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균 수명 47세, 종기로 인한 사망 최다 … 운동부족 과도한 성생활, 업무 스트레스, 소극적 의술 원인
조선시대 때 왕의 건강은 당시 의술이 가장 뛰어난 어의들이 관리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왕들의 수명은 평균 44세로 그리 길지 못했다. 총 27명의 왕 중 50세 이상까지 생존한 경우는 절반에도 못 미친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윤택한 삶을 살았던 왕들의 수명이 짧았던 이유로는 운동 부족, 과로, 과도한 성생활, 소극적인 의술 등이 꼽힌다.
흔히 수라상엔 산해지미가 잔뜩 올라왔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왕의 한의학’ 저자인 이상곤 한의사는 “왕은 드라마 대장금처럼 진수성찬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며 “과도한 업무와 집권 스트레스 탓에 입맛을 잃어 죽만 먹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시대 성리학은 왕들에게 내성외왕(內聖外王), 즉 안으론 성인 밖으로는 왕을 바랐기 때문에 금욕적인 식생활을 요구했다”며 “효종이 ‘전복을 먹었다’고 했더니 송시열이 ‘음식을 찾는 것은 천한 것’이라고 충고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조선의 왕들은 대부분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질병으로 고생했다. 세종은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라고 탄식했고, 현종은 “오장이 불에 타는 듯해 차라리 죽고 싶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지독한 서자 콤플렉스까지 가졌던 선조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왕 노릇 하다가 미칠 것 같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다.
왕들을 가장 괴롭혔던 질환은 풍, 종기, 천식이었다. 멸균 소독약이나 항생제가 없던 시절 종기는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게다가 왕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된다는 유교적 관습탓에 종기를 직접 짜지 않고 방치해 증상이 악화된 경우도 많았다.
이 한의사는 “전제왕정 국가에서 왕의 건강관리는 국가의 핵심 정책일 수밖에 없었다”며 특히 종기는 막중한 위기관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문종은 종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죽었고, 효종은 종기 치료 중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었으며, 정조는 개혁 정치 추진 중 종기가 도져 역시 생을 마감했다. 이는 곧바로 쿠데타, 북벌정책의 좌절, 개혁정치의 쇠퇴, 그리고 왕조 멸망의 가속화를 만들었다. 이 한의사는 “왕의 육체는 곧 조선 왕조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바로미터가 됐다”며 “역사학에 한의학의 관점을 더해 조선 왕조 역사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 초기 왕들은 유난히 허약했던 문종이나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단종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태조 이성계(1335~1408년)는 천하 제일의 명궁이자 백전무패를 자랑하는 용장이었지만 말년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64세 이후부터 건강이 급격이 악화돼 67세 때 병 치료를 위해 평주에서 온천욕을 하기도 했다. 68세 땐 중추신경계 질환인 풍질(風疾)을 앓았다가 74세 때 재발해 이후 사망할 때까지 넉달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신뢰했던 삼봉 정도전과 아들 방번·방석이 살해당하면서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은 것도 건강을 해친 주원인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태조는 혼수 상태에서 어의가 준 우황청심원을 삼키지 못해 사망했다.
정종(1357~1419년)은 태조의 둘째 아들로 원래 권력욕이 없었지만 1차 왕자의 난 이후 명분을 얻으려는 태종 이방원의 등쌀에 못이겨 떠밀리듯 왕이 됐다. 평소 허약한 체질인데다 신경이 예민했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소문난 격구 마니아였는데 이는 허약한 심신을 이겨내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53세부터 병명을 알 수 없는 질환을 앓아 병상에 누웠고 64세 때 사망했다.
뒤이어 즉위한 태종(1367~1422년)은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동생들을 죽인 냉혈한, 강력한 정치력으로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주인공, 위대한 왕 세종의 아버지 등으로 후세에 기억된다. 호전적이고 결단력 있는 성품과 달리 건강은 의외로 허약한 편이었으며, 자신의 아버지처럼 평생을 풍질로 고생했다. 47세 되던 해 원래 있던 풍질이 악화돼 심한 통증으로 고통받았다. 손 부위가 시리고 아픈 탓에 흙을 집기가 어렵다는 당시 기록을 살펴볼 때 그의 풍질은 현대의 류마티스관절염, 통풍, 경추 신경근증 등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56세 때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사망했다.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세종(1397~1450년)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이었다. 수라상에 반드시 고기가 있어야 식사를 할 정도로 육식을 좋아한 반면 선왕들과 달리 사냥이나 격구 등은 멀리해 비만한 체구였고, 지독한 워커홀릭인 탓에 항상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는 각종 질병에 쉽게 노출되는 원인이 됐다.
이미 29세부터 과도한 글읽기와 업무로 두통과 이질을 앓기 시작했으며 35세 땐 할아버지인 태조와 아버지 태종처럼 풍질로 고통받았다. 또 30대 중반부터 목마름 증상을 자주 호소해 하루에 마시는 물의 양이 한 동이가 넘었다는 기록을 볼 때 소갈증(消渴症), 즉 당뇨병을 앓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 질환은 목이 심하게 말라서 물을 마셔도 오줌이 적게 나오는 것을 소갈로 불리다가 이후 한의학 용어로 바뀌는 과정에서 당뇨병을 의미하게 됐다. 내분비호르몬인 인슐린과 당대사(糖代謝)와의 상관관계에서 초래된다. 한의학에 따르면 갈증이 심해 물을 많이 마시고, 소변을 자주 보는 대신 소변량은 적으며, 얼굴이 붉고 이마는 윤택이 나며 입과 혀가 마르는 증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진행되면 다식을 해도 배가 고프고 체중은 점점 줄어든다.
43세부터는 과로와 당뇨병으로 인한 안질환과 한 쪽 다리의 저림 및 통증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왼쪽 눈이 거의 실명될 정도로 악화돼 어두운 곳은 지팡이와 내관의 도움 없이 왕래하기가 힘들었다. 현대의학 개념으로 당시 세종은 당뇨병으로 인한 당뇨망막병증이나 당뇨병성 백내장을 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50세부터는 풍증으로 인한 수전증이 생겨 수결을 하기가 어려웠으며, 52세부터는 대신들을 접견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갖은 치료법을 사용해봤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54세로 눈을 감았다.
세종의 장남 문종(1414~1452년)도 아버지처럼 과로로 인해 건강을 해친 케이스였다. 성군이 될 성품과 높은 학문적 지식을 보유했지만 정작 건강관리에 실패해 고작 3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고, 이는 아들인 단종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록에 따르면 문종은 어릴 때부터 등에 나는 종기인 등창을 자주 앓았다. 고약이나 거머리를 붙이거나 약물을 복용케 했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사망했다.
현대 의학에서 종기는 촌각을 다툴 정도로 위험한 질병이 아니고, 항생제 등으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이지만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비운의 왕 단종(1441~1457년)도 아버지처럼 원래 몸이 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말을 약간 더듬는 증상이 있었고 구역질을 자주했다. 숙부인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킨 뒤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고 1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세조 실록엔 그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최근엔 세조가 심복을 보내 살해했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조카를 살해한 피도눈물도 없는 군주 혹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을 통해 성종의 치적에 발판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되는 세조(1417~1468년)는 젊은 시절엔 건강했지만 보위에 오른 40대 이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그가 정확히 어떤 질환을 앓았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악몽에 자주 시달리고 정신질환에 처방했던 ‘칠기탕’을 자주 복용했다는 기록을 볼 때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야사엔 그도 문종처럼 지독한 종기로 고생했고 증상이 온몸에 퍼질 정도로 악화돼 온천을 자주 이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각에서는 그가 문둥병을 앓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세조의 아들 예종(1450~1469년)은 단종을 제외하고 가장 단명한 왕이다. 그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발 부위 피부병 외에는 앓고 있는 질환이 없었고 허약한 체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실권자인 신숙주도 ‘예종이 이렇게 갑자기 사망하게 될 줄을 몰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세조에게 살해당한 단종과 수많은 인물들의 원혼이 예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성종(1457~1494년)은 남다른 정치력으로 혼란했던 사회를 안정시키면서 조선 중기를 열은 왕으로, 특이하게 더위병을 앓았다. 11세 더위를 심하게 먹어 인사불성이 된 뒤 여름철만 되면 증상이 나타났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여름철인 6~8월에는 아예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하는 경연에도 나가지 않았다.
27세부터는 치통을 앓아 식사를 적게 했고 말년에는 천식, 설사, 배꼽 밑 종기 등으로 고생했다. 그가 38세라는 짧은 나이에 사망한 것은 과도한 성생활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그는 늘 여자를 가까이 했고 이는 중전인 폐비 윤 씨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윤 씨는 질투심에 눈이 먼 나머지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 왕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 결국 폐위돼 사가로 쫓겨났고 몇 년 뒤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이는 훗날 연산군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조선 팔도에 피바람이 불게 한 원인이 됐다.
연산군(1476~1506년)은 세자 시절인 18세 때부터 종기를 앓았고 여색을 밝혀 가슴이 답답하고 갈증·구역질·수면불안이 나타나는 번열증으로 고통받았다. 특이하게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풀벌레와 뱀을 즐겼 먹었고, 이로 인해 중종 반정으로 폐위된 뒤 역질(전염병의 일종)에 걸려 사망했다. 사망 당시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로 고통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1488~1544년)은 비교적 건강했다가 45세 이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풍증으로 인해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 종기가 생겨 고생했으며, 57세에 사망하기 직전까지 천식과 치주염 등을 앓았다.
인종(1515~1545년)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이를 이기지 못해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중에는 식사를 잘 들지 못해 기력이 약해져서 사람에게 부축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재위기간은 고작 8개월에 불과하다.
본래 허약한 체질이었던 명종(1534~1567년)은 설상가상으로 30세 때는 세자가, 32세 때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죽었다. 슬픔으로 인해 건강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일각에서는 희대의 악녀로 평가받던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횡포 속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이 악화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우유부단의 상징이었던 선조(1552~1608년)는 원래 비위와 원기가 약했다. 왜란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질병 치료로 침을 자주 맞았다. 46세 때는 가슴 통증과 이명증(耳鳴症)이 있었으며, 52세 때는 감기로 인해 약을 자주 복용했다.
광해군(1575~1641년)은 28세 때 치통, 30세부터는 해마다 안질을 앓았으며 인조반정으로 유배된 뒤에도 조정이 내의(內醫)를 보내야만 했다.
‘굴욕의 왕’ 인조(1595~1649년)는 원래 건강했다가 38세 때부터 건강이 악화됐다. 55세 때 감기에 걸린 뒤 병세가 위독해져 사망했다. 당시 세자(효종)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 먹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북벌정책으로 잘 알려진 효종(1619~1659년)은 특이하게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41세 때 머리 위에 난 작은 종기가 점점 악화되자 나쁜 피를 뽑고자 의원을 불러 침을 놨다가 출혈이 그치지 않아 눈을 감았다.
현종(1641~1674년)은 젊어서부터 위장병과 안질, 가려움증, 두통, 부스럼 등 다양한 병을 앓았다. 34세 때 다리통증, 두통, 열로 인해 위독해져 결국 사망했다.
‘환국 정치의 달인’ 숙종(1661~1720년)은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해 자신의 병에 대해 ‘내 성질이 너그럽고 느슨하지 못해 정무에 신경 쓰느라 먹고 자는 것을 제때 못하고 화병이 날로 커졌다’고 자가진단하기도 했다. 60세 때 복부 팽만과 구역질 등으로 사망했다.
경종(1688~1724년)은 세자 시절인 12세 때부터 병을 앓는 등 허약 체질이었다. 35세 때 음식물에 독약이 들어 있어 토하기도 했던 그는 36세 때 병세가 위중해져 세상을 떠났다. 야사에는 그의 모친인 장희빈이 사사를 받기 직전 앞에 있던 세자(경종)의 음경을 잡아 당겼으며 그 이후 경종이 시름시름 앓았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역대 왕 중 가장 장수한 영조(1694~1776년)는 원래 젊었을 때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40세가 되던 해에는 복부 통증으로 뜸을 100번이나 하기도 했다. 이 때 경험이 불쾌했는지 불에 달군 쇠를 죄인 몸에 대는 형벌인 낙형(烙形)을 폐지하기도 했다. 가래가 끓는 담병(痰病)을 자주 앓았으며 70대부터 건강이 다시 좋아져 노령에도 검은 머리털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는 일찍부터 인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72세 때 1년간 복용한 인삼량이 20여근이나 됐으며, 59~73세 동안 복용한 인삼이 100근이 넘었다. 제때 식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아들 사도세자를 굶겨 죽일 때에도 자기 식사는 챙길 정도였다. 소식했고 소화력이 떨어져 산해진미 등을 멀리하고 반찬 몇가지에 죽을 곁들여 먹길 즐겼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장수를 가져왔다.
이런 이유로 비교적 건강이 양호했던 영조는 83세 때 가래, 어지러움, 천식, 치매 등이 악화돼 사망했다.
그의 손자인 정조(1752~1800년)는 젊었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다. 매년 있었던 화성 행차 때마다 병 없이 왕래한 적이 없었을 정도다. 결국 48세 때 종기가 악화돼 결국 사망했다.
순조(1790~1834년)도 44세 때 다리 부위에 난 종기가 심해져 세상을 떴다.
헌종(1827~1849년)은 자세한 증상의 기록 없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폐결핵 증상을 보이며 세상을 등졌고, 담증이 있었던 철종(1831~1863년)도 헌종과 같은 증상을 보이며 33세에 운명했다.
고종(1852~1919년)은 47세 때부터 체증이 심해 소화제를 많이 복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56세 때 일제의 강요로 왕위를 넘겨준 뒤 안질환과 관절염 등으로 고생하다 67세 때 중풍이 원인이 돼 사망했다. 최근 들어 전국 단위로 확대되는 의병운동 등에 부담을 느낀 일본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나라를 잃은 비운의 왕 순종(1874~1926년)은 세자 시절부터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보며,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고 한다. 평생을 치통, 다리통증, 변비 등으로 고생하다 53세 때 심장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