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시간마다 1명 산재 사망, 출·퇴근 사고도 인정 … 정신질환, 업무 연관성 입증 아직 어려워
한국은 1970년대 이후 빠른 산업화를 통해 경제부흥을 이끌어냈지만 근로자들의 인권이나 작업환경은 여전히 선진국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산업재해다. 국내 산업재해 인명피해자는 1990년 이후 매년 9만명 선을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5분마다 1명이 산재로 다치고 5시간마다 1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산업현장의 사고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기업이 안전투자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있고 관련 전문가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위험을 유발하는 하도급 관행과 법 집행의 실효성 미흡, 저조한 기업 투명성 등도 산재가 줄지 않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근로자수와 화학물질사용량이 늘면서 위험의 총량 자체가 커지고 있기도 하다.
산업재해란 사업장의 근로자가 업무상 발생하는 재해로 부상, 질병, 신체장해, 사망 등을 당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엔 업무수행 중의 사고뿐만 아니라 사업장의 설비미비로 인한 사고, 업무수행을 위한 출장 중에 당한 사고, 사업주 제공 차량으로 출·퇴근하다 발생한 사고, 작업환경·근무조건등 유해요인으로 생기는 질병 등이 해당된다.
산재로 인정받으면 요양급여(치료비) 등이 지급된다. 하지만 산재 당사자가 직접 업무와 질병 및 사고와의 연관성을 입증해야 하고 근로복지공단의 급여인정 기준이 까다로워 산재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산재는 업무상 사고와 업무상 질병으로 나뉜다. 업무상 사고엔 근로자가 사업장내에서 작업시간 중 실제 작업, 용변 등 생리적 필요행위, 작업 준비 및 마무리 행위 등 작업에 수반되는 필요적 부수행위를 하던 중에 발생한 사고 부상 혹은 사망 등이 포함된다. 단 업무와 사고간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는 게 명백한 경우 산재로 인정되지 않는다.
또 작업외 시간인 경우에도 사업주가 관리하는 시설의 결함이나 사업주의 시설관리 소홀로 인해 재해가 발생했다면 산재로 인정된다. 하지만 근로자의 자해행위나 사업주의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위반한 행위가 원인인 경우 산재에 해당되지 않는다.
업무상 질병엔 △업무상의 부상에 기인하는 질병 △무겁고 힘든 업무로 인한 근육·건·관절의 질병과 내장탈장 △고열, 자극성의 가스나 증기, 유해광선, 이물질로 인한 결막염 등 안질환 △라듐방사선, 자외선, X-선, 기타 유해방사선으로 인한 질병 △덥고 뜨거운 장소에 있어서의 업무로 인한 열사병 등 열중증 △덥고 뜨거운 장소에 있어서의 업무 또는 고열물체를 취급하는 업무로 인한 제2도 이상의 화상및 춥고 차가운 장소에 있어서의 업무 또는 저온물체를 취급하는 업무로 인한 제2도 이상의 동상 △분진을 비산하는 장소에 있어서의 업무로 인한 진폐증 및 이에 따르는 폐결핵 등 합병증 △지하작업으로 인한 안구진탕증 △이상기압하 업무로 인한 감압병 기타의 질병 △제사 또는 방적 등의 업무로 인한 수지봉와직염 및 피부염 △착암기 등 진동발생공구 취급작업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신경염 기타 질병 △강렬한 소음을 발하는 장소에 있어서의 업무로 인한 귀질환 △영상표시단말기(VDT) 등 취급자에게 나타나는 경견완증후군 △납·수은·아말감·크롬·니켈·알루미늄·망간·비소·인·황화수소·아황산가스·일산화탄소·청산·벤젠·아세톤 등의 합금 또는 화합물로 인한 중독 및 속발증 △광산, 가성알카리, 염소, 불소, 석탄산 또는 이상의 화합물 기타 부식성 또는 자극성의 물체로 인한 부식·궤양·염증 △매연, 광물유, 동유, 철, 타르, 시멘트 등으로 인한 봉와직염, 습진, 기타 피부질환, 원발성 상피암 △환자의 검진, 치료, 간호 기타 병원체에 오염될 우려가 있는 업무로 인한 각종 전염성 질환 △습윤지에 있어서의 업무로 인한 와일씨병 △옥외노동에 기인하는 쯔쯔가무시병 △동물 또는 그 시체, 짐승의 털, 피혁 기타 동물성의 물체 및 넝마 기타 고물의 취급으로 인한 탄저병, 페스트 등이 포함된다.
출·퇴근 도중 당한 부상도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지난해 출·퇴근 산재 신청 건수은 794건이다. 이 중 산재로 인정된 것은 373건(46%)으로 집계됐다. 출·퇴근길 사고 절반은 산재로 인정받은 셈이다. 2011년의 경우 735건의 신청 사례 중 242건(33%)만 산재로 인정됐다.
출·퇴근하는 도중에 발생한 사고를 산재로 인정받으려면 사업주가 소속 근로자의 출·퇴근용으로 제공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다 사고가 발생하고,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의 관리 및 이용권이 근로자 측에 전담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일반적인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사고가 난 경우 공무원은 별다른 제한 없이 산재보상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일반근로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근로자가 운동경기, 야유회, 등산대회 등 각종 행사에 참가하거나 업무 후 접대를 하다 발생한 사고나 질병도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일례로 물류회사 영업과장으로 근무하던 최 씨는 2011년 10월 9일 대표이사의 지시로 직원 단합 및 회사 홍보를 위한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10㎞ 코스를 완주했다. 그는 1주일에 평균 2~3회 거래처 관계자를 만나 밤늦게 까지 술 접대를 했고 두 달에 한번 꼴로 해외출장을 다니며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마라톤대회 후 보름이 지난 뒤 가슴통증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심전도 이상 진단을 받았다. 병가를 내고 쉬던 최 씨는 며칠 뒤 가족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 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지만 공단은 “마라톤 참가와 발병과의 연관성이 희박하다”며 거부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은 “최 씨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충분한 운동능력 향상 없이 마라톤대회에 참여하고 완주한 것이 심근경색의 유발요인이 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 “오로지 망인의 흡연 습관이나 기존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최근엔 지난친 과로로 인한 질병도 산재로 인정받았다. 얼마전 과중한 업무를 하고 귀가한 뒤 다시 상사의 출근 독촉을 받고 출근 준비를 하다 뇌출혈로 숨진 20대 황모 씨가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그는 사망 1주일 전까지 휴일 근무를 포함해 20시간에 가까운 초과 근무를 했다. 토요일에도 오후 9시까지 근무했다. 이틀 뒤 “작업한 부분에 문제가 생겼으니 바로 현장으로 출근하라”는 상사의 지시 전화를 받았지만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상사는 황 씨의 집 앞까지 찾아와 당장 출근하라고 독촉했고 황 씨는 출근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화장실에서 쓰러졌고,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결국 사망했다.
황씨의 아버지는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 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거부됐다. 이어 재심사 청구도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로부터 기각 결정을 받자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황씨는 이 사건 사고 발생 전 1주일 내내 야근을 하면서 매우 피곤한 모습이었고 육체적으로 힘들어 했다”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과로한 상태에서 상사로부터 본연의 업무가 아닌 지원 업무와 관련해 질책과 출근 독촉을 받은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어 “황씨가 받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혈압 상승이 뇌출혈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대부분 의학적 견해”라며 “황씨는 사고 당시 만 26세의 젊은 나이로 특별한 기존 질환이 없었던 점, 평소 건강 상태가 정상 범주에 속했던 점, 황씨의 혈압이 순간적으로 오를만한 다른 사정이 엿보이지 않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진상 고객으로 인해 병을 얻었다면 산재로 인정될까. 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상품 판매원으로 일하는 A씨는 얼마 전 쓰러져 병원 신세를 졌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공황장애 판정을 받아 산재보험 신청을 했지만 업무 연관성을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A씨는 결국 백화점을 그만 두고 자비를 들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1981년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일반 제조 및 생산현장 중심의 산재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로 인해 일반 서비스업종인 감정노동자들은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건강이나 목숨을 잃어도 산재사고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산재보험 적용을 받은 산재는 9만909건이다. 이 중 스트레스 등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뇌심혈관계질환 산재는 676건, 자살을 산재로 인정한 경우는 14건에 불과했다. 서비스산업 사업장에서 감정노동자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등 정신질환 등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정신질환은 외형상 잘 드러나지 않는 데다 업무 연관성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해외 선진국에서는 노동자 정신건강에 대한 연구조사를 실시하고 제도적 기반도 마련해놨다. 1999년 정신질환에 대한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제정한 일본은 2010년 정신질환을 산재로 인정한 건수가 308건으로 한국보다 15배나 많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의 경우 직장 업무로 인해 정신질환이 생겼다는 걸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며 “스트레스와 질병이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는지에 대한 판단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산재보험은 요양급여·휴업급여·장해급여·직업재활급여 등으로 나뉜다. 근로자는 업무 중에 발생한 사고나 질병으로 산재를 당하면 근로복지공단에 치료 비용 전액과, 치료 기간 동안 일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휴업급여를 함께 신청하면 된다.
업무상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려 4일 이상 요양이 필요한 경우에는 ‘요양급여 신청서’를 공단에 제출해 승인받아야 한다. 이때 신청서는 3부를 작성해 공단과 산재보험 의료기관, 소속 회사에 각각 1부씩 제출한다. 신청서는 공단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내려받거나 가까운 공단 지사나 산재보험 의료기관에서 받을 수 있다.
사업주가 산재 처리를 거절하더라도 요양 신청이 가능하다. 산재보험 의료기관은 근로자의 재해가 업무상 재해로 판단될 경우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 요양급여의 신청을 대행할 수 있다. 업무상 질병으로 요양급여 신청한 경우에는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를 거쳐 업무상 재해 여부를 판정받는다. 통상적으로 사고의 경우는 7일 이내 처리가 완료되나 질병의 경우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거쳐야 하므로 좀더 시일이 걸린다.
요양으로 인해 취업하지 못한 산재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활 보호를 위해 4일 이상의 요양으로 취업하지 못한 기간(입원·통원)에 대해 평균임금의 70%를 휴업급여로 받을 수 있다. 치료 후 장해가 남을 경우 장해급여도 신청할 수 있다. 만약 근로자가 사망하면 유족은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받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산재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구조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산재를 입증하기 위해선 노동시간, 업무강도, 재해 발생 직전의 업무내용 변화 등을 입증할 출퇴근 기록, 작업량의 변화 등 사용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 필요한데 노동자와 유가족은 여기에 접근하기 어렵다.
재해로 인해 노동자가 사망했을 경우 유가족이 재해 직전 노동자의 업무내용이나 노동 강도 등에 대해 알지 못하기에 입증이 더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사업주는 유가족에 일정 금액의 보상금을 지급을 제안하고, 유가족 입장에서도 입증 여부가 불투명한 산재를 신청하기 보단 보상금을 받고 사건을 덮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정의당 정책위원회는 사업장에 대한 조사권한이 있는 근로복지공단이 입증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책위 관계자는 “사업장에 대한 조사권한이 있는 근로복지공단이 입증 책임의 일부를 지는 게 타당하다”며 “대신 현재 근로복지공단에게 주어진 조사권한을 강화해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준 가천대 길병원 예방의학과 교수는 “현 산재보험은 사업주 배상 책임보험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에 기초해 노동자의 건강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며 “산재인정방식을 ‘원인주의’에서 벗어나 ‘결과주의’ 시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점차 단순 사고성 재해의 비중이 줄어들고 개인 질병과 원인을 분리하기 어려운 직업병 및 작업관련성 질환이 증가하는 선진국형 구조로 진입하고 있다”며 “원인주의에 기초해 수급자격을 규정하면 재해 인정을 소극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장기적인 대안으로 △비정규직·이주노동자 등 모든 노동자를 적용 대상으로 확대 △보험료 부과·징수 방식을 사업장 단위에서 개별 노동자 단위로 변경 △근로복지공단의 사전 승인 절차 폐지 등을 제시했다.
임 교수는 “재해노동자 누구나 산재보험에 접근 가능하고 급여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며 “같은 사회보험인 건강보험과 마찬가지로 수급권자의 권리에 차별이 없도록 적극적인 구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