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의사, 교수, 법조인 등 사회 고위층의 성범죄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 갑을관계를 악용한 ‘권력형 성범죄’라는 점을 비꼬아 ‘성(性) 갑질’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최근 한 여군 대위가 상관의 성추행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도 전형적인 갑을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지난해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골프장 경기진행요원(캐디)의 신체 일부를 수차례 접촉하는 등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도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한 혐의로 입건됐다.
지난해 9월 당시 국립중앙의료원장을 맡고 있던 Y모 씨는 20대 계약직 여직원에게 입을 맞추거나 신체 일부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피해자는 성추행 사실을 숨기다가 사직 후 Y 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Y 씨는 임기 만료를 앞두고 고소 사실이 알려지자 돌연 사퇴했다.
대학생 A 씨(20·여)는 얼마전 학과 술자리에서 지도교수 옆자리에 앉게 됐다. 술자리 내내 교수가 어깨와 허리 부분을 스치듯 만졌지만 취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스킨십 정도는 점차 심해졌고 결국 볼에 키스를 하는 지경에 이르자 A 씨는 기겁하며 자리를 나왔다. 상황이 이런데도 선배나 동기들은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였고, 그는 수치심으로 학교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경찰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권력형 성폭력 사건은 2010년 140건에서 지난해 283건으로 4년새 약 두 배 늘었다. 같은 기간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강제추행도 84건에서 164건으로 증가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성폭력 범죄의 암수(暗數)범죄율이 87.5%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발생하는 성범죄는 통계 수치의 5∼6배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사회가 자유화되면서 옛 권위주의 시대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권력층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도 사건이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국민들의 의식은 깨어나고 있지만 성추행을 자행한 고위층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개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특권 의식에 젖어서 나온 행동”이라고 비판한다. 즉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이 정도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의미다.
세계적인 뇌·신경과학자인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칼리지의 이언 로버트슨 박사는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변한다”며 “이런 경우 남녀 모두 성적 충동을 촉진하고 공격적으로 만들 수 있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이 활발하게 분출되면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목표 달성 및 자기만족에만 집중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권력형 엘리트 출신들은 위계와 권력 관계에 매우 민감하고 권력의 작동 방식도 잘 알고 있다. 이런 특성들이 성범죄에도 반영돼 “이만한 지위면 이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최지나 한국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은 “상당수의 고위층들이 직급이 낮은 사람은 아무렇게 대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법조인, 의사, 대학교수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만진 게 아니고 건드렸을 뿐’, ‘툭 쳤을 뿐’ 같은 변명을 하는 것으로 볼 때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고위층들은 심한 인지왜곡현상을 겪는 듯하다”며 “이렇게 되면 스스로 성추행을 한 게 아니라고 믿게 되고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김철권 동아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성추행을 상습적으로 하면 인지왜곡 현상이 점차 심해진다”며 “설사 피해여성이 거부의사를 표해도 ‘상대방도 나와 같이 즐긴다’고 인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향유하던 권력층은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자신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경각심이 커졌지만 자신의 문제로 보지 않으니 조심하지 않는 셈이다. 여기에 여성은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 자신의 요구가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생각한다. 이처럼 잘못된 여성에 대한 인식은 성차별뿐 아니라 성추행이나 성희롱 등 성범죄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는 턱없이 약하다. 일반 형법상 강제추행죄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1500만원 이하 벌금형이 적용되지만 성폭력특별법 상 업무상위력등에의한 추행죄는 2년 이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뿐이다.
처벌 수위나 징계 규정의 여부보다는 실제 처벌의 시행 여부가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 여성단체 관계자는 “대책보다는 실효성 있는 처벌이 관건”이라며 “과거엔 성범죄가 발생하면 겉으로는 처벌 강화 대책을 발표하고 뒤로는 제 식구 감싸기 식의 관행이 되풀이되곤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고하면 공정한 조사가 이뤄지고,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는 수사 및 재판 관행이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희현 경찰청 생활안전국장은 “권력형 성범죄는 가해자가 학점, 인사고과, 경기 출전 등 피해자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므로 외부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드물고 피해가 장기간 지속되는 게 특징”이라며 “미국의 ‘클러리법’처럼 국가기관, 학교, 사업장 등에서 다각적으로 통계관리·실태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