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는 2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전국 40개 의과대학의 2025학년도 입학 정원을 현재보다 70% 이상 늘릴 필요가 있다는 의대 정원 확대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현 정원인 3058명에 추가로 2151~2847명(최소~최대)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점차 늘려 2030년에는 2738~3953명이 지금보다 증원돼야 한다고 전망했다.
최소 수요는 현재의 교육 인프라에서 증원 가능한 인원이고, 최대 수요는 교육 인프라가 확장된다는 가정 아래 잡은 수요다.
당초 복지부는 지난 13일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한다고 예고했으나 각 의대들의 수정 제출 요구가 이어지면서 두 차례나 발표를 미뤘다. 상당수 의대는 이번 수요조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현상 유지나 소수 증원을 결정했다가 막판에 대폭 늘린 의사 수요를 기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발표가 나오자 의사단체들은 “정부의 여론몰이용 졸속 의대 정원 수요조사를 즉각 중단하라”고 규탄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의대 정원 증원은 2018년 폐교당한 서남대 의대처럼 전국에 우후죽순 같은 의대 난립과 의학 교육 부실화를 초래하고, 의대 입시 광풍을 부추기며, 필수·지역 의료를 살리기란 당면과제 해결을 꼬이게 하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의협의 대정부 협상단장인 양동호 광주광역시의사회 대의원회 의장은 21일 “지난 15일 복지부가 의대 증원 논의는 의료현안협의체를 통해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1주일 만에 기습적으로 협의 사항을 뒤엎었다”며 반발했다.
의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 의사단체만 빼고 다들 동의하는 바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국민의 67.8~82.7%가 찬성하고 있다. 지역의료 확충을 위한 공공의대 설립 안에 국민의 77%가 찬성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지금의 의사 고소득은 사실상 적은 수의 의사를 유지하고 있는 데 따른 ‘약탈적’ 행태에 기반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국세청 종합소득세 신고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의사·한의사·치과의사 등의 평균소득은 2억6900만원으로 변호사의 1억1500만원보다 2.4배 높았다. 2014년 대비 증가율은 의료인 55.5%(9600만원) 증가한 반면 변호사는 12.7%(1300만원) 늘어난 데 그쳤다.
OECD 27개국의 병의원 페이닥터(봉직의)의 임금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비교 시점이 다르긴 하지만 최소 5위권에 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페이닥터의 연간 소득은 2010년 13만6104달러에서 2020년 19만2749달러로 42% 증가했다.
이에 대해 의사협회는 “우리나라의 개원의는 의료기관을 경영해야 하는 개인 사업자로 건물임대, 의료장비, 의료인력 인건비 등을 모두 직접 감당하기 위해 자기 자본을 투자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의사들은 주 6일 이상의 고강도 근로를 이어가고 있다”고 반박했다. 반면 “영국의 경우 의사 양성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고, 의사들이 대부분 공무원이라 65세 정년 이후 자신의 연봉의 90%에 가까운 연금을 받고 있다”고 반박했다. 젊어서 의학을 연마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있으며, 의사가 돼서는 노후 대비를 위해 일반 근로자보다 더 많은 노동력과 노동시간, (병원경영) 비용 등을 투입한다는 게 의협의 입장이다.
우리나라 의사의 노동시간은 2021년 의협 설문조사 결과 1주일에 48.1 시간이었다. 직역별로는 전공의(인턴) 69.5시간, 전임의 55.6시간, 교수 49.9시간, 개원의 45.6시간, 공보의 43.9시간, 봉직의 41.7시간, 군의관 41.7시간 등이었다. 전문과목별로는 외과계 46.0시간, 내과계 44.5시간, 일반의 44.4시간, 지원계 43.9시간 등이었다. 근무기관별로는 상급종합병원 58.4시간, 종합병원 50.1시간, 의과대학 50.0시간, 요양병원 46.9시간, 보건기관 44.0시간, 병원 43.3시간, 의원 42.9시간, 군대/군병원 42.1시간 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주 6일 이상 근무하는 비율은 61%, 주 7일 근무 비율은 14.4%였으며, 개원의 휴무일수 연간 66.7일로 '바닥'을 쳤다.
미국 의사들은 주당 50~59시간 일한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주당 근로시간이 적은 것은 ‘5분 진료’가 성행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환자를 보는 반면 미국은 의사수입이 진료시간에 비례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환자를 본다. 또 국내에는 군의관, 공보의, 공공의료기관에 근무하는 의사의 비중이 미국보다 높은데 이들의 짧은 근로시간이 전체 평균을 깎아먹기 때문이다.
2010년의 한국고용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의사들은 주당 61시간 근무했는데 그동안 노동강도가 다소 약해지긴 했으나 열성적으로 일하는 개원의나 수술이 많은 외과계 의대 교수들의 노동강도를 감안하면 국내 다수의 의사들은 미국처럼 대략 50~59시간을 근무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결론적으로 의사들은 소수의 면허자를 유지하는 동시에 고강도, 저품질 진료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다. 하루에 100명 안팎의 환자를 보는 내과나 소아과·이비인후과 의사(물론 잘 나가는 병원에 국한됨), 휴가철이나 방학철·명절연휴를 앞두고 철야 수술도 불사하는 성형외과·피부과 의사 등이 단적인 예다.
2020년 7월 23일 문재인 정부 당시 보건복지부는 2022년부터 10년간 매년 400명씩, 총 4000명을 증원한다고 발표했다. 인구 고령화, 필수의료 인력 부족, 의대 진학 희망자의 증원 욕구 등을 간파한 현 정부는 대대적인 증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에 현 이필수 의사협회 집행부는 500명 증원으로 절충하려 했으나 의협 매파는 증원 절대 반대를 외치다가, 지난 10월에는 1000명 정원 증원(청와대발 루머성 뉴스)으로 발전했고 이번에는 2030년에 지금보다 최대 3953명을 늘린다는 복지부 의대 정원 수요조사 결과 발표에 직면했다. 이는 의사들의 시각에서 이기적 집단의식이 자초한 잘못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기자가 만나는 개원의나 중소병원장, 의대 교수들은 의사를 고용하기 힘들어 의사 수가 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이가 꽤 많다. 우선 정원 50명 미만의 미니 의대인 울산대, 을지대, 아주대, 동국대 등은 80~100명선으로 증원되길 바라고 있다. 의대 정원이 적다보니 자체 인력만으로는 사세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올 초 경남도 산청군 보건의료원은 3억6000만원에 내과 의사를 초빙한다고 공고를 내 화제를 모았다. 젊은층 인구 감소와 현역군인의 복무기간 단축으로 지역 보건소에 근무하는 공보의 인력은 2008년 1962명에서 2022년 1048명으로 46.6% 줄었다. 전국 35개 지방의료원 중 23곳이 의사가 없어 일부 진료과를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경기 시흥), 아주대병원(경기 평택), 서울아산병원(인천 청라), 연세의료원(인천 송도) 등 수도권에 9개 의대가 6600병상 규모의 설립을 추진 중이다. 이 정도 규모의 병상을 늘리려면 적어도 의사 3000명, 간호사 8000명이 필요한데 결국엔 그나마 부족한 지방 의료인력을 쪽 빨아들이게 생겼다. 서울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3.47명에 달하지만 경북 1.39명, 충남 1.53명 등 2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에 부산대(81%), 조선대(64%), 경북대(61%)처럼 지역 의사수요의 절반 이상을 지역 인재에서 뽑아야 한다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변변한 대형 의료기관이 없는 지역의 공공의대 설립도 이런 연장선에 놓여 있다. 지방에 정착할 전공의, 전문의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의사들에게 호의적인 보건정책이 구사되는 곳도 별로 없다. 연도별 직장가입자 건강보험률은 2009년 5.08%, 2014년 5.99%, 2019년 6.46%, 2023년 7.09%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반면 문재인케어와 인구 고령화의 영향으로 건강보험 재정은 2020년 15조 흑자에서 올해 1조4000억원 적자(예상)로 전환되고, 2030년에는 31조7000억원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공보험인 국민건강보험 외에 실손보험이란 민간의료보험이 존재해 많은 환자들이 높은 보험료를 감수하고 병의원에 적잖은 의료비를 뜯긴다.
의사와 병상 수가 많으면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한국의 2021년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6명으로 OECD 평균 3.7명에 못 미치고 있다. 그나마 한국의 의사 수에는 한의사, 치과의사도 포함된다.
반면 병상 수는 한국이 인구 1000명당 12.8개로 OECD 평균 4.3개보다 2.9배 이상을 기록했다. 의사는 적은데 탐욕으로 병상을 가득 확보하다보니 교통사고 후유증 요양환자 같은 ‘나이롱 환자’가 양산되고, 병상 운영 적자를 메우기 위해 과잉진료가 이뤄지고 있다. 불필요한 입원과 수술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의사들에게 아주 적합한 보건의료 환경인데도 의사들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며 의대 정원을 늘리면 안 되고 필수·지방의료가 붕괴돼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척’ 즐기고 있다.
물론 이번 의대 정원 수요조사 결과가 그대로 정책 시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의학·교육 전문가와 복지부·교육부 관계자 등 15명으로 꾸려진 의학교육 점검반이 각 의대가 제출한 의사 수요 근거 서류를 검토하고 있으며 이후 권역별 토론회나 간담회, 대학 관계자 면담 등 현장조사를 통해 계수를 조정할 예정이다.
어찌 보면 의사와의 타협과 절충을 예상해서 정부가 충격적으로 많은 예상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했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문재인 정부가 해마다 꾸준히 400명씩 늘리는 증원 안이 의사단체나 정책 시행자에게 무난한 절충안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의사 친화적’이지 않은 더불어민주당이 왜 집권했던 시절에 이를 추진하지 않고 뭉갰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더불어민주당은 국회를 통과했지만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간호사법’이 22일 재발의했다. 국민의 의료복지 증진보다는 오로지 표 계산만 하는 정치공학의 산물로 여겨진다.
의대 정원이 동결되거나 의사단체들이 내심 바라는 총 500명 증원에 그친다면 응급실 뺑뺑이, 소아 진료대란, 지방 의사 부족 등을 해결할 수 없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 교수는 “2025년도에 의대 정원을 당장 1000명 늘리고, 단계적으로 2000~3000명까지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의협으로부터 제명 조치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내년에 의대 정원이 대폭 늘어도 의사가 수련을 통해 버젓이 준수한 의사의 몫을 해내려면 10년은 소요된다. 인구 고령화 추세를 감안할 때 의대 정원의 현상 유지나 소폭 증가는 2035년 전후로 대대적인 ‘의료대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도 늦었다. 의사단체는 이기적인 직역의식에서 벗어나 국민 복리증진에 기여할 의대 정원 협상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