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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의 끝판왕’ 궁중음식 … 조선시대 왕족은 하루에 5번 식사
  • 정종우 기자
  • 등록 2015-08-19 12:28:28
  • 수정 2020-09-14 12: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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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 사고방식 따라 수라상 규모 달라져 … 짜거나 맵지 않아, 한일 강제병합 후 민간으로 전수
임금은 사치스럽게 산해진미를 즐기기도 했지만 흉년이 드는 등 각 지역의 경제가 원활하지 않으면 스스로 반찬 수를 줄이는 ‘감선’을 하기도 했다.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쿡방(요리하다는 뜻의 Cook과 방송의 합성어)의 인기가 여전하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요리사는 자신만의 요리법에 대해 소개하며 각종 CF나 프로그램 섭위 1순위다. 최근에는 대표적인 서양요리인 프랑스·이탈리아 음식에 이어 한식도 쿡방의 주제로 등장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tvN에서 방영한 ‘한식대첩’에선 각 지역의 대표들이 나와 음식 실력을 겨루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음식을 만드는 데 정성과 조화를 중시한다. 음식을 정결한 자세로 만들며, 맛과 영양 배합에 신경썼다. 특히 궁중요리는 ‘한식의 끝판왕’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정도로 한식의 정수다. 궁중요리가 민간요리와 구별되는 첫번째는 간이 짜거나 맵지 않은 것이다. 다만 섞박지와 깍두기만 매웠다.
민간에서는 얼큰한 맛을 즐겼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궁중음식은 밍밍했다. 궁중에서는 전국 각지의 진귀한 식재료를 이용해 독창적인 음식문화를 발전시켰다.

한민족 5000년 역사에서 음식문화가 가장 꽃핀 시기는 조선시대다. 당시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은 사옹원(司饔院)이 관장했다.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사옹방(司饔房)을 개칭한 것으로 1895년 고종 32년에 전선사(典膳司)로 이름이 다시 바뀌었다. 사옹원에서 결정된 음식 메뉴를 토대로 소주방(燒廚房)에선 상궁들이 음식을 만들었다.

수라(水刺)는 왕이나 왕비에게 올리는 상을 뜻한다. 고려시대부터 불려졌으며, 몽골어인 ‘술런’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자는 수라를 발음대로 표기한 것일뿐 별다른 뜻이 없다. 왕자나 왕녀의 상은 진지(進止)라 한다. 궁인이나 내외빈에게 내는 상은 반상(飯床)으로 구별해 불렀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왕족은 하루에 다섯번 식사를 했다. 아침 일찍 먹는 ‘초조반(初朝飯)’, 수라상인 ‘조반(朝飯)·석반(夕飯)’, 낮에 간단히 먹는 ‘낮것상’, 야식인 ‘야참(夜食)’을 먹었다.

왕의 사고방식에 따라 수라의 규모가 달랐다. 사치스럽게 산해진미를 즐기기도 했으며, 검소하게 차린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장수한 영조는 소식(小食)을 즐겼다. 하루에 다섯번 먹던 식사를 세번으로 과감하게 줄였다. 동시에 반찬 수도 절반으로 줄여 적게 먹는 습관을 꾸준히 유지했다. 하지만 소식을 하는 대신 끼니를 절대 거르지 않았다. 회의를 하다가도 수라는 반드시 챙겼다. 세종은 식성이 좋아 수라상을 네번 받았다. 식탁에 고기반찬에 없으면 수저를 들지 않을 정도로 육식을 즐겼다.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임금은 스스로 반찬 수를 줄이는 ‘감선’을 행했다. 각 지역의 경제가 원활하지 않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일어나 가장 먼저 먹는 초조반은 일반적으로 죽으로 구성됐다. 당시 죽은 환자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몸을 보하는 음식이었다. 계절에 따라 맞는 재료를 넣어 끓였다. 왼죽, 흰죽, 복죽, 원미죽, 장국죽, 버섯죽, 잣죽, 타락죽, 깨죽 등이 왕에게 올려졌다. 죽에 따르는 반찬은 젓국조치, 동치미, 나박김치, 마른찬, 간장, 소금, 꿀 등으로 간단하게 차려졌다.

수라상은 아침 저녁으로 먹는 밥상이다. 아침수라는 오전 10시, 저녁수라는 오후 6~7시에 먹었다. 상차림은 기본음식과 반찬으로 나뉜다. 기본음식으로는 밥, 국, 찌개, 찜 또는 선, 전골, 김치, 장 등이 있으며 반찬은 12가지를 올린다.

밥은 흰쌀밥, 팥밥 등 두가지였다. 팥밥은 붉은팥을 삶은 물을 밥물로 해 홍반으로도 불렸다. 밥은 곱돌솥에 안쳐서 화로에 참숯을 피워 짓는다. 흰밥에는 미역국, 팥밥에는 곰탕을 끓였다. 수라상 원반에는 흰밥과 미역국을 짝으로 올리고, 팥밥과 곰탕은 책상반에 놓았다가 왕이 원하면 바꿔 올렸다.

찌개는 맑은조치, 토장조치 등으로 작은 뚝배기에 끓인다. 맑은조치의 간은 소금·새우젓국·간장 등으로 맞추고, 토장조치는 된장이나 고추장이 들어간다. 찜은 동물성 식품, 선은 식물성 식품을 주재료로 썼다.

전골은 재료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즉석에서 볶아 익혀 먹는 음식으로 반드시 화로, 풍로에 숯불을 피워 만든다. 김치는 동치미, 배추김치, 깍두기 등 세가지를 차린다. 계절에 따라 재료와 김치 종류가 바뀐다. 장류는 필요한 종류를 종지에 담아 놓는다. 간장, 초장, 초고추장, 새우젓국, 겨자즙 등이 있다.

반찬은 조리법과 주재료가 겹치지 않게 12가지를 만든다. 고기·생선·산적·누름적 등 더운구이, 김·더덕·북어 등 찬구이, 전유어(얇게 저민 고기나 생선 따위에 밀가루를 바르고 달걀을 입혀 기름에 지진 음식), 쇠고기·돼지고기 편육, 나물, 생채, 조림, 젓갈, 장아찌, 수란·회·강회 중 두가지 등으로 구성된다.

궁중에서는 점심식사를 낮것이라 불렀다. 평일에는 과일, 과자, 떡, 화채 등의 다과반 차림을 하거나 미음·응이(죽과 미음의 중간 정도)를 먹었다. 종친이나 외척의 방문이 있을 때는 장국상을 받았다. 장국상에는 편육, 전유어, 김치 등을 간단하게 차린다. 장국상을 물리면 반드시 다과상을 올렸다. 일반적으로 떡·과자·과일이 나왔고, 음료로는 따뜻한 차나 화채·수정과·식혜 등을 계절에 따라 변화있게 구성됐다.

야참으로는 면, 약식, 식혜 또는 우유죽 등을 올렸다.

조선이 일본에 강제 합병되자 궁중에서 먹던 요리는 민간으로 전수됐다. 궁내부 주임관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궐내 연회의 궁중요리를 맡아 하던 안순환은 1909년 명월관을 개업하면서 궁중음식을 만들어 내보였다. 당시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궁중 연회에 참여하던 기생들이 명월관으로 오면서 각종 대신들이 찾아 조선 최고의 음식점으로 이름을 날렸다.

개업 초기에는 의친왕(순종의 이복동생), 박영효,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 등이 단골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언론인 및 애국지사 등이 드나들었다. 임금만이 먹던 궁중요리가 일부 특권층도 먹을 수 있는 요리로 변신한 것이다. 1918년 명월관이 불이 나 소실되자 안순환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으로 유명해진 태화관을 개점했다.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점했으며, 남대문 1가 옛 조흥은행 본점 자리에 식도원이라는 음식점을 새로 냈다.

지금까지 전해져온 궁중의 수라상은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 상궁이었던 한희순 씨의 영향이 크다. 그는 조선시대 말기 고종, 순종의 수라를 담당했던 수라상궁 중 하나다. 1960년대까지 창덕궁 낙선재에 거주한 왕족의 음식은 4명의 궁중내인이 도맡아 했다. 1970년 정부는 ‘조선왕조 궁중음식’을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하고 한희순 씨를 궁중음식연구원 1대 전수관으로 지정했다. 이후 그의 제자 황혜성 씨가 2대 기능보유자, 황혜성 씨의 딸인 한복려 씨가 3대 보유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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