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호르몬이나 유전자에 의한 생물학적 성(sex)과 남녀로 태어나 사회적·문화적 역할에 의해 형성되는 젠더(gender)로 구별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상호 연관성을 갖고 질환의 발생에도 영향을 주는데,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의학적으로 연구하는것이 성차의학(Sex/Gender-Specific Medicine)이다.
성별에 따라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달리 해야 한다는 '성차의학'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미국국립보건원(NIH)은 의생명과학 분야 연구 시 그 대상이 되는 사람·동물의 성별 차이를 고려하도록 하고, 성별 차이가 없을 시 그 이유에 대해 반드시 명시해야 한다는 내용의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었다.
김나영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가 펴낸 ‘소화기질환에서의 성차의학’(대한의학서적 출간)에서 “성차의학은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정밀의학이나 맞춤요법 연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개념이고, 향후 다양한 의학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남녀에 따른 각 질환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체계적 연구를 통해 성차의학에 대한 이론과 지식이 계속해 깊이를 더하고 확장되도록 노력해야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질병의 진단·치료 시 의료진이 환자의 성별을 인지하고 그에 맞는 세심한 조치와 관리가 이뤄져야 보다 빠른 치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식후 더부룩함과 속쓰림 증상이 나타나는 기능성 소화불량증은 여성이 많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뇌와 위장이 연결된 회로를 자극해 스트레스호르몬 분비를 늘리기 때문이다. 반면 에스트로겐은 위암과 대장암 발생 예방 효과를 가져 이들 암은 남성에서 2배 정도 많다. 성호르몬과 이로 인한 면역 기전 차이, 남녀 행동 차이 등으로 남성은 식도암, 위궤양, 췌장염, 심근경색증, 뇌졸중, 간암, 폐암, 강직성 척추염 등이 여성보다 많다.
여성은 갑상선암이 남성보다 6배, 골다공증은 5배 많다. 이 밖에 치매, 우울증, 류마티스관절염 등에 더 많이 걸린다. 성별에 따라 증상이나 치료법이 달라질 수 있는 대표적인 질환은 다음과 같다.
위식도역류질환
남성과 여성이 잘 걸리는 타입이 각기 다르다. 남성은 식도 점막이 헐어 있는 미란성이 많은 데 반해 여성은 주로 점막의 변화가 없는 위식도역류질환을 겪는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방어 능력 덕분에 여성은 염증 증세가 잘 나타나지 않고, 대신 기능성(신경성)으로 이 질환이 발병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식도역류질환으로 인한 삶의 질도 성별에 따라 다르다. 남성에 비해 여성 환자가 위식도역류질환으로 인한 수면장애·식이장애 같은 문제를 많이 겪어서, 삶의 질 점수가 낮다(남성 54.9점, 여성 44.7점).
소화불량
남성은 그렐린(위가 비었다는 신호를 전달해 식욕이 들게 하는 호르몬) 분비가 소화불량과 관련이 있었지만, 여성은 신경성·스트레스성 등의 이유로 소화불량을 겪었다. 만약 소화불량으로 인한 통증이 생기면 여성이 남성보다 불안감과 우울감을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소화기질환 치료 시 심리학적·감정적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뇌졸중
65세 미만에서는 남성에게 빈번하고, 65세 이후부터는 여성에게 더 많다. 여성이 뇌졸중에 걸렸을 때 예후가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정주 노원을지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졸중 사망률이 남성은 14%, 여성은 25%”라며 “생존하더라도 여성은 인지 기능이 남성보다 더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햇다. 뇌졸중을 유발하는 요인에도 성별 차이가 있다. 흡연으로 인한 뇌졸중 위험은 여성이 남성보다 20% 더 높다. 당뇨병 역시 남성에선 뇌졸중 위험을 2~3배 올리지만, 여성에선 최대 7배에 달한다.
협심증
남성은 가슴통증을 주로 호소하지만, 여성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차는 식의 양상을 보인다. 우울감·수면장애 같은 동반 증상도 여성에게 많다. 미국 심장학회에도 “여성들은 심장발작 한 달 전에 극심한 피로, 불면증, 숨가쁨, 소화불량, 불안 등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는 논문이 보고돼 있다.
남녀 간 증상이 다른 이유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남성은 혈전(피떡)이 덩어리로 뭉치는 경향이 강하고, 여성은 혈전이 혈관벽을 따라 퍼져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우종신 경희대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여성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속이 불편하면 단순히 화병으로 치부하지 말고, 한 번쯤 병원 검사를 받는 게 좋다”고 말했다.
편두통
성인이 되면 여성이 남성보다 3배 이상 편두통을 많이 겪는다. 이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탓일 것으로 분석된다. 여성 편두통 환자의 60% 이상은 월경과 관련이 있다. 월경기에 나타나는 편두통은 비월경기에 비해 두통 지속시간이 길고 재발을 잘 하며 약제에 대한 반응이 낮다. 경구피임약을 복용하면 두통이 심해진다고 보고된 만큼 여성 편두통 환자는 경구피임약 복용 시 에스트로겐이 저용량 함유된 제제를 쓰고 의사와 상의 후 결정하는 게 좋다.
당뇨병
국내서 약 400만명이 앓고 있는 당뇨병도 남녀별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남성이 당뇨병에 노출되는 가장 큰 원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음주와 스트레스에 의해 노출되는 빈도와 강도가 높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개발된 당뇨병 예측 모델에 의하면 하루 다섯 잔 이상 음주를 하는 ‘고위험 음주군’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당뇨병 발생 위험이 1.5배 높다. 문제는 우리나라 중년 남성 3명 중 1명이 고위험 음주군에 속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당뇨학회에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당뇨병 환자의 26%가 고위험 음주를 했다.
스트레스는 아드레날린 또는 에피네프린으로 불리는 교감신경 흥분 신경전달물질 분비를 활성화한다. 이로 인해 혈당이 증가하고 인슐린 작용이 방해받으며 당뇨병 발병 또는 합병증 유발이 심화된다.
여성에게 남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면 당뇨병 유발 요인이 된다. 가임기 여성의 6~10%에서 발생하는 다낭성난소증후군은 당뇨병 위험을 높인다. 부신과 여성에게만 있는 난소에서 남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질병으로 비만이나 다모증 증상을 보인다.
남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여성은 건강한 여성에 비해 당뇨병 발생 위험이 4배나 높다는 덴마크의 연구결과도 있다. 여성은 임신으로 인해서도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 태아가 분비하는 호르몬은 혈당을 낮추는 인슐린 기능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임신성 당뇨병에 걸릴 수 있다.
저혈압
지난 5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보험 진료 데이터에 따르면 2019년 저혈압 환자는 3만6024명으로 집계됐다.
성별로 남성은 1만6430명으로 2015년(1만1053명)보다 48.6% 증가했고, 여성은 1만9594명으로 2015년(1만3893명)보다 4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대로 보면 전체 진료 인원 중 70대가 19.6%(7060명)로 가장 많았고, 이어 60대(16.5%), 80대 이상(14.2%), 10대(12.4%), 50대(11.8%), 20대(11.1%), 40대(7.4%), 30대(6.8%), 9세 이하(0.3) 순이었다.
남성은 70대가 26.9%로, 여성은 20대가 15.3%로 가장 비중이 높았다. 이에 대해 오성진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고령 남성은 저혈압을 유발하는 자율신경계 또는 심혈관질환 유병률이 높고 혈압을 낮출 수 있는 여러 가지 약을 먹을 가능성이 있다”며 “반면 젊은 여성은 흔히 다이어트로 인한 체중감소와 월경 관련 철 결핍성 빈혈 등이 높은 원인을 차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