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6개월간 총 3034억5100만원 어치 식욕억제제 공급돼 … 펜디메트라진 사용량이 세계 2위
모 클리닉에서 한 여성 환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의사에게 ‘왜 그 약을 더 이상 처방하지 않느냐’고 난동을 부린다. 의료진들은 환자를 진정시키려 하며 ‘이미 살이 많이 빠져서 더 이상 먹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알고 보니 ‘식욕억제제’를 처방해주지 않아 환자가 화가 난 것이다. 충분히 말라 보이는 여성이지만 그 약을 먹지 않으면 살이 찔까봐 겁이 난다며 제발 처방해주면 안되느냐며 애원하기까지 한다. 결국 영업방해로 경찰과 함께 병원을 나갔다. 그 여성이 그토록 원하던 식욕억제제, 대체 효과가 어느 정도이길래 이런 사단이 나는 걸까.
식욕억제제는 식욕을 느끼는 뇌에 세르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보내 배고픔을 덜 느끼게 하거나 포만감을 들게 만드는 약이다. 자연스레 음식 섭취량이 줄며 식단조절이 이뤄져 체중감량이 유도된다.
대부분의 식욕억제제는 본래 우울증 치료를 위해 개발됐다. 펜터민, 디에칠프로피온, 펜디메트라진, 마진돌 등이 대표적 성분이다. 이들 성분을 복용했을 때 식욕저하 및 체중감소 효과가 확인돼 비만치료제로 확대됐다. 하지만 의존성이나 내성이 발생할 수 있어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마약류(향정신성의약품)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식욕억제제를 활용하면 다이어트 효과가 나타나지만 오남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우려가 크다. 따라서 비만이라고 아무에게나 처방되는 것은 아니다. 체질량지수(BMI)가 30㎏/㎡ 이상이거나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증상이 있는 환자가 27㎏/㎡ 이상일 때 처방할 수 있다. 또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으로 체중감소의 효과가 없는 사람에게 처방하는 게 원칙이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의사에게 최근 1년 이내에 식욕억제제를 복용한 경험이 있는지, 약물 알레르기나 과민증이 있는지, 현재 복용중인 다른 약이나 건강보조식품이 있는지 등을 상세히 말해야 한다.
이들 약물은 부작용의 우려가 커 무조건 의사의 처방에 따라 복용해야 하며 자신이 임의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 비만치료제는 약물중독과 자살충동, 기분장애, 심장질환 위험 증가 등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장기 복용 후 약을 중단하면 극도의 피로, 우울증, 수면장애 등이 유발되기도 한다.
실제로 결혼 전 다이어트를 위해 이 약물을 복용한 헤어디자이너 이모 씨(28·여)는 약물을 복용한 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기분이 지나치게 좋아졌으며, 잠이 오지 않는 경험을 했다. 그는 “하루에 2시간만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며 “그렇지만 약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아 피곤한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약 복용을 멈췄을 때 무기력증과 식탐이 어마어마하게 돌아와 오히려 요요현상을 겪고있다”며 “아주 급한 일이 아니라면 웬만해선 약 복용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이 씨뿐만 아니라 식욕억제제를 복용한 대다수 여성은 드라마틱한 체중감량 효과를 보면서 부작용이 나타나도 약을 복용했다. 이를 중단한 뒤에는 요요현상을 겪거나 무기력증으로 힘들어했지만, ‘언제라도 다시 약을 먹으면 살을 뺄 수 있다’며 약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식욕억제제에 만성적으로 중독된 경우 피부병, 불면, 자극과민, 신체기능의 과도한 증가, 성격 변화, 정신분열병 유사 정신이상 등이 나타난다. 심각한 중독 시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2010년에는 시부트라민 성분의 비만치료제는 심혈관 및 교감신경계 부작용 문제로 허가가 취소되기도 했다.
때문에 식욕억제제는 대부분 ‘4주 이내’ 복용할 것으로 제한된다. 의사가 모니터링하면 최대 3개월까지 쓰는 게 원칙이다. 또 이들 약물은 성인을 대상으로만 허가돼 있어 16세 미만에는 처방할 수 없다. 동맥경화증, 심혈관계질환, 고혈압, 녹내장 등의 병력을 가졌다면 식욕억제제 복용은 절대 금물이다. 이러한 병력을 가진 환자가 식욕억제제를 섭취했을 때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약을 섭취하는 기간에는 다른 식욕억제제를 병용하거나 플루옥세틴, 서트랄린, 플루복사민, 파록세틴 등의 우울증약과 함께 투여해선 안 된다. 음주 역시 혈압상승 등 심한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으므로 자제한다.
전문가들은 ‘비만치료제를 오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해도 국내 향정신성 식욕억제제의 소비는 세계 정상급이다. 국제마약감시기구(INCB)의 ‘2013 향정신성물질의 평가’에서 한국은 펜디메트라진의 사용량이 세계 2위로 집계됐다. 펜터민도 세계 5위를 기록했다. 그만큼 국내서 향정신성 식욕억제제 복용이 대중화돼 있다는 의미다.
남윤인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출받은 ‘식욕억제제 요양기관 공급내역’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식욕억제제 공급·유통수량은 3억7564만정으로 이 가운데 향정신성의약품은 44.6%인 1억6735만정으로 나타났다.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는 2010년 대비 29.6% 증가했다.
총 향정신성약물 중 2009~2013년 상반기까지 요양기관으로 공급된 내역을 살펴보면 △펜디메트라진이 44만5799개(1371억4500만원) △펜터민이 19만7136개(1515억3600만원) △디에틸프로피온이 3만3246개(89억8200만원) △마진돌 1만775개(57억8800만원) 등이었다. 4년6개월간 총 3034억5100만원어치의 향정신성 식욕억제제가 공급된 것이다.
식욕억제제는 마약류에 포함되는 의약품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방문하면 쉽게 처방받을 수 있고, 관리체계가 부실하며, 비정상적으로 마른 체형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작용해 ‘누구나 먹으면 살이 빠지는 약’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백용욱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사무국장은 “향정신성 식욕억제제는 BMI에 맞춰 처방해야 하고, 복용 기한이 제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이는 전문의약품의 복용 지침을 위반한 것이며, 의약품을 다이어트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으로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펜터민 계열의 약물은 자칫 잘못하다가 일상 행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이상, 착란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이 높다”며 “이에 대한 설명은 정작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유은정 좋은클리닉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체중을 감량하고 유지하는 데 식욕조절은 필수지만 ‘식욕을 없애야 한다’는 강박으로 식욕억제제 중독에 빠진 이들이 흔하다”며 “식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폭식을 하게 되는 핵심 감정을 살펴보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심리적인 허기는 식욕억제제로도 치료할 수 없다”며 “환자가 반복적으로 폭식하게 되는 행동패턴을 물어봐 주고, 올바른 식욕제어와 다이어트의 방향을 제시해야 식욕억제제에 의존하지 않고 요요현상이 없는 다이어트가 이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