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 태어난 시인 고은은 이렇게 적었다. ‘내 고향 군산(群山)은 차라리 식민지 시대의 활력을 추억하는 정체된 도시로 상당한 시기를 지탱했다.’ 시인의 말대로 군산은 오래도록 일제 강점기 수탈의 전진기지로서 면모를 유지해왔다. 달리 말해 군산은 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단순히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의 잔재나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남아 있다는 것을 넘어 군산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온전히 넘어서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군산 토박이들이 고향의 ‘정서적 흔적’이 다 사라졌다고 한탄할 만큼 개발이 무자비하게 진행된 것도 사실이다. 무분별한 대규모 택지 개발, 새만금 배후도시로서 글로벌 국제도시가 되기 위한 개발 광풍, 일제 강점기의 흔적 그 어드메애 군산은 놓여 있는 듯하다.
고대 작은 갯마을에서 군사도시, 상업도시로 성장 … 새만금 개발 광풍에 정체성 혼란
금강 하구 좌안(남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군산은 동쪽으로는 익산시, 북쪽은 금강 건너편의 충남 서천군, 남쪽으로는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고 서해 바다와 면해 있다. 군산 출신의 소설가 채만식은 작품 ‘탁류’(1936)에서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까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군산은 전라북도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이 무주, 진안, 금산, 영동, 옥천을 지나고 백제의 옛 도읍인 공주, 부여, 익산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쉬어 가는 곳에 있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금강 하구에 위치한 변방의 작은 포구마을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시산군(현 임피면), 부부리현(현 회현면), 마서량현(현 옥구읍)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옥구현와 임피현에 속했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한데 모여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군산은 일찍부터 서해 중부지역 해상물류의 중심지였다. 그런가 하면 늘 외적들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백제군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서천군의 기벌포에서 싸웠다. 고려 우왕 6년에는 왜선 500척을 무찌른 진포대첩의 현장이 지금의 군산 내항이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항구를 열어 ‘진포’(鎭浦)라 불렀다.
조선 태조 6년(1397년) 이성계는 군산도(群山島)에 수군부대를 배치하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군산도는 지금의 옥도면 선유도(仙遊島)를 말한다. 세종 때 수군부대는 내륙의 옥구군 북면(지금의 옥구읍 북쪽, 현 월명동 장미동 일대) 진포로 옮아갔다. 당시 진포의 군산진은 군산진성을 갖춘 병영으로 중함 4척, 별함 4척의 전함과 군사 461명, 초공 4명이 근무했다. 정 6품인 수군만호가 관리했다.
군산도란 지명을 뭍에 빼앗기면서 옛 군산도는 현재 선유도 또는 고군산도로 불리며 군산시 옥도면(沃島面)에 배속돼 있다. 이에 지금은 선유도를 비롯해 연도(煙島), 무녀도(巫女島), 신시도(新侍島), 야미도(夜味島 소야미도 포함), 장자도(壯子島), 대장도(大長島), 관리도(串理島), 말도(末島, 방축도 및 명도가 부속섬), 비안도(飛雁島), 두리도(斗里島) 등 10여개 섬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라 총칭한다. 횡경도, 소횡경도, 보농도, 십이동파도 등 40여개 무인도도 고군산군도에 속한다. 이 곳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죽도(竹島), 개야도(開也島), 어청도(於靑島)는 옥도면에 배속돼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군산군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호남 해안의 방어를 중시했는데 여수 순천 해남 진도 등과 함께 군산에도 비중을 뒀다.
서해안 중부 해상물류의 중심지 … 조선쌀의 33% 실려나가
군산은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객주들도 많았다. 군산창, 군산포, 죽성리포,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객주들은 일제 세력에 대항해 영흥사(永興社)란 상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1899년 5월 군산은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일곱 번째로 개항했다. 군산항의 개항은 표면적으로는 군산 앞바다에서의 무단 어획과 논산 강경시장을 상대로 하는 밀무역선을 단속하고 자유무역 촉진과 관세수입을 노린 대한제국의 자주적 결정이었으나 이면에는 우리나라 호남평야, 만경평야 등 곡창 지대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일본의 끈질긴 요구가 있었다.
개항과 더불어 해안 일대에 조계지를 설치되고 개항장을 관리하는 옥구감리서를 비롯해 경무서, 재판소, 세관, 우체사, 은행, 전신사 등이 설치됐다. 군산역 부근에는 정미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지역이 형성됐다. 부잔교(浮棧橋), 대형 창고, 철도, 도로 등 근대적 항만 시설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군산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수탈 구조는 더욱 심화됐다. 호남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은 물론 전국 쌀 소출량 33%가 군산항을 통해 일본 열도로 빠져나갔다. 수출품의 90% 이상이 쌀이었으니 군산항은 그야말로 쌀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군산과 전주를 곧장 잇는 전군도로(1908), 대전에서 시작해 익산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1912)과 익산과 군산을 잇는 군산선(1912) 등이 쌀을 비롯한 자원 수탈을 위해 설치되었다. 충남 천안과 아산 온양, 서천 장항, 전북 군산을 잇는 장항선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일본인 거주지에는 일본식 집, 일본식 절, 정미소, 술도가 등이 생겨났다. 심지어 항구에는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인을 상대하는 유곽까지 생겨났다. 오늘날 군산 내항 일대에 남아 있는 군산세관, (구)조선은행군산지점, 유곽, 일본식 건물인 일명 ‘히로쓰가옥’, 일본식 사찰 ‘동국사’(東國寺), 군산 원도심과 수산업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기 위해 1926년 개통한 터널인 ‘해망굴’(海望窟) 등이 모두 그 시대의 잔재이자 군산 근대문화를 구성하는 키워드이다.
군산 근대문화유산 – 군산세관과 옛 조선은행군산지점
조선 농민들의 피땀이 서린 쌀을 쉴 새 없이 실어 날랐던 군산 내항의 번영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끝났다. 과거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퇴락한 어선 계류지로 전락한 내항에는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내항 갯벌 위에는 어선들이 표류하듯 정박해 있다.
갯벌을 가로질러 부잔교가 남아 있다. 일제는 조수와 만조의 수위 변화와 무관하게 대형 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해 일명 ‘뜬다리(부잔교)’를 고안했다. 3000t급 기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설계된 부잔교는 1926~1933년에 모두 6기가 설치됐고 이 중 3기가 남아 있다.
군산여객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해망로에는 붉은색 벽돌의 일본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구군산세관 본관과 구조선은행군산지점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일제의 조선 민중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상징하는 이 건물들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지붕 위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쇠침봉이 폐부를 찌르는 듯하다.
내항의 군산세관은 개항 직후인 1899년 설치됐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1908년 6월에 완공됐다. 2018년 국가 지정 사적 제54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호남관세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박물관은 소개의 장, 역사의 장, 공존의 장, 홍보관 및 포토존 등 8개 테마로 구성돼 있다. 약 1450점의 세관 관련 유물과 사료 등이 전시돼 있다. 건물 뒤편 산책로에는 군산세관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운영 시간을 제한하니 확인하고 방문하는 게 좋다. 스마트폰을 사용해 증강현실로도 만나볼 수 있다.
구조선은행군산지점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하면서 금융자본을 동원해 식민지 수탈에 앞장섰던 기관이다. 2008년 보수 복원 공사를 거쳐 ‘군산근대건축관’으로 재탄생했다. 로비와 금고 지점장실, 응접실, 2층 전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당시 발권 은행이었던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화폐와 동전, 금고 등이 전시돼 있다. 다양한 문헌과 사진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한 수탈의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1km 떨어진 신흥동에는 ‘히로쓰가옥’으로 알려진 일본식 목조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군산 장미동, 신흥동 일대는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조계지로, 신흥동에는 주로 일본인 상류층들이 모여 살았다. 히로쓰가옥은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야시키(屋敷) 형식으로 지어진 2층 목조건물로 군산부 협의회 위원이며 포목상을 경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1925년에 지었다. 건축 자재를 모두 일본에서 공수해 왔으며 잘 꾸며진 정원 등 일본식 주택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거주인 이름을 붙여 ‘히로쓰가옥’ ‘김혁종가옥’ 등으로 불렀으나 2009년 8월부터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가비’ 등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군산 동국사 … 포교 목적으로 식민지 침탈 앞장선 흔적 간직
군산시 금광동(법정동은 삼학동)의 동국사는 1909년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 우치다부칸(內田佛觀 Uchida Bukkan)이 창건한 일본식 사찰이다. 동국사는 일본의 수탈이 주권 및 경제적 수탈에 머무르지 않고 종교까지 장악하여 식민통치의 도구로 활용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다.
동국사 대문의 기둥에는 ‘조동종 금강사’라는 현판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옆에는 소화연호가 적혀 있었으나 지금은 지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소화 연호는 마치 주홍글씨처럼 우리 문화재 곳곳에 새겨져 있어 시시때때로 치욕의 역사를 소환한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일주문, 천왕문 등을 갖춘 한국식 사찰과는 확연히 다른 동국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을 따른 동국사는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느낌을 준다. 목재와 기와 등 건축 자재를 모두 일본에서 공수해 왔다. 대웅전은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 뒷벽에는 일본인들이 유골을 보관한 봉안당이 있었으나 일제 패망 후 유골은 서해 바다에 수장되고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다. 보물 제1718호로 지정된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 유물 373점은 원래는 김제 금산사에 있던 불상이나 해방 후 동국사로 모셔 왔다.
동국사 절 마당에도 일제강점기의 잔재들이 수두룩하다.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제작해 수송해 온 동국사 동종의 몸통에는 일왕을 칭송하는 축원문이 새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군산 시민들의 기부로 제작된 ‘평화의 소녀상’과 2021년 이치노헤 스님(일본 아오모리현 운상사 주지)의 주도하에 일본 자금으로 세워진 일본 조동종 스님들의 반성이 담겨진 참사문비(懺謝文碑)가 세워져 마치 역사의 참회장에 와 있는 듯하다. 참사문비에는 포교활동을 명분으로 식민지 침탈에 앞장선 것을 참회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대웅전 뒤편에 일본산 대숲도 볼 만하다.
‘타짜’ ‘8월의 크리스마스’ 등 촬영한 군산 ‘영화의 거리’
군산의 구도심은 근대 문화유산과 적산가옥 등 해방 전후의 독특한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어 영화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한다.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대표적이다. 그 뒤를 이어 ‘타짜’, ‘최종병기 활’, ‘남자가 사랑할 때’, ‘변호인’, ‘말죽거리 잔혹사’ 등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쟁쟁한 영화들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됐다.
거리 곳곳에 영화 포스터와 조형물, 현수막, 포토존 등 영화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식들이 붙여져 있다. 90% 이상이 군산에서 촬영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 무대인 초원사진관은 영화팬들이라면 필수로 들려야 하는 성지이다. ‘타짜’와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인 히로쓰가옥, ‘남자가 사랑할 때’와 ‘타짜’의 촬영지인 중국음식점인 빈해원(瀕海園)과 철길마을 등 영화가 사랑한 풍경과 군산의 옛 모습을 만나 볼 수 있다.
1945년부터 문 연 가장 오래된 빵집 군산 이성당
군산 중앙로 1가의 이성당(李盛堂)은 1945년 영업을 시작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75년 넘게 영업 중이다. 군산 사람치고 동국사는 몰라도 이성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성당을 찾아 일부러 군산을 방문하는 사람도 많다. 보통 가게 문 밖으로 20~30m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서울 서초동에 ‘햇쌀마루’란 분점을 낼 정도로 호황이다. 팥 앙금이 가득찬 단팥빵과 야채빵이 인기가 많다.
그러나 유명하면 말도 많은 법. 최근에는 제품의 원산지를 속인 혐의로 행정처분을 받는가 하면 여성 청소 노동자 산재책임 회피 의혹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