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조직이나 세포가 담긴 슬라이드를 현미경으로 관찰해 병을 진단하는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슬라이드를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해 고화질 모니터로 판독하는 ‘디지털 병리’ 시대가 본격 시작됐다.
해가 갈수록 신규 암 환자가 늘면서 암을 정확히 진단하고 환자에게 맞춤 치료를 시행하는 정밀의료가 강조되는 가운데, 암 치료의 시작인 병리진단이 디지털로 이뤄지면 진단의 정확성과 안전성은 더욱 강화되어 정밀의료 실현에도 한층 다가서게 될 전망이다.
서울아산병원은 디지털 기술에 기반해 병리진단 프로세스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궁극적으로는 환자 맞춤 정밀의료를 실현하기 위해 검체 슬라이드의 정리부터 분류, 진단, 저장, 활용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디지털화하는 디지털 병리 시스템을 올해부터 전면 도입해 시행한다고 최근 밝혔다.
연간 96만 명의 암 환자가 찾는 서울아산병원은 매년 시행하는 병리진단만 해도 90만 건이 넘는다. 이 모든 진단을 디지털화하려면 1기가바이트 영화 100만 편을 합친 규모인 1.2페타바이트의 데이터가 소요된다.
서울아산병원은 디지털 병리로의 원활한 전환을 위해 검체 슬라이드를 디지털로 변환할 11대의 고성능 스캐너와 판독 뷰어 서버, 그리고 10기가바이트의 독립 망을 설치해 단일기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디지털 병리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전까지는 임상 병리사가 검체 슬라이드를 준비하고 분류 작업을 거쳐 병리 판독 의사들에게 전달하면, 판독 의사는 검체 슬라이드를 고배율 광학현미경으로 판독하고 판독이 끝난 슬라이드를 저장고에 옮기는 방식으로 병리진단이 이뤄졌다.
디지털 병리는 물리적인 분류와 전달 작업 없이 검체 슬라이드를 디지털 스캐너에 넣으면 스캔 영상이 판독 의사의 모니터로 자동 분류된다.
환자 입장에서는 슬라이드가 물리적으로 이동하고 보관되는 과정에서 슬라이드가 바뀌거나 분실되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판독 의사 입장에서는 고화질 모니터에서 보이는 병리 영상이 광학 현미경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선명하고 저배율부터 고배율까지 마우스로 간편히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판독의 정확성과 속도를 높일 수 있다. 판독 의사들이 병리 영상을 실시간으로 함께 보며 의견 교환이 가능하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무엇보다 서울아산병원의 전자의무기록시스템(EMR)과 디지털 병리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연동되어 암 통합진료 등 다양한 임상현장에서 병리 영상을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서울아산병원은 국내 최다 수준인 암 환자 40만 명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전체 정보와 검사, 수술, 약제 등 환자 개인별 임상 정보를 통합적으로 시각화하는 정밀의료 통합 플랫폼을 자체 개발해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디지털 병리 시스템으로 누적된 방대한 빅데이터를 결합하면 환자에게 최적의 치료법을 제공하는 등 새로운 의료 가치를 창출하는 것도 가능할 전망이다.
또한 빅데이터에 진단보조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을 적용하면 단순하고 반복되는 업무를 빠르게 처리해 병리 전문의의 업무 효율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아산병원은 지난 2011년 디지털 스캐너를 처음 도입해 디지털 병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디지털 병리 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앞으로 과거 10년 치 검체 슬라이드 400만 장을 스캔해 디지털화 할 예정이며, 추가적인 데이터 생성에 따라 관련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증설해나갈 계획이다.
장세진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는 “병리진단은 질병의 치료와 예후를 결정짓는 만큼 정확도와 안전성이 보장돼야 한다. 디지털 병리 시스템은 병리진단 과정을 고도화해 환자 안전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환자 맞춤형 치료의 핵심은 병리, 영상, 임상, 유전자 정보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디지털병리 시스템을 통해 축적한 의료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서울아산병원의 정밀의료 통합 플랫폼과 선진적인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기술을 결합하면 환자 맞춤형 초정밀의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이미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