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세가 잦아들지 않으면서 여전히 많은 직장인과 학생들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거나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집에 있으면 몸만 편할 뿐, 소음 때문에 직장·학교에 있을 때보다 업무와 공부에 쉽게 집중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출근·등교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백색소음’이란 다양한 주파수가 골고루 섞인 소리로, 여러 빛이 섞이면 흰색이 되듯 일상 속 여러 음이 합쳐져 발생하는 듣기 좋은 소음을 뜻한다. 일반소음과 달리 균일하고 일정한 주파수 스펙트럼을 가지며, 정해진 패턴이 없다. 때문에 귀에 쉽게 익숙해질 뿐 아니라, 거슬리는 주변 소음 또한 덮을 수 있다.
이 같은 백색소음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집중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백색소음이 귀에 전달될 경우, 심리상태가 안정될 때 발생하는 알파(α)파가 증가하고, 불안할 때 나오는 베타(β)파는 감소하기 때문이다. 백색소음을 들은 학생이 듣지 않은 학생보다 영어 단어 암기력이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현대인은 아침 기상 직후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쉴새 없이 소음에 노출된다. 소음은 시끄러워 불쾌함을 느끼게 만드는 소리다. 일반적으로 커다란 소리, 불협화음, 높은 주파수의 음 등이 소음으로 분류되지만 어떤 소리를 소음으로 느끼는지는 개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다르다. 보통 사람에겐 시끄럽게 들리는 소음이 어떤 이에겐 아무렇지도 않거나 오히려 편안함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같은 주관성 때문에 소음이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은 별다른 설득력을 얻지 못하다가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야 유해성을 입증하려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국환경공단 자료에 따르면 소음 강도 40㏈부터 수면을 방해하고 50㏈부터 혈압을 높인다. 주변에 흔한 층간소음(43㏈) 벨소리(70㏈), 철로 주변(80㏈), 경적소리(100㏈) 등은 모두 심혈관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보면 된다.
소음은 스트레스호르몬으로 불리는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분비를 유도해 심혈관질환 위험을 높인다. 아드레날린 분비가 많아지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서 심장박동, 혈압이 상승한다. 또 코르티솔에 의해 혈압과 혈당이 높아진다.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소음이 심혈관질환을 유발한다고 발표했으며, 2015년 유럽환경청(EEA)은 소음 노출로 인한 심장 문제로 매년 최소 1만명이 조기사망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또 독일 환경보건연구소의 알렉산드라 슈나이더 박사팀이 성인 110명에게 휴대용 심전계를 부착하고 일상생활 중 노출되는 소음과 심장활동을 비교 측정한 결과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웃는 정도인 65㏈ 이하 소음에도 심장박동 수가 올라갔다.
스웨덴 캐롤린스카연구소의 연구에서도 교통소음이 50㏈ 이상인 곳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심근경색 위험이 40% 높게 나타났다. 이밖에 소음은 정신적 스트레스, 우울증, 불면증, 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소음이 건강에 미치는 폐해가 알려지면서 반대 개념인 백색소음(White Noise)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착한 소음’으로도 불리는 백색소음은 일정한 주파수를 가지는 50~70dB 안팎의 소리다. 귀에 쉽게 익숙해지고 일반 소음과 달리 불규칙한 청각 패턴이 없는 게 특징이다. 여러 빛을 섞으면 흰색이 되는 것과 같은 개념에서 백색이란 이름이 붙었다. 여기엔 새소리, 계곡물소리, 빗소리, 귀뚜라미 소리, 물 흐르는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 외에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TV나 라디오에서 ‘치지직’거리는 소리,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등 인공적인 환경음이 포함된다.
백색소음은 정신을 집중할 때나 안정을 취할 때 나오는 알파(α)파 배출량이 증가하고 뇌가 불안할 때 나오는 베타파(β)가 감소해 심신 안정, 숙면, 스트레스 감소, 집중력 및 암기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뇌파는 주파수대에 따라 델타파(4㎐ 미만), 세타파(4∼8㎐), 알파파(8∼13㎐), 베타파(13∼30㎐)로 나뉜다. 베타파는 불안하고 흥분할 때, 알파파는 마음이 고요하거나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을 때 발생한다. 세타파는 얕은 수면상태일 때 나온다. 참선이나 명상처럼 마음이 아주 평화로운 상황에서도 활발해진다. 델타파는 깊은 수면에 빠졌을 때의 뇌파다.
최준 고려대 안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백색소음의 잔잔하고 반복적인 소리는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미친다”며 “백색소음을 들으면 흥분할 때 나오는 교감신경이 감소하는 대신 편안함을 느끼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서 세타파와 델타파의 활동이 활발해져 심신이 편안해지고 수면의 질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백색소음은 귀에 쉽게 익숙해져 주변 소음을 덮고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역할도 한다. 너무 조용한 환경에선 아주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지만 백색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소음 자체에 익숙해져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2013년 한국산업심리학회 연구결과 아무런 소음이 나지 않는 상태보다 백색소음을 들을 때 집중력은 47.7%, 기억력은 9.6% 향상되고 스트레스는 27.1% 감소했다.
백색소음에 익숙해진 탓에 조용한 독서실이나 집이 아닌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늘면서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종족)’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백색소음을 들을 수 있는 음향장비나 앱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G마켓이 수면용품 매출을 분석한 결과 편안한 소음을 내 숙면을 유도하는 백색소음기 판매가 전년 대비 300% 이상 증가했으며 스마트폰앱인 ‘백색소음’, ‘하얀소리’ 등은 누적 다운로드수 50만~100만을 기록하고 있다. 유튜브에서도 방송BJ가 듣기 좋은 백색소음을 지속적으로 들려주는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콘텐츠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엔 백색소음을 두통, 위장장애, 근육통, 불면증, 이명, 우울증 등 질환 치료에 적용하려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또 백색소음은 일반 소음과 반대 특성을 가진 소리를 발생시켜 소음을 줄이는 ‘사운드 마스킹’ 기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인공적인 음향을 발생시켜 층간소음이나 자동차소음 등이 덜 심하게 느껴지게 할 수 있고, 도청 방치 등에 활용된다.
아이는 백색소음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편이다. 아이가 울거나 보챌 때 빗방울 소리나 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려주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든다. 이는 태아가 뱃속에 있을 때 들리는 임신부의 옷이 배를 스치는 소리, 자연의 시냇물 소리, 폭포수 소리 등과 비슷한 주파수를 나타내는 데 따른 결과다.
백색소음이라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신생아가 백색소음에 높은 강도로 장시간 노출되면 청신경세포가 손상돼 언어발달장애와 정서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아이에게 백색소음을 들려줄 땐 30cm 이상 거리를 두고 50db 이하로 음량을 맞춰야 한다. 같은 백색소음이라도 전자기기나 가전제품에서 나오는 백색소음은 고주파가 일부 섞여 있어 자연의 소리보다 긍정적인 영향이 덜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백색소음에 대한 의존도가 과도하게 높아지는 것도 문제다. 최 교수는 “백색소음을 들으면 심신이 안정된다는 것은 일종의 최면요법으로 의학적인 효과는 입증되지 않았다”며 “특히 공부할 때나 잠을 잘 때마다 백색소음을 듣는 습관을 들이면 백색소음이 없는 환경에선 심리적인 불안감이 가중돼 집중력이 저하되고 수면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백색소음에 지나치게 익숙해질 경우 TV나 라디오를 켜 놓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수면개시장애를 겪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