에서 음악치료는 우울증이나 조현병 등 정신과적 질환, 치매 등 신경계 질환은 물론 암 등 만성질환으로 인한 통증을 줄이는 데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음악과 치료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음악치료에 관심을 보였으며 최근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음악치료저널이 발간되는 등 음악의 활용 범위가 점차 넓어지는 추세다.
본격적인 음악치료는 2차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 미국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미국 향군병원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가 정신적 외상을 입은 군인들이 다수 입원한 상태였다. 이 병원 의료진은 입원 군인들에게 음악을 들려준 결과 정신적 안정은 물론 신체적으로도 건강에 도움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1950년 미국 국립음악협회에서는 음악치료를 공식 명칭으로 채택하고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미국 음악치료협회(American Music Therapy Association)는 음악치료를 “정신과 신체 건강을 복원(rehabilitation) 및 유지(maintenance)하고, 향상(habilitation)시키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음악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기전에는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음악이 자율신경반응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심리적 상태를 변화시킨다는 가설과, 음악과 상상이 감각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시상)을 통해 대뇌 피질과 변연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 음악이 하나의 보상으로 작용해 동기를 유발하고 정서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가설, 음악이 커뮤니케이션·통합 등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는 것에 주목하는 가설 등이 있다. 
이처럼 가설에 불과하지만 음악치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50여년 만에 음악과 질병 치료효과의 상관성을 입증할 만한 연구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박정미 부산대병원 통합예술심리치료학과 교수는 “오늘날 음악치료기법은 신경과학적 이론에 기초한 것으로 정신장애는 물론 뇌졸중, 파킨슨병, 외상성 뇌손상 등의 치료에 집중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며 “입원환자나 호스피스의 삶의 질과 행동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게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음악은 치매 증상 개선에 도움될 수 있다. 명지명원 치매진료센터 연구팀은 2013년 8월부터 1년간 1주일에 2회, 회당 50분씩 총 16회 음악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한 경도인지장애 12명과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 38명을 추적 관찰했다. 음악치료는 도입부, 본활동, 마무리활동 등 3단계로 구성돼 모두 50분에 걸쳐 진행됐다. 15분의 도입 부분에는 굿거리장단의 민요풍 노래로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린 뒤 참여자들이 악수 등을 하며 친밀감을 쌓도록 했다. 소고를 이용해 자신의 악기와 옆사람의 악기를 박자에 맞춰 번갈아 치는 게임이나 별명 부르기 게임 등도 포함했다. 
30분 동안의 본활동에서는 노인들이 많이 알고 있는 민요나 가요 부르기, 노랫말 채우기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노래와 관련된 좋은 기억을 서로 얘기하는 시간도 따로 마련했다. 마지막 5분 동안은 본활동에 대한 평가를 담아 자신의 활동을 기억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돼 있다. 

프로그램 시행 결과 정서불안 정도를 의미하는 단축형 노인우울척도(Short Form of Geriatric Depression Scale, GDS)가 치료 전 6.2±1.64에서 치료 후 3.8±1.11로 호전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상생활척도검사(Seoul-Instrumental Activities of Daily Living, S-IADL) 점수는 치료 전 평균 13.4±3.09에서 치료 후 9.9±3.81로 크게 개선됐다. 일상생활척도는 복합적인 인지기능을 요구하는 전화 사용, 돈 관리, 대중교통 이용 등을 평가하는 지표다.
한현정 명지병원 신경과 교수는 “음악요법은 기억과 정서를 자연스럽게 자극하고 행복감을 고취시켜 치매를 예방 및 완화하는 데 도움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음악치료는 뇌파를 자극해 발작이나 경련 등을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된다. 미국 오하이오대의 연구에 따르면 클래식과 재즈 음악을 들은 사람은 뇌파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뇌전증(간질) 환자의 경우 음악을 듣지 않은 대조군보다 측두엽의 뇌파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뇌전증 환자의 80%는 뇌의 측두엽에 발작 및 경련이 생기는 측두엽 뇌전증을 앓고 있다. 음악이 측두엽의 청각피질을 자극, 뇌전증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크리스틴 샤리턴(Christine Charyton) 오하이오 주립대 교수는 “음악이 의학적인 뇌전증 치료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기존 치료법과 병행하면 발작 예방에 도움될 것”이라며 “하지만 이같은 효과가 모든 뇌전증 환자에서 나타나는지는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음악치료는 파킨슨병 환자에게도 큰 효과를 발휘한다. 제시카 그란 캐나다 웨스턴대 교수는 “뇌 신호에 문제가 생기는 파킨슨병의 경우 몸이 제어되지 않는 발작 증상이 나타나는데,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한 환자는 발작 증상의 빈도가 낮은 편”이라며 “음악 연주가 도파민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환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땐 편안한 분위기의 음악을 들으면 더 쉽게 숙면을 취할 수 있다. 보통 클래식을 ‘잠이 오는 음악’이라고 표현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해주는 잔잔한 피아노와 현악기의 소리, 반복되는 선율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오늘날까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흐의 곡들은 하나의 리듬을 수많은 변주를 통해 반복하기 때문에 불면증 치료에 효과적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자장가 용도로 만들어진 만큼 숙면을 유도하는 데 도움된다. 바흐가 살았던 시기에는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음악을 의뢰한 귀족이 잠들 때까지 음악가는 밤새 곡을 연주해야 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독일의 헤르만 카를 폰 카이저링크 백작이 의뢰하고 바흐의 제자였던 골드베르크가 만든 게 이 곡이다.

음악은 정신과질환 치료뿐만 아니라 수술 후 통증 감소에도 효과적이다. 음악이 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추고 옥시토신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통증을 줄이는 것으로 추측된다. 
음악이 뇌로 향하는 통증 신호를 줄인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미 교수는 “음악과 통증 등 자극은 뇌의 변연계 및 시상하부에서 감각자극으로 범주화된다”며 “수술 중이나 후에 환자가 음악을 들으면 통증이 발생하더라도 뇌는 이 통증을 상대적으로 덜 감지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즉 통증이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음악이 부정적인 신경 신호를 줄여 통증에 대한 자각을 최소화하는 셈이다. 효과를 높이려면 환자가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음악을 선곡하는 게 도움된다.

보통 음악치료엔 잔잔한 템포의 클래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때문에 힙합음악이 우울증 개선에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는 흥미롭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힙합테라피’가 우울증이나 정신질환 증상 개선에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힙합은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인 박탈감이 큰 지역에서 발달했다. 특히 힙합의 가사는 가난, 소외, 범죄, 마약 등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의 현재를 가감없이 들려준다. 이를 통해 절망감에 빠진 사람에게 도피처가 되어주며 강한 감정적·정신적 표출을 돕는 역할을 한다. 연구책임자인 베키 잉스터 교수는 “힙합의 랩은 말하듯 자신의 감정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낸다”며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이해하고 치료하는 데 이상적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음악치료의 활용 범위가 점차 확대되면서 음악치료사라는 직업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여러 학교에 음악치료 관련 학과가 개설되고 음악치료학회가 설립돼 공인 자격을 갖춘 음악치료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음악치료사는 미국·영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직업으로, 한국에는 1990년대 초반에 도입됐다. 이들은 정신병원이나 지역사회 건강센터, 청소년 치료센터, 마약이나 알코올 재활센터, 양로원·특수학교·요양원·실버타운 등에서 장애아동·정신질환자·치매노인·불안증 환자를 대상으로 음악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거나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환자가 악기를 마음껏 다루어 보게도 하고, 노래 부르기, 작곡 및 연주 등 다양한 음악 활동을 통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치료하므로 음악지식은 물론 심리학 분야의 전문지식도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많은 대학에 음악치료학과가 있어 60학점 이상을 이수하고, 1200시간 이상 병원 임상 과정을 거쳐 자격시험에 통과하면 공인 음악치료사가 될 수 있다. 주전공 악기를 제외한 1~2종 악기의 연주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며, 대학원에는 석·박사 과정도 개설돼 있다. 국내에서는 1996년 숙명여대에 처음으로 음악치료대학원이 개설됐다.
음악치료사는 외국에서 21세기 최고의 직업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갈수록 숫자가 늘고 있다. 국내의 경우 음악치료학 석사 학위를 딴 뒤 전국음악치료사협회에서 치료사 자격증 인증을 받거나, 외국의 음악치료 분야 자격을 취득하면 음악치료사가 될 수 있다.

박정미 교수는 “음악치료는 아직 임상적인 근거가 다소 부족하지만 기존 의학적 치료, 특히 정신질환치료와 병행할 경우 일정 부분 효과를 나타내는 게 확실하다”며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며 언젠가는 건강보험급여가 적용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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