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초기에는 질병에 대한 ‘공포’ ‘불안’ ‘우울’이 주요한 감정이었다면, 최근에는 ‘분노’의 감정이 앞서고 있다. 코로나19 장기전에 대한 스트레스 과부하로 우울함(코로나 블루)을 넘어 분노(코로나 레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 1학년, 3학년 자녀를 두고 있는 주부 김모(45)씨는 “1학기에 이어 2학기에도 학교·학원을 제대로 못 보내는 상황이라 스트레스가 크다”며 “친구들과 만나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는 아이들도 힘든데, 그런 아이들을 집에서 하루 종일 돌보는 내 처지도 싫어서 아이들한테 화를 많이 내고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최모(39)씨는 “업무 끝나고 술 한잔하는 낙이 사라지고, 헬스클럽이 문을 닫으면서 좋아하던 운동도 못하게 되니 화만 쌓여간다”며 “문을 닫는 자영업자나 실직을 한 직장인의 심정은 어떨지 상상이 안간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대리 박모 씨(34)는 유별나게 예민하고 화를 잘 내는 직장상사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벌렁거린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폭언·욕설을 듣다보니 신경이 곤두서 애꿎은 후배한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지난번 회식자리에선 상사로부터 ‘무능력하다’며 공개적인 망신을 당해 마음에 응어리가 졌다. 긴장과 불안감은 점차 분노와 증오로 바뀌었고, 정 씨는 출근 후 하루종일 ‘어떻게 하면 직장상사에게 복수할까’는 생각만 하고 앉아있다.
사소한 말다툼에도 칼을 휘두르거나, 어깨를 살짝 부딪혔다는 이유로 살인을 하는 등 우발적 강력범죄가 끊이질 않으면서 화병이나 우울증과 달리 울분에 더 초점을 맞춘 ‘울분장애’에 정신의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의미하는 울분은 한국인 특유의 정서인 ‘한(恨)’에서 비롯된다. 우울감과 울분은 비슷한듯 다르다. 우울감이 생활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과 달리 울분은 당면한 사건에만 한정되고 평소엔 비교적 안정적인 정서 상태를 보인다. 또 우울과 달리 대상에 대한 적대감이나 복수심이 나타내는 게 특징이다.과거 한국 여성들이 자주 겪은 화병(火炳)과도 헷갈리기 쉬운데 화병은 우울감, 울분은 분노의 감정이 더 강한 편이다.
울분의 감정이 쌓여 병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울분장애 또는 ‘외상 후 울분장애(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 PTED)’라고 한다. 울분장애는 평소 가치관과 위배되는 모욕적이거나, 불공정하거나, 불쾌한 사건을 겪은 뒤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절망·무기력감을 느끼는 만성적 반응장애 질환이다. 1990년대 초·중반 독일 통일 이후 동독인들이 달라진 환경으로 인해 느꼈던 심리적 분노와 무력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아직 국제질병분류체계에 진단명으로 정식 등재되지 않은 상태다.
울분장애는 상습적으로 언어적 물리적 폭력성을 드러내는 ‘분노조절장애(간헐성 폭발성장애)’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거나 스트레소를 해소하기 위해 분노조절장애를 보이거나 병적 도박이나 도벽, 자해, 인터넷게임중독, 반복적인 자살시도, 강박적 쇼핑, 강박적 성행위 등을 시도하는 장애는 더 넓은 범위의 ‘충동조절장애’로 정의한다.
최근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정책관리학과 교수가 발표한 ‘한국사회와 울분’ 연구논문에 따르면 한국 성인 남녀 2024명 중 298명(14.7%)이 일상생활에서 장애를 일으킬 정도의 중증도 이상 울분을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가장 낮은 독일의 2.5%보다 6배가량 높은 수치다.
유명순 교수는 “자신의 가치나 기여도를 인정해주지 않는 ‘무효 취급’을 받으면 억울한 감정이 생기고 이로 인해 울분이 커지게 된다”며 “아무리 스펙을 쌓고 노력해도 원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거나, 직장 내에서 부당하게 모욕과 따돌림을 당하거나, 사건·사고의 피해자가 됐지만 정부나 책임자가 요구를 묵살할 때 발생률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울분이 만성화되면 외상 후 울분장애로 진행돼 수시로 공격성이 표출되고,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며, 심할 경우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살을 시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통 직장상사가 울분장애라면 후배직원도 비슷한 증상을 겪을 확률이 높다. 상사의 울분과 분노 폭발을 주기적으로 경험하고 모욕적인 대우를 받게 되면 조금씩 울분이 쌓여 울분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김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상이 나를 공정하게 처우할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직장 등에서 불공정·불평등·차별을 지속적으로 겪으면 이런 신념이 무너지면서 굴욕, 억울함, 분노, 복수심 등을 느끼게 된다”며 “특히 20~30대 젊은층은 자신이 하는 일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합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있다는 데에서 울분을 느끼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울분장애 환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적인 성향이 강해진다”며 “우울증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치료가 늦을수록 예후도 좋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심각한 사건·사고를 겪은 뒤 제대로 된 지원이나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유명순 교수는 “울분장애는 처음에는 ‘놀랐다, 불안하다, 지금도 손이 떨린다’ 등의 증상을 호소하다 점차 무기력감·우울감·좌절감·분노 등 감정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게 특징”이라며 “울분은 정신적인 문제 외에도 신체건강과 전반적인 삶의 질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빨리 병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