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노인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설, 추석 같은 명절이다. 명절 기간 집에 가족과 친지들이 북적이다 썰물 빠지듯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면 노인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공허함과 우울증에 휩싸인다. 남편이나 아내, 가족 없이 혼자 사는 독거노인은 왁자지껄한 이웃집을 보면서 더 큰 고독감을 느낀다.
특히 명절 이후 이러한 우울감을 호소하는 노인들이 상당하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으레 명절이 지난 뒤면 자녀와 친척들이 떠난 허전함으로 인해 우울감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는 가족들의 방문마저도 끊기면서 더 큰 외로움과 상실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우울감은 감정 변화, 정신적인 압박뿐만 아니라 불면증, 식욕저하, 몸살 등 다양한 신체 증상을 부른다. 장기간 지속하면 인지기능 저하 및 치매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노인들의 우울감이 무릎 통증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울감과 무릎 통증, 두 질환은 전혀 다른 원인과 증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노인들의 경우 몸에 이상이 생겨도 자녀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증상을 참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질환을 치료할 기회를 점점 놓치고 있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개 명절 이후 겪는 후유증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며칠 내로 증상이 해소된다. 하지만 만약 증상이 2주 이상 계속된다면 겪고 있는 질환이 점차 만성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전문가의 진단과 함께 적절한 치료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2020년 통계청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내 전체 인구의 26.1%가 2인가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농어촌 지역의 2인 가구 비율은 51.3%로 다른 지역보다 2배가량 높았다. 대도시 지역은 2인가구의 대부분이 신혼부부인 반면 농어촌 지역에선 자녀가 출가한 후 노부부만 남은 가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혼자 사는 노인도 증가세다. 국내 65세 이상 인구 699만5000명 중 159만400명이 요양시설이나 집에서 홀로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명절이 아니더라도 사회심리학적·생물학적 요인으로 노인성 우울증이 나타날 수 있다. 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노인 학대가 우울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노인 1만267명 중 3329명(32.4%)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성 우울증은 흔히 노인의 ‘삼고(三苦)’로 불리는 병고(病苦, 질병), 빈고(貧苦, 가난), 고독(孤獨, 외로움)를 겪으면 1년 내에 발생할 확률이 높다. 구체적으로 가족제도 변화에 따른 독거노인 증가, 경제난으로 인한 가족 내 갈등,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편견, 노년기 경제적 어려움, 사회·가정에서의 역할 상실, 배우자·가족·친구의 죽음 등 원인으로 발생한다. 전체 노인의 10%가 우울증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과질환도 우울증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건강한 노인은 12%가량만 우울증에 걸리는 반면 관절염 중기 노인은 22%, 말기는 68%가 우울증으로 고통받게 된다. 뇌졸중·뇌경색증 등 뇌혈관질환 환자에선 24%, 치매환자는 약 50%에서 우울증이 나타났다. 이밖에 갑상선기능저하증, 심근경색증, 신경계질환 등이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
노인우울증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달리 정신적인 문제보다 신체 증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슬픔이나 외로움을 호소하기보다는 잠을 설치고 중간에 자꾸 깨는 등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식욕을 잃어 체중이 감소하며, 건망증이 심해지면서 말과 행동까지 느려진다”며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기억이 잘 안난다’, ‘뭐가 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요즘 소화가 통 안 된다’, ‘잠이 오지 않는다’ 등을 주로 호소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로 신체 증상 위주로 나타보니 우울증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단순 노화로 여겨 방치하다 뒤늦게 병원을 찾는 노인이 적잖다”고 덧붙였다.
치매처럼 집중력, 기억력, 인지기능 등이 저하되는 게 노인성 우울증의 가장 큰 특징이다. 노인성 우울증 환자에서 나타나는 인지기능 저하를 ‘가성치매(pseudodementia)’ 또는 ‘우울증 치매증후군’이라고 한다.
가성치매는 치매와 같은 인지기능 저하 증상을 보이지만 자기공명영상(MRI) 사진상 뇌병변은 이상이 없는 상태다. 보통 우울증 노인의 15%가량에서 가성치매가 나타난다. 주의할 점은 우울증을 장기간 방치하면 진짜 치매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우울증을 이유로 술을 마시는 습관은 최대한 빨리 고쳐야 한다. 우울감이 들 때마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이 ‘행복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침착함과 평안함, 학습과 기억력 증진을 유도) 분비를 억제해 우울증이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또 반복되는 음주로 가족과 멀어지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도 문제다.
자신이 △온종일 우울한 기분이 든다 △거의 모든 활동에서 흥미나 즐거움이 없다 △급격한 체중 감소(드물게 체중 증가)가 있다 △불면증(드물게 과수면) △정신이 초조 혹은 느려짐 △피로하고 에너지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과도하고 부적절한 죄책감이 든다 △집중력이 감소하고 우유부단해졌다 △죽음·자살에 대한 반복된 생각 △지나친 건강염려증 중에서 5가지 이상이 2주 이상 반복되면 노인성 우울증을 의심하고 가급적 빨리 병원을 찾는 게 좋다.
증상이 가벼우면 대인관계치료와 인지행동치료 같은 비약물 치료만으로 개선할 수 있다. 우울증이 심해 비약물치료로 호전되지 않으면 항우울제 투약이 필요하다. 단 노인학 전문의들은 신경안정제인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물은 노인에서 실신이나 호흡기능 저하 등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어 복용 전 전문의와 면밀히 상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홍 교수는 “우울증을 예방하려면 운동·건강한 식단·여가활동 참여·명상 등으로 평소 자기관리를 하는 게 중요하다”며 “나이가 들었더라도 가슴 속 우울감을 떨쳐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한편 주기적으로 산책을 하고 친구를 만나는 등 적극적인 외부활동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