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키 작으면 심장질환·치매, 키 크면 기흉·암 위험 높아 … 키 질병에 미치는 영향 10% 불과
최근 외모, 특히 키가 개인의 중요한 경쟁력으로 인식되면서 ‘키가 크면 단명한다’, ‘장신일수록 지능지수가 높다’, ‘키가 작으면 성격이 나빠진다’ 등 키와 관련된 이야기들의 진실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키와 질병 또는 수명과의 연관성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지만 의사들도 속 시원히 대답하지는 못한다. 생활습관, 기저질환, 식이 등 다른 변수를 통제해 특정 질병과 키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 연구팀은 키가 작은 사람, 다른 연구팀은 키가 큰 사람이 수명이 높다고 발표하는 등 학계에서도 키와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보고된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키가 큰 사람은 암, 키가 작은 사람은 심장질환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게 유력하다.
여러 질병 중 암은 키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돼왔다. 2012년 루이자 주콜로 영국 브리스톨대 교수팀은 남성의 키가 10㎝ 클수록 전립선암에 걸릴 위험이 약 6% 증가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연구에서 키 큰 남자는 인슐린유사성장인자-1(IGF-1)의 수치가 높아 암 발생률이 증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국립암협회도 최근 키가 2㎝ 클수록 췌장암 위험이 6~10% 증가하며 남자는 185㎝, 여자는 167㎝ 이상일 때 췌장암 위험이 81%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공개했다.
키가 큰 사람은 난소암 발병 위험도 높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에 따르면 보통 키가 5㎝ 클 때마다 암 발생률이 7%씩 높아진다.
심장질환은 특히 키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의학계에선 키가 작으면 심장질환 발병률이 높다는 게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닐레쉬 사마니 영국 레스터대 순환기내과 교수가 전세계 관상동맥 심장질환 환자 6만5066명과 정상인(대조군) 12만8383명을 대상으로 키와 심장질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분석한 결과 키가 6.35㎝ 작아질 때마다 심장질환의 발병 위험이 13.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키가 185㎝ 이상인 남성은 170㎝ 이하인 남성보다 심장질환 발생률이 35% 낮았다.
이같은 결과는 작은 키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나쁜 콜레스테롤’로 알려진 LDL(저밀도지단백) 콜레스테롤과 혈중 지방성분인 ‘트리글리세리드’ 수치를 높이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키가 작으면 치매 위험도 높아진다. 톰 러스 영국 에든버러대 의대 교수는 남성은 키가 165㎝ 이하인 경우 173㎝ 이상인 사람보다 치매에 의한 사망위험이 50%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여성도 키가 155㎝ 이하인 경우 163㎝ 이상인 여성에 비해 치매 위험이 35% 높았다.
키가 치매 발병에 어떤 기전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과도한 스트레스, 영양부족, 기저질환 등이 키를 덜 크게 할 수 있고 노년이 된 뒤 치매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측된다. 즉 작은 키가 치매를 유발하기보다는 같은 위험인자나 생활습관 탓에 작은 키와 치매가 한 사람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게 맞다.
또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은 폐에 천공이 생기는 기흉의 발병 위험이 높다. 기흉은 일반인에게 다소 생소하지만 흉부외과에서 환자가 가장 많은 질환 중 하나로, 10~20대 젊은 나이에 잘 생긴다. 폐와 흉곽 사이 빈 공간인 흉막강에 공기가 차는 질환으로 흉통과 호흡곤란이 주요 증상으로 나타난다. 폐의 일부분이 약해지면서 허파 표면에 작은 풍선 같은 폐기포(기낭)가 형성돼 있다가 터져 폐 속에 있어야할 공기가 흉막강 내로 흘러나와 발생한다.
손동섭 중앙대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은 폐의 가장 위쪽 부분인 폐 첨부에 소기포(기낭)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고, 이 부위는 작은 충격에도 잘 파열된다”며 “젊은 남성은 상대적으로 활동량이 많아 소기포가 쉽게 파열돼 기흉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폐첨부는 폐의 가장 위쪽 부분이어서 혈관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소기포가 잘 형성된다. 키 큰 사람은 폐첨부의 경폐압력이 상대적으로 높아 소기포 생성률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키는 특정 질병뿐만 아니라 수명에도 일부 영향을 준다. 최근 연구결과 키가 작은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토마스 사마라스(Thomas Samaras) 박사가 국제학술지 ‘생물인구학과 사회생물학(Biodemography and Social Biology)’에 게재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키가 작고 몸무게가 덜 나가는 남성은 키가 크고 무거운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수명이 더 길었다.
브래들리 윌콕스 미국 하와이대 의대 교수도 하와이 거주 일본계 주민 8006명을 50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키가 클수록 수명이 짧은 경향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키가 작은 사람은 수명 관련 ‘FOXO-3 유전자’의 변이형을 갖고 있어 키는 작은 대신 수명이 연장된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벨기에 루뱅대 연구팀도 동물조사를 통해 같은 결과를 입증했다. 이들은 다양한 동물군에서 수명과 키, 체중, 체형 등과의 연관성을 조사했다. 이 연구에서 개, 생쥐, 말, 원숭이 등은 덩치가 작을수록 수명이 더 긴 것으로 조사됐다. 아시아 코끼리도 덩치가 더 큰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수명이 더 길다.
이에 대해 연구팀은 “키가 작으면 DNA가 덜 손상되고, 세포가 파괴돼도 쉽게 대체되며, 심폐기능이 더 효율적으로 작용하고, C-반응성 단백(C-Reactive Protein, 체내에 급성인 염증이나 조직의 손상이 있을 때 조기에 혈청에 증가하는 단백의 일종)이 적다는 점 등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사는 이유도 키가 작은 것과 연관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키가 크면 장수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전문가도 있다. 성주헌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와 송윤미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팀이 국내 여성 24만4519명을 대상으로 키와 사망률간 상관관계를 조사한 결과 키가 5㎝ 클수록 사망률이 7%씩 감소했다.
성 교수에 따르면 키가 5㎝ 더 커질 경우 특히 호흡기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16% 가량 줄었다. 이밖에 뇌졸중은 16%, 당뇨병 및 순환계질환은 13%, 허혈성심장질환은 7% 가량 사망위험이 감소했다. 반면에 키가 5㎝ 클수록 암에 의한 사망위험도가 5% 증가했다.
성별로는 키가 5㎝ 커질 때마다 남성은 5%, 여성은 7%씩 암 발생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녀 모두 키가 클수록 발생률이 높아지는 암은 대장암과 갑상선암이다. 성별로 분리할 경우 남성은 전립선암, 여성은 유방암과 난소암 위험이 키가 클수록 증가했다.
반면 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암은 남자의 경우 위암과 췌장암, 여성은 위암·직장암·자궁암이다.
성주헌 교수는 “키가 큰 여성의 사망률이 전체적으로 낮은 것은 심혈관계질환, 뇌졸중, 당뇨병 등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키 큰 사람에서 암 발생률이 높아지는 원인으로는 “키가 크다는 것은 어릴 때 많은 영양을 공급받았다는 의미”라며 “유·소년기의 영양 상태가 인슐린, IGF-1, 스테로이드 등의 분비에 영향을 미쳐 암 발생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키가 크면 몸의 세포가 더 많고, 세포가 많을수록 통제가 되지 않는 세포의 비율이 높아져 암 위험이 증가한다는 추측도 있다.
결론적으로 키는 질병이나 수명에 일부 영향을 주긴 하지만 정도가 미미하기 때문에 평소 규칙적인 생활습관이나 균형잡힌 식단을 유지하는 게 건강관리의 핵심이다. 전문가마다 의견은 다르지만 대체로 키가 건강이나 수명에 미치는 영향은 10%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키가 크거나 작더라도 다른 통제변수(식습관, 운동량, 중성지방 및 콜레스테롤 수치)를 잘 관리하면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TV 등 방송매체에 휘둘려 키나 외모 등 외적인 면에 집착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웰빙라이프의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