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와 ‘감정노동’은 올 한해를 떠들석하게 했던 키워드 중 하나로 반드시 꼽힐 듯하다.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대리점주에 대한 막말사건, 포스코 ‘라면’ 상무의 대한항공 승무원 욕설, CU 가맹 편의점주의 잇단 자살로 경제활동에서 공정성의 범주, 감정노동이 수용할 수 있는 범주는 어디까지인가가 우리사회의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일본산 분유가 시장을 지배하던 1960년대 우리 손으로 만든 분유를 내놓고 IMF외환위기 때 직원을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는 등 국민적인 신뢰와 찬사를 받던 남양유업은 이 사건으로 회사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고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지금도 영업실적이 사건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는 등 후폭풍이 거세다.
공기업도 예외가 아니어서 2007년 수자원공사의 한 30대 대리는 설계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50대 수주업체 이사의 얼굴에 무거운 서류철을 집어던졌고 깨진 안경 파편이 눈밑에 박혔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하마터면 실명할 수 있는 살인 미수에 준하는 상해죄였지만 가해자는 변변한 사과도 하지 않았고 갑을 관계의 특성상 수주이사의 고소도 결국엔 철회됐다.
갑을관계는 순전히 비즈니스, 쉽게 말해 ‘돈’ 때문에 형성된다. 갑은 을에게 물품을 구입하거나 용역을 맡기고 돈을 지급한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옛말도 있고 ‘허리를 숙여야 돈을 줍는다’는 유태인 격언이자 경제처세학책 제목도 있다.
하지만 갑의 횡포에 을이 더 이상 참지 않는 세상이 오고 있다. 1980년대 이전의 절대빈곤 또는 고성장 시대에는 생존이나 경제적 성장의 가치가 인권이나 감정적 존중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였다. 이 때문에 을은 돈을 벌기 위해 갑의 횡포를 별 문제 없이 참아냈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일정 수준을 넘자 갑의 감정적 학대에 신음소리를 내고 반기를 드는 을의 입장이 표출되고 있다.
엄청난 부와 높은 지위 같은 이성적 성취(사회경제적 성취)에 해당한다. 반면 감성적 성취는 사회경제적 성취 이상의 것이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는 “감성적 성취는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이루는 것”이라며 “아무리 갑이 을에게 돈을 지급한다한들 갑이 을을 대하는 자세가 욕설과 멸시로 가득찬 인격모독에 가까운 것이라면 감성적 성취를 충족시키기는 커녕 씻지 못할 감성적 상처에 두고두고 마음 아파하게 된다”고 말했다.
을 중에서도 가장 을은 감성노동자다. 대표적인 직업으로 콜센터직원이나 항공기승무원이 꼽힌다. 생판 처음 접하는 고객에게 존경하지도 않는데 웃으며 대해야 하고, 비합리적 요구는 물론 욕지거리에도 정면 대항하지 못한다. 감정노동은 말 그대로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좋은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즉 감성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이 때문에 경제적 대가를 받지만 감정적 상처의 크기에 비해 금전적 보상이 낮을수록, 감정적 상처에 대한 복원력이 떨어질수록 감정노동자는 회복되기 어려운 ‘트라우마(trauma)’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런 직업을 영위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도 있다.
갑의 만행과 을의 억울함은 유사 이래 지속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양반과 상민,노비가 존재하던 조선시대 봉건신분제의 영향으로 지금도 갑을관계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잠재의식이 남아 있다. 존비어(尊卑語)가 발달돼 있는 우리말의 특성상 상대가 구사하는 어휘로 스스로 자신을 갑을로 나눈다.
게다가 능력과 지위, 역할에 상관없이 장유유서(연공서열) 의식이 강해서 을이 갑보다 연장자일수록 갑의 횡포에 더 분노한다. 또 반도국가의 특성상 충족되지 못한 내면의 욕망과 울분을 잘 표현하고 이를 이른 바 ‘한(恨)’이라 얘기한다.
이에 비해 수직관계가 우리보다 훨씬 엄격한 일본은 갑을관계가 더 심할 것임에도 을들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민족성을 갖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을의 입장은 갑의 논리에 묻히고 만다. 하지만 혼자 끙끙 앓다가, 고독 속에 고립됐다가 갑자기 자살하는 일본 직장인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감정분출의 통로가 막힌 일본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서양인들은 어떤가. 서양인들은 한 때 아프리카 흑인을 전부 노예로 들여와 쓸 정도로 ‘갑의 정신’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시민혁명을 통해 갑(절대군주)의 기득권에 대항해 민주주의(자본주의)를 일궈냈다. 또 자본주의의 폐단(자본가와 노동자의 양분, 노동착취 심화)이 깊어지자 사회주의와의 정반합(타협)으로 수정자본주의를 도출하고 시장의 효율을 통해 갑을의 조화를 이룬 게 현재의 모습이다.
서양인들은 갑을관계가 외형적으로는 수평적이다. 갑은 을의 말을 일단 경청한다. 수용 여부는 갑의 판단에 달려 있다. 업무처리에서는 지위(역할)가 철저하게 연령, 지연 같은 부수적인 조건을 압도한다.
우리나라에서 거래처간의 갑을관계는 억압적인 직장내 상하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중소기업, 발주기업-하청업체 간의 갑을관계는 상사에 반박하거나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가 인사고과에 불리해지고 승진이 밀리는 직장문화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군대문화도 왜곡된 갑을관계에 한몫 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대접받고 싶어한다. 팁을 주더라도 고급 단골집에 가서 왕처럼 환대받으며 외식하고 싶은 게 부자들의 속성이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상대방을 능멸하고 싶은 본능이 자기도 모르게 생겨난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위(벼슬), 명예, 존경보다 돈의 위력이 세지고 있다. 을이 돈을 벌기 위해 갑에게 굽신거리는 스트레스는 크다. 이에 못지 않게 갑은 을이 보여주는 ‘기계적 친절’과 ‘틀에 박힌 배려’에 싫증을 낸다. 그러면서 더 깊은 진정이 담긴 서비스를 원하게 된다.
하지만 경제양극화가 심화되더라도 을이 자기 감성의 가치나 행복을 지키려는 마음은 더 강해질 전망이다. 갑의 군화발에 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을의 저항이 세지는 만큼 갑들도 을의 눈치를 살펴가며 적당히 칼을 휘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양유업이나 포스코 라면상무 같은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갑이 을을 심하게 닦달할수록 을의 퇴직, 태업은 빈번해지고 을이 속한 회사의 생산성은 저해되고 결국엔 서비스 비용이 상승한다는 경제학자의 논리도 있다.
갑을은 상대적이다. 아무래도 제조업에 종사하는 을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을보다 마음의 상처나 스트레스가 덜 하겠지만 획일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서비스업 회사의 임원이 말단 직원보다 감정의 상처가 덜할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이또한 예단할 수 없다.
미국의 다국적 거대 홍보대행사의 한 회장은 은퇴하면서 대충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홍보대행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평생에 한번도 갑(甲)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이제 은퇴했으니 진정한 내 삶을 즐겨야 겠다”. 홍보대행사라면 클라이언트(기업이나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규제당국, 언론사와 맞닥뜨리며 항상 을의 입장에서 설득하고 타협을 유도해야 하는 입장이다.
사회경제적(이성적) 지위는 물론이고 감성적 지위까지 향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는 한 갑을문제는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좁게 보면 친구 사이에서도 돈 빌려가기 전에는 차입자가 을이지만 돈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대여자가 을이 되고, 누가봐도 ‘부끄러운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가 갑이 되기 마련이다.
먼지가 펄펄 날리는 공간에서, 겨울에 난로도 없이, 하루에 4~5시간만 자고 미싱을 돌리던 1970년대와 비교하면 갑을관계의 부당함과 감정노동의 피해의식을 논할 수 있는 지금 이 시대가 그나마 나아진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고생하던 ‘을의 정신’(헝그리정신)을 잊어버리고 다들 ‘갑 행세’(개폼)만 하려할 때 그 사람이나 몸담고 있는 직장은 발전이 정체되고 후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도 경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