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면허를 소지하지 않은 의료인 또는 약사에게도 보건소장 임용의 길을 열어주자는 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자 의사들이 발끈하고 있다.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제2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고 68건의 법안을 심의했다. 이날 가장 논란이 됐던 법안은 ‘지역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국민의힘 서정숙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남인숙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했다.
해당 발의안은 보건소장 임용 자격을 의사면허를 소지한 의료인(의사) 외에 일정 기간의 근무 경험이 있는 보건·식품위생·의료기술·의무·약무·간호·보건진료 직렬의 공무원까지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경우 의사 외에도 한의사와 치과의사, 간호사, 약사 등의 자격을 갖출 경우 지역 보건소장에 임명할 수 있게 된다.
현행 시행령은 의사면허를 소지한 자의 임용을 원칙으로 하고, 의사 임용이 어려울 경우 일정 기간의 근무 경험이 있는 보건 직렬 등의 공무원에 한해 보건소장 임명 자격을 한정하고 있다.
의사 우선 임용 원칙에 대한 비판은 지난해 가을 보건복지부 국정감사 등에서 언급되는 등 꾸준히 제기돼왔다. 보건소장 임용 자격을 의사 이외의 의료 직군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남인숙 의원이 먼저 2021년 11월 보건소장 우선 임용 자격을 의사에서 의료인으로 확대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남 의원은 “한의사‧치과의사·간호사 등 의료인을 제외하고 의사만을 우선적으로 보건소장에 임용하는 현행 시행령은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일 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규정으로 조속히 개선돼야 한다”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서정숙 의원 역시 2022년 9월 한의사, 치과의사, 간호사, 약사 등 보건 관련 전문지식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보건소장에 임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을 재차 발의했다.
서 의원은 법안 제안 설명서에서 “국가인권위원회와 법제처 모두 보건소장 의사 우선 임용을 특정 직역에 대한 차별로 판단했다”면서 “의사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보건의료인력이 보건소장에 임용돼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기술했다.
이날 복지위 제2법안소위는 해당 개정안에 대한 이견이 크다는 이유로 ‘계속 심사’ 결정을 내고 오는 4월 중 추가 논의하기로 했다. 보건복지부는 경우 현행 의사 우선 임용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는 검토 의견을 제출한 상태다.
의사만이 보건소장이 돼야 한다는 법적 근거는 1958년 6월 30일에 지역보건법이 제정되면서 마련됐다. 이후 65년이 다 되도록 의사만이 특혜를 누리고 있다.
최기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1월, 전국 의사 보건소장 임용비율을 분석한 결과 2017년 42.5%였던 의사 출신 보건소장 비율은 2020년 41.4%로 줄었다.
보건소장은 기초 지방자치단체에서 단체장(시군구의 장), 지역 경찰서장, 지역 검찰지청장, 지역 법원장 등과 함께 적잖은 권력을 누린다는 얘기를 듣는다. 의료기관 약국은 물론 식당, 유흥업소 등 위생점검이 필요한 시설에 대한 단속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성남시장으로 재직하던 2012년 친형인 고 이재선 씨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기 위해 관할 분당보건소장으로 하여금 보건소 관할인 성남시 정신건강센터의 센터장에게 조울병 평가문건을 작성토록 지시했으나 당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보건소장이 거부해 무산된 적이 있다. 비록 지자체청이 보건소장을 임명하지만 그만큼 보건소장의 권위는 불가침의 독특한 영역이 있다.
현재 정부 인사 규정 상 보건소장 임명은 지자체의 공고를 통해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최고 적임자를 지자체장이 임명하게 돼 있다. 제출할 서류들을 보면 해당 지자체의 보건의료 인프라와 현황을 훤히 아는 사람만이 원활하게 작성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결국 현재의 지역보건법은 의사에게 보건소장을 독점할 수 있는 우선권을 주되, 적임자가 없으면 지자체장이 자기 구미에 맞는 현직 보건직렬 공무원 중에서 뽑아올리게 돼 있다.
따라서 명망이 있거나, 지역사회에서 봉사하고 싶은 의사들이 보건소장에 임명되기 힘든 구조다. 또 비록 의사가 아니어도 치과의사, 한의사, 간호사 등 의료인과 약사(의료법이 아닌 약사법의 적용을 받는 비의료인) 등 열정을 갖고 보건소장에 지원하려는 타 전문직종들이 배제되고 있다.
의사만이 보건소장을 해야 한다는 것은 특정 직역을 위한 견고한 카르텔이며, 보건지식이 예전에 비해 개방된 상태에서 의사만이 전문성을 갖췄다는 인식은 편견에 가깝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