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을 널리 알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누구 뭐래도 2016년 개봉한 영화 ‘곡성’이다. ‘미끼를 물었다’, ‘뭐시 중헌디’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세간에 다양한 화제를 불러왔다.
일반적인 범죄 스릴러인 줄 알고 찾았던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은 귀신, 미신 등이 나오는 오싹한 오컬트(occultism)물에 당황했었다. 나 같은 영화의 문외한에게 영화 ‘곡성’은 오싹한 귀신 영화로 기억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한 곡성의 산천은 놀랍도록 수려하고 청정해서 그해 가봐야 할 여행지 1호로 꼽았던 곳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섬진강과 대황강 그리고 깊은 산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시냇물 그리고 후덕한 인심뿐입니다.”라는 곡성 군수의 말대로 곡성이 내세울 만한 것은 섬진강과 대황강 뿐이다.
그러나 섬진강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침실습지에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 삼인봉을 감싸는 운해를 찾아오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강퍅한 도시의 삶에 문득 피곤함이 느껴질 때 투박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곡성에서 따스한 한 자락 위안을 얻어 가기 위해서 말이다.
전라남도 동북부에 위치한 곡성은 동쪽으로는 구례군 서쪽으로는 담양군, 북쪽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시, 순창군과 접한다.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화순군과 맞닿아 있다. 남원 및 구례와 함께 지리산 서쪽에 위치해 경상남도의 함양, 산청, 하동과 함께 지리산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곡성은 백제 때는 욕내군(欲乃郡)으로 불리다 신라 경덕왕 때 산맥과 하천의 흐름을 따라 곡성(曲城)이라고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시골장을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들이 산과 강에 둘러싸여 다니기 힘들어 지날 때마다 통곡을 한다 하여 곡성(哭聲)이라 불렸다. 그 후 곡식 곡자를 써서 곡성(穀城)으로 불리다가 지명만을 생각하고 조세를 부과한다는 여론에 따라 골짜기 곡을 써서 곡성(谷城)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조세와 군사에 대해 기술한 ‘여지도서’에는 “땅이 비좁고 사람은 많다. 일정한 생업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적혀 있다. 목기·죽기 등의 가내수공업과 삼베를 가늘게 짜는 돌실나이가 유명하다. 1895년(고종 32년) 군으로 승격, 1914년 창평군(지금의 전남 담양군 창평면)의 옥산면 등 8면을 합쳐 곡성군이 되었다. 1979년엔 곡성면이 곡성읍으로 승격됐다.
침혈(寢穴)의 명당에서 유래한 침실습지 … 수달, 흰꼬리수리, 삵 등 자생
곡성은 뭐니뭐니해도 섬진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곡성군 여행에서는 섬진강이 길동무가 되어주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준다. 섬진강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섬진강 침실습지에 가닿는다.
곡성군 침실습지(寢室濕地)는 섬진강과 곡성천이 만나면서 생긴 습지로 2016년 11월 11일 22번째 국가보호습지로 지정됐다. 고달면과 오곡면에 걸쳐 203만㎡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로 섬진강변에서는 유일한 국가 지정 습지다.
왜 침실이라 명명했는지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누워서 바라보는 풍경이 침실처럼 아늑하다’ ‘곡성 선산류씨의 문절공파의 묫자리가 침혈(寢穴)의 명당이라 여겨 침실(寢室)이라 불러왔다는 침곡(寢谷)이라는 지명의 유래에서 침실이 왔다’는 추정이 있다.
침실습지는 버드나무 군락지와 갈대숲이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멸종 위기 야생동물 1급인 수달을 비롯해 2급인 흰꼬리수리, 삵, 남생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이밖에 650여 종의 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계의 보고다.
침실습지를 대하면 바이올린 활이 끊어지듯 긴장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확 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에게 안긴 것 같다. 풀어진 마음으로 천천히 습지를 따라 걷다 보면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마냥 걷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한참 동안 걷다 보면 때로는 털썩 주저앉아 마냥 앉아 있고 싶어진다. 누구는 이런 것을 ‘물멍’이라고 한다. 강물을 차고 오르는 작은 새의 몸짓도 신기하기만 하다.
침실습지는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지만 4~6월, 9~11월에 일교차가 큰 계절의 이른 새벽에 찾으면 물안개 피어오르는 신비한 풍광을 만날 수 있다. 기온이 영하 10도가량으로 내려가면 상고대도 만날 수 있다. 이 특별한 풍경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진가들이 찾아온다.
강물이 불그스레하게 변해가는 해질 무렵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왜가리와 원앙이 목격되는 풍경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에는 푸른 식물이 우거진 습지의 모습에서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고달(高達)이란 지명은 ‘높은 다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달교는 남쪽 200미터 지점 섬진강 서편 강둑 생태데크가 시작되는 부분과 침실목교 상부를 중심으로 탐방에 나서면 좋다. 침실목교 위 갤러리에서 침실습지에서 사는 생물들과 습지의 사계절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침실목교를 건너면 무성한 갈대숲이 나온다. 가을날 하얗게 부서지는 환상적인 갈대숲을 지나면 이번에는 붉은색 상판의 제법 널찍한 다리가 나온다. 침실습지의 명물인 ‘퐁퐁다리’다. 비가 많이 올 때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철제 다리에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물이 넘칠 때쯤 물이 구멍으로 솟아나는 모습을 보고 ‘퐁퐁다리’로 명명했다.
침실습지와 이어진 자전거도로를 따라 섬진강 둘레길 트레킹에 나서도 좋다. 있는 그대로의 섬진강의 모습과 약간은 어수선해 보이는 침실습지의 모습에서 인공이란 전혀 없는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찾아가는데 조금 애를 먹을 수도 있다. 네비게이션에서 ‘침실습지’로 검색하면 습지 한가운데로 안내하거나 주유소로 안내한다. 주유소 한 쪽에 차를 세우고 둑길을 따라 걸어도 좋지만 퐁퐁다리까지 걷기에는 조금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곡성군 오곡면 기차마을로 150-108을 입력하면 너른 주차장과 흔들다리 근처로 안내한다.
섬진강 기차마을서 시속 30km 증기기관차로 ‘레트로’ 여행
침실습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곡성 관광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이 있다. 섬진강 기차마을은 전라선이 1999년에 이설되면서 구 곡성역에 관광용 미니열차를 들인 게 그 시작이다. 이듬해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약 10km 구간을 증기기관차가 달리면서 곡성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1960년대 실제 운행됐던 모습 그대로의 증기기관차를 타고 섬진강변을 시속 30km로 느릿느릿 달려 가정역에 닿는다. 왕복 약 45분이 소요된다. 섬진강 레일바이크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즐길 게 많은 레트로(복고) 여행지로서 대관람차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눈이 시릴 정도로 서정적이다.
구곡성역은 1933년부터 1999년까지 익산과 여수를 잇는 전라선 열차가 지나던 노선이었으나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철로가 현재의 곡성역으로 옮겨지면서 폐역이 되었다. 곡성기차마을은 폐선된 철로와 함께 철거 위기에 놓였던 구곡성역이 증기기관차 운행을 시작하면서 곡성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전화위복의 사례다. 인근에는 대규모 장미공원과 놀이공원인 ‘기차마을 드램랜드’가 조성돼 있다. 장미가 피는 계절에는 약 1000여 종의 장미를 보러 오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곡성천 따라 뚝방마켓서 문화공연 … 3일·8일 전통시장 장도 병존
곡성기차마을 바로 옆에는 곡성천을 따라 약 1km거리에 매주 주말마다 뚝방마켓이 열린다. 지역 예술가들이 직접 만든 각종 공예품들과 먹거리 등이 곡성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뚝방마켓은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문화공연이 열리는 문화장터이기도 하다. 주말 뚝방광장에서 열리는 거리 공연은 지역 주민들과 내국인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발걸음마저 잡아끈다. 커다란 배낭을 옆에 두고 공연 관람에 열중하고 있는 외국인의 모습이 유럽 어느 산악마을 소도시를 연상케 한다. 전통 있는 유럽의 산악마을에서 펼쳐지는 마을 공동체의 삶이 이곳 곡성 뚝방에서도 오롯이 느껴진다.
장터 옆 식당의 푸짐한 인심도 놓치면 아깝다. ‘친정엄마’의 넉넉함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푸짐한 육개장 한 그릇에 여행의 피곤함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뚝방마켓 바로 옆에는 3일과 8일마다 장이 열리는 곡성 전통시장이 있다. 그 사이에는 청년몰이 형성돼 제법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카페 등도 만날 수 있다.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도 근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