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사건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정부가 나서 조만간 안산시에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를 설치할 계획이다. 트라우마의 해결책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최근 EMDR(Eye Movement Desensitization and Reprocessing,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이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간단히 말해 안구를 굴리는 운동을 통해 트라우마에서 해방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은 항상 사고가 일어난 것처럼 극도의 긴장 상태를 지속하는데 안구운동으로 나쁜 기억을 재처리하면 뇌는 더 이상 긴장할 필요가 없어지고, 긴장상태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모드로 돌아올 수 있다.
EMDR은 1987년 정신건강을 연구해온 미국 프랜신 샤피로 박사에 의해 개발됐다. 괴로웠던 경험을 떠올리며 그 때의 생각·감정이 되살아나게 만든 뒤 중간 중간에 적절히 안구를 왼쪽·오른쪽으로 돌리는 치료법이다. 실뭉치처럼 얽힌 상처의 기억을 차근차근 풀어내 새로운 실타래로 저장되도록 촉진한다.
EMDR은 구조적인 치료법으로 차근차근 순서대로 진행된다. 우선 환자는 고통과 관련된 이미지, 육체적인 감각, 사건 등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경험에 정신을 집중한다. 치료자가 환자의 얼굴 앞에서 손을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면 환자는 눈으로 그 움직임을 따라간다. 손 대신 빛이 슬라이딩되는 라이트바(Light bar)를 활용하기도 한다.
김대호 한양대 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눈으로 손이나 빛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좌뇌와 우뇌의 상호작용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을 동원한 ‘좌우양방형기법’을 병행한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양쪽 귀에 번갈아가며 음이 울리게 하거나, 조력자가 환자의 몸 양측을 번갈아 터치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양측성자극은 기억의 불편한 부분을 제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자의 치밀한 계산과 정해진 단계적 방법을 기준으로 진행돼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치료자는 고통과 함께 연상되는 부정적 생각의 자리에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준다. 예를 들면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을 바꿔 위험은 과거의 일이며, 지금은 안전하고 편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프랜신 샤피로 박사는 이런 효과를 ‘정신적 올무’를 끊는 효과라고 설명했다. 정신적으로 충격이 된 사건이 일어난 이후 자리잡은 고통스런 감정을 자기 스스로 당연하다고 인정할 수 있도록 사고의 구조를 개조하는 것이다.
이 치료를 통해 환자가 힘겨웠던 삶의 경험을 통합하고 극복해서 결국 그때 사건들이 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기분전환할 수 있는 장치를 활성화시켜 준다. 이런 과정은 고도로 조직화돼 있으며 처치의 일관성이 있어 효과가 큰 요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배재현 서울EMDR연구소 임상심리전문가는 “EMDR은 심리적인 상처와 고통을 다루는 중요하고 전문적인 치료로 치료 시작 전에 충분한 면담과 치료를 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며 “1회에 보통 60~90분 정도 소요되나 증상과 원인에 따라 달라지고 길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배활립 명지병원 외상심리치유센터 센터장은 “다른 정신치료와 비교했을 때 대체로 3~12회 정도로 치료기간이 짧은 게 장점”이라며 “상처가 한 가지이고 최근의 것이면 짧은 횟수로도 충분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상처가 누적돼 있거나 오래된 사람은 길어지게 된다”고 소개했다.
이 치료는 기억을 덜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기억을 지워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쁜 기억이 삶에 불편과 고통을 끼치지 않게 변환시키는 치료라고 볼 수 있다.
간혹 치료과정에서 ‘떠올리기 힘든 기억을 억지로 생각해내 힘들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배재현 임상심리전문가는 “상처에 대한 기억은 환자가 떠올리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이끌어내는 게 아니라 치료자와 환자가 함께 충분히 얘기나누고 준비해 떠올릴 수 있는 안전한 정도까지만 회상케하고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며 “상담을 결심했을 때 괜히 나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아닌가, 나도 모르게 엄청난 기억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
국내보다 EMDR이 활성화된 미국에서는 ‘자가치료’하는 사람이 적잖다. 단순히 안구운동이라고 여겨 인터넷 동영상이나 스마트폰 앱 등으로 EMDR을 따라한다. 하지만 트라우마 환자가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대단히 위험하고 상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EMDR경험이 많은 전문가에게 치료받는 게 바람직하다. 이 치료에는 훈련받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임상심리전문가가 협력하는 게 이상적이다.
김대호 교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일시적 스트레스나 불면을 극복하기 위해 심신이완 차원에서 안구운동 같은 양측성 자극을 주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며 “하지만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이 EMDR을 통해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서 안구운동하는 것은 스스로 맹장수술 하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말했다.
EMDR은 샤피로 박사가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눈을 빨리 움직이면 부정적이고 기분 나쁜 생각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됐다. 너무 신기해서 더 오래된 과거의 일, 부모와의 문제를 떠올리고 시도해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이를 가족, 친구,지인들에게 실험한 결과 뇌의 특정한 반응(자극)이 스트레스를 잠재운다는 획기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수면 중 나타나는 빠른안구운동(REM, Rapid Eye Movement, 렘수면상태)과 원리가 같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면은 렘(REM:rapid eye movement)수면과 그렇지 않은 비(非)렘(non REM)수면으로 나뉜다. 렘수면은 꿈을 꾸면서 자는 수면으로 심장박동과 호흡이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특성을 보인다.
비렘 수면은 얕은 잠인 1~2단계와 깊은 잠인 3단계로 나뉜다. 비렘수면을 끝내고 렘수면으로 바뀌는 한 사이클이 하룻밤에 3~5회 반복된다. 새벽으로 갈수록 이같은 수면주기가 짧아지고 깊은 잠이 줄어든다.
렘수면은 낮동안의 불쾌한 기억들이나 쓰레기 같은 정보를 배설하고 필요한 정보만을 저장하는 순기능을 하며 안구운동근육과 횡경막(호흡)근육을 제외한 모든 근육을 이완시켜 심신의 휴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EMDR은 렘수면에서 일어나는 불필요한 감정의 기억을 정리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김대호 교수는 설명했다.
이를 바탕으로 샤피로 박사는 EMDR을 베트남 참전 용사와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적용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증상을 감소시킨다는 연구결과를 도출했다. 환자들은 EMDR 치료후 사고 장면이 순간적으로 재현되거나,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증상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 국방성과 주요기관 등은 PTSD나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들에게 EMDR을 활용해 치료하고 있다.
김대호 교수는 “EMDR은 뇌에 깊이 박힌 트라우마를 꺼내서 처음부터 다시 저장하기 위한 방법”이라며 “트라우마 당시의 감정을 떠올리고, ‘그 때 그런 경험을 했지만 지금은 잘 살고 있으니 괜찮아’라는 감정을 새롭게 느끼게 한 뒤 안구를 돌리면 트라우마에 이런 감정이 입혀져 뇌에 다시 새겨진다”고 말했다.
외상적 기억은 대뇌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일상적이고 중립적인 기억으로 남지 않고 불편한 감정, 감각, 생각, 장면과 함께 뇌의 변연계에 남는다. 이런 기억을 ‘적응적 정보처리’라는 과정을 통해 일반적인 기억으로 변환시키는 원리를 이용한 게 EMDR이다.
배재현 임상심리전문가는 “EMDR은 마비된 정보처리계를 활성화시켜 고통스러운 외상기억이 재처리되도록 돕는 기억의 인지적·정서적·신체적 요소에 직접 작용하는 통합적인 치료”라며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강화하며 부정적인 경험을 극복함으로써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EMDR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가지 요소를 모두 다룬다”며 “현재생활에서 고통을 유발하고 자극하는 과거의 요소를 미래상황과 관련한 새롭고 구체적인 틀에 담아 환자 스스로 대처해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도록 도와주는 게 치료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