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 및 의료기기,의료서비스 산업을 포함하는 헬스케어산업의 규모의 전세계 시장 규모는 2008년 3조2000억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같은해 정보통신시장이 2조달러, 자동차시장이 1.6조달러를 이룬 것에 비할 때 각각 1.6배, 2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헬스케어산업이 향후 연평균 7.2%씩 성장한다고 가정하면 2015년에는 5조2000억달러에 도달할 전망이다.
평균수명이 연장되고 웰빙에 대한 관심이 꺾이지 않는 이상 제약산업을 포함한 이른 바 헬스케어산업, 또는 정부가 주창하는 HT(Health Technology)산업은 대폭 성장이 몇 안되는 산업이다.
2011년 국내 제약산업 규모(생산액 및 수출입액 포함)는 18조9438억원이었다. 본 조세일보-헬스오가 국내외 자료를 종합 예측해보니 2012년에는 18조9936억원, 올해에는 20조 6460억원대로 추산된다. 전세계 제약산업의 연평균복합성장률(CAGR, Compound Annual Growth Rate)은 2010~2020년 8.7%로 추산되지만 국내시장은 연이은 약가규제 정책으로 2007~2011년에 5.9%에 머물렀다.
한마디로 국내 제약산업이 영세하다보니 주로 제네릭간 가격경쟁이 심화되고, 정부는 이런 도토리 키재기식 경쟁을 지켜보다가 약가인하를 통해 건강보험재정을 절감하려는 손쉬운 정책을 펴게 되고 이는 제약산업의 잠재성장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제약산업은 구미 선진국에서는 분명 첨단산업이다. 2012년 존슨앤드존슨그룹(얀센 포함)의 매출액은 672억달러(67조원)에 달한다. 2위 화이자는 589억달러, 3위 노바티스는 566억달러 규모다. 세계적인 경제침체와 보건당국의 약가규제 여파로 전년 대비 매출이 감소하긴 했지만 같은 해 삼성전자 매출액 201조원에 비하면 단일 기업으로 결코 적잖은 규모다.
이에 비해 국내제약사 267개 업체가 일군 2011년도 총 시장규모는 18조9438억원에 불과하다. 기업의 성장은 혁신과 연구개발을 통한 고부가가치 제품 출시인데 국내 제약사의 연구개발 규모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다.
국내 제약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율은 6.6%(2009년)로 상위 5개 다국적 제약사의 16%에 비해 현저히 낮다. 세계 1위인 화이자는 2009년 78억5000만달러를 R&D에 투입했지만 국내서는 지난해 한미약품이 가장 많은 967억원을 썼다.
스위스계 글로벌 제약사 로슈그룹은 2012년 전체 매출의 18.6%인 약 70억유로(10조1528억원)을 연구개발에 투자해 전체 제약기업 중 R&D 투자금액 1위, 전체 글로벌기업 중 6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제약기업으로는 2위 노타비스(전체 7위), 3위 머크MSD(8위), 4위 존슨앤드존슨(9위), 5위 화이자(10위), 6위 사노피아벤티스(15위), 7위 글락소스미스클라인(20위), 8위 엘라이릴리(26위), 9위 아스트라제네카(33위), 10위 애보트(35위), 11위 바이엘(36위), 12위 다케다(41위), 13위 베링거인겔하임(42위), 14위 암젠(47위) 등이 전체 글로벌 기업 연구개발액 투자순위 50위권에 들었다.
국내 제약기업들은 1980년대 후반 신약개발에 뛰어들어 지난해까지 20건의 합성신약을 내놓았다. 일본이 80여개의 토종신약을 보유한 것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그나마 글로벌시장에서 이름을 내놓고 1억달러(1064억원) 이상 팔리는 약은 하나도 없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신약개발에 역량을 투입하기보다 제네릭에 의존하고, 리베이트 영업에만 매달려온 결과다.
우선 지난해 국내 1위의 제약기업인 동아제약(2013년 지주회사 전환, 동아ST 및 동아제약)은 지난해 1월 전국 1400여개 병의원에 동영상 강의료 명목 등으로 2009년 2월부터 2012년 10월까지 자사 의약품을 사용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48억원 가량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가 적발됐다. 이를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대형 제약사를 포함한 각종 중소 제약사가 리베이트 사건으로 홍역을 앓았다.
동아제약 전현직 임직원과 에이전트사 대표이사 등이 기소되며 새해 벽두부터 소란스럽더니 리베이트와 연루된 의사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대한의사협회가 나서 동아약품 불매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의협은 지난해 10월 동아제약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회원 지침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동아제약은 의약품 리베이트건으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아 동아ST와 동아쏘시오홀딩스가 각각 646억4000여만원과 59억6000여만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았다.
동아제약은 지난해 매출 1조원 진입을 꿈꿨으나 2012년 매출 9300억원보다도 후퇴해 2013년에는 9200억원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박카스 판매가 늘었으나 리베이트 소동 여파로 전문의약품 매출이 줄어든 게 원인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1월에 CJ제일제당은 전국 병·의원 의사 266명에게 적게는 200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까지 한도를 책정한 법인카드를 건네 45억원 상당을 뿌리다가 적발됐다. 2010년 5월부터 11월까지 약 6개월간 자사 약품 처방이 많은 이른바 ‘키 닥터(key doctor)’ 의사를 공략했다. 특히 이는 같은 해 11월 리베이트 제공 업체와 의사가 함께 처벌받는 ‘리베이트 쌍벌제’가 시행되기 직전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 큰 비난을 받을 만하다.
지난해 11월에는 동화약품이 2010년 10월 이후 2011년까지 메녹틸, 이토피드, 돈페질, 클로피, 다이보베트, 베실산암로디핀, 아토스타, 록소닌, 리세트론, 세파클러, 파목클, 락테올, 아스몬 등 자사 의약품 13개 품목을 처방해준 대가로 병ㆍ의원 1125곳에 금품을 제공하다 적발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8억98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고 검찰에 고발됐다.
지난해 12월에는 삼일제약이 2009년 11월부터 2013년 5월까지 자사의 신규 의약품(라니디엠 등)을 처방한 병·의원에 총 23억원 상당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3억3700만원의 과징금을 공정위로부터 부과받았다. 또 정부합동 의약품리베이트조사반은 지난달 22일 의약품 처방대가로 리베이트를 제공한 삼일제약 임직원 4명과 의사 45명 등을 벌금형에 기소했다.
이밖에 일동제약은 지난해 6월 2009년 4월부터 전국 538개 병의원에 16억8000만원 상당의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과징금 3억800만원을 부과받았다. 이어 7월에는 일양약품이 전국 병의원 및 약국에 21억원 상당의 리베이트를 제공한 사실이 적발돼 임원 1명이 구속 기소되고 관련 회사 관계자 8명과 의사 14명, 약사 9명도 불구속 기소됐다.
이에 앞서 대화제약은 지난해 1월 노병태 대표가 9억원대 리베이트 제공 혐의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벌금 2000만원을 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지난해 5월에는 광동제약이 리베이트 제공 혐의로 국세청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명색이 제약회사이지만 2001년 이후부터 비타민음료 및 생수사업에 주력하고 있는 이 회사는 지난해 7월에도 길병원에 자사의약품 처방을 부탁하며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혐의로 조사받는 등 리베이트를 통해 손쉽게 의약품 매출을 늘린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처럼 국내 대기업은 물론 중견·중소제약사들이 리베이트로 홍역을 앓고 있는 것에 대해 H사 제약사 관계자는 “한국 제약업계의 의약품 유통구조상 절대적으로 리베이트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의사가 성분명 처방을 통해 막강한 의약품 선택권을 갖고 있는 한 쌍벌제는 물론 그보다 강도높은 제도를 도입해도 리베이트는 보다 은밀하고 끈적거리게 의사들의 손에 쥐여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약사들은 흔히 리베이트 적발 루머나 보도가 나오면 일반적으로 회사와는 무관한 일이며 어디까지나 ‘개인 비리’라고 해명하기 일쑤다. 즉 영업목표 달성을 위해 영업사원이 개인 돈이나 회사 공금을 의사들에게 리베이트로 갖다줬을 뿐 회사 차원에서 지시한 적은 없다는 설명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수 천만원에 달하는 리베이트를 한 두번도 아니고 영업사원이 자체 조달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 예로 4000만원 월급쟁이 영업사원이 리베이트에 쓸 돈을 상여금 명목으로 4000만원을 받는다. 그래서 8000만원 짜리 월급쟁이로 둔갑한다. 회사에서 소득세까지 감안해주지 않으니깐 세금을 영업사원이 부담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이런 불만이 쌓여 퇴직 전에 사법기관에 제보하거나(업계에선 투서질), 사전에 리베이트를 유용(삥땅)하다가 회사에 적발되는 경우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소형 제약사인 J사 관계자는 “영업사원들이 회사를 퇴직할 때 회사에 대한 반감으로 리베이트 관련 내부비리를 폭로하는 경우가 많다”며 “의약분업 시행 이후 회사와 영업사원간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불신이 심화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약사의 도도한 리베이트 관행으로 볼 때 최근 일고 있는 리베이트 문제는 어찌 보면 회사 내부의 문제라고 볼수 있다”며 “어떤 일이 있어도 제약사는 의사와 ‘사이 좋게’ 지낼 수밖에 없고, 결국 리베이트는 근절될 수 없다”고 말했다.
깨끗하고 좋은 일 많이 하는 이미지로 굳혀진 유한양행조차도 리베이트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 회사는 2007년 영업활동 과정에서 골프 및 식사 접대, 현금 및 상품권 지원 등의 행위가 적발돼 공정위로부터 21억1100만원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비록 대법원에서 과징금 산정방식 오류로 무죄 판결(납부명령 취소)을 받았지만 위법사실은 사실상 인정됐다.
김윤섭 유한양행 사장은 지난해 4월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일부 다국적 제약사의 과도한 성과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고 관행적으로 이어져온 불공정한 거래 방식(리베이트 영업)이 아직도 존재할 수 있다”며 “다른 기업에서 아무 근거없이 관행적인 리베이트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잘 나가는 기업을 시기·질투하면서) 공정경쟁 질서를 망가뜨리는 것도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유한양행을 포함한 모든 회사가 리베이트 영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도 있고, 매출실적이 오르기만 하면 리베이트 효과를 봤다고 의심하는 제약업계의 만연한 시선이 잘못 됐다는 자아비판이기도 하다.
김 사장의 발언대로 좀 클린해보인다는 다국적 제약사도 리베이트 관행은 마찬가지다. 한국얀센은 2006년 8월 1일부터 2009년 3월 31일까지 파리에트, 토파맥스, 울트라셋, 듀로제식, 레미닐 등 5개 의약품의 판촉과 관련, 국내 의사들에게 154억1900만원의 리베이트를 제공했다. 얀센은 2008년 1월부터 리베이트 쌍벌제가 시행된 이후인 2010년 12월까지 광고대행사를 통해 병·의원에 POP 광고 판넬을 설치하고 광고비를 지급한 것처럼 꾸며 697명에게 리베이트를 지급했다.
한국노바티스는 디오반·코디오반·엑스포지·페마라·트리렙탈·산디문뉴오랄 등 6개 의약품과 관련해 71억6800만원,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는 엘록사틴주5mg·란투스주바이알·란투스주솔로스타·란투스주카트리지시스템 등 4개 의약품에 관련해 185억8700만원의 리베이트를 의사들에게 돌렸다.
당시 김준하 공정위 제조업감시과장은 “세계 굴지의 다국적 제약사들도 우리 제약업계의 그릇된 관행을 따라하고 있었다”며 “효능이 좋은 의약품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지 못하는 등 리베이트의 부작용이 큰 만큼 지속적으로 리베이트 제공행위를 단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혼탁한 국내시장에서만 리베이트영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2012년 7월 우울증치료제인 ‘팍실’과 ‘웰부트린’이 18세 이하 대상으로 판매 승인이 나지 않았는데도 어린이우울증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둔갑시켜 판촉한 혐의로 미국에서 보건의료 관련 벌금으로는 최대 금액인 30억달러를 맞게 됐다. 특히 웰부트린의 경우 우울증으로만 적응증이 허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체중감량, 성기능장애 개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에도 허위·과장광고했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해준 것은 공신력 있다는 세계적 의학학술지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의사들에게 의약품 채택 및 처방에 대한 대가로 고가의 리조트 휴가여행, 유럽으로의 사냥여행, 마돈나 공연 등을 제공하는 등 판촉행위를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한국과 외국이 다른 점은 의약품 처방 대가에 대한 직접 개입이냐, 간접 개입이냐에서 차이가 난다. 예컨대 국내서는 의약품 사용비 100만원의 대가로 적게는 10%, 통상적으로는 20%(20만원)이 영업사원을 통해 직접 의사에게 전달된다. 반면 외국에서는 학술지원, 연구비, 학술활동을 빙자한 외유성 여행 지원경비 등의 형태로 지급되는 게 다르다.
‘제약회사는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청년의사 출판)의 저자 마르시아 안젤은 책에서 “대개는 젊고 매력적이며 무지하게 싹싹한 영업사원들은 의사들과 얘기를 나누며 부담없이 선물(책 골프공 운동경기티켓 등)을 건넬 수 있는 길을 터놓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병원이라면 어디든지 돌아다닌다”고 비판했다.
매너와 화술로 훈련된 영업사원을 앞세워 의사에게 잘 보이고 의료소비자에게 가격 거품이 가득 낀 약을 떠넘기는 게 제약회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게 국내외를 막론한 엄연한 현실이다. 약효의 객관적인 검증 및 합리적인 약가책정에 한계가 있고, 비슷한 약이 쏟아지는 환경에서 리베이트 없는 영업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다만 이를 어떻게 최소화하고 투명하게 하는가가 제약산업을 성장동력으로 키우느냐, 의료소비자들이 덜 털리느냐를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